[한겨레 2004-06-13 21:47]
 
[한겨레] 나는 오늘 <한겨레>의 지면을 빌어,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의 비인간적 행태를 고발하고자 한다. 이 때문에 어떠한 형태로든지 불이익을 당할 것이 솔직히 두렵기도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 아무 일도 없는 듯 학교에 계속 다닌다는 것은, 내 양심이 더 이상 허락치 않는다. 나의 양심과 이름을 걸고 학교측에 요구한다.

내가 교내 환경미화원 노동자들의 실상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지난 3월의 일이다. 학교에 3년이나 다니며 거의 매일같이 그분들과 마주쳤지만, 나는 그분들의 힘겨운 삶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우연히 ‘불철주야’(<불안정 노동 철폐를 주도할꺼야>의 준말, 고려대학교 학생들과 교내 미화원 노동자들의 연대를 추구하는 학내 단체)의 회원인 한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는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매일 새벽 5시까지 출근, 11시간의 고된 장시간 노동 후 받는 돈은 한달 최저임금 56만7260원(지난해까지는 그나마 최저임금도 받지 못했다). 일인당 담당구역이 400평이 넘는 엄청난 노동강도. 대부분이 여성노동자인데 늘상 용역업체로부터 해고의 압력에 시달려, 법으로 보장된 연·월차 휴가나 생리휴가는 꿈도 꾸지 못하는 현실. 그밖에도 온갖 열악한 노동조건들…. 나는 그 동안의 무지함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가도, 이제 그 깨끗함에 상쾌함을 느끼기는커녕 분노가 치솟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호화로운 최신식 건물을 짓고있는 대학에서, 또 잔디를 ‘세계화’시킨다고 누런 토종잔디를 양잔디로 바꾸는 데 수억원의 돈을 쓰는 ‘부자’대학에서, 이러한 노동착취가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경쟁입찰’과 ‘최저가 낙찰제’를 통한 노동의 용역화 때문이다. 고려대학교는 지난 99년 비용절감을 내세워 학내 시설관리업을 모조리 용역화했다. 몇 개의 용역회사가 학교에 입찰가를 제시하면 학교는 그 중 가장 낮은 가격을 써낸 업체를 선정해 도급을 맡기는 것이다. 용역업체는 자신이 써낸 최소비용에서 이윤을 남겨야 하므로 노동자들을 최대한 착취할 수 밖에 없고, 이로써 학내 시설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극단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학교쪽은 용역화로 인해 단순히 비용절감의 효과만 얻는 것이 아니다. 학내 시설 노동자들은 명목상으로는 이제 더 이상 학교 소속 노동자가 아니므로, 이들의 노동환경에 대한 책임 또한 학교가 아닌 용역업체로 돌아가게 된다. 학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악화된 노동환경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거나 파업이라도 시도한다면, 학교측은 간단히 용역업체를 바꿔버리면 그만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감히 나서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자칫 아무런 소득 없이 직장만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학내 시설 노동자들은 학교와 용역업체의 짜고 치는 고스톱에 놀아날 수 밖에 없는 무기력한 존재가 돼버린 것이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해 몇몇 학생들이 항의를 하면, 학교 당국은 돈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늘 발뺌해 왔다.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서는 등록금을 더 올려야 하는데 그러면 학생들이 반대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2002년 고려대학교 교비회계 결산서를 보니, 학교의 이월적립금(남은 예산)이 무려 1425억원이나 된다. 특히 시설노동자들의 임금이 포함된 일반용역비에 책정된 91억원의 한해 예산 중 사용된 금액은 겨우 13억원으로, 78억원의 예산이 사용되지 않은 채 이월금으로 넘어갔다. 학생들에게 교묘히 책임을 전가해온 학교측의 주장은 뻔뻔스러운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한 사회의 지적, 도덕적 본보기가 되어야할 지성의 전당 대학교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와같은 슬픈 현실과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을 바꾸기 위해서는 ‘최저가 낙찰제’를 폐지하고, 시설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조건으로 용역업체와의 계약이 이루어져야 한다. 6월 중순에 1년 동안 학내 시설관리를 책임질 용역업체를 선정하는 재입찰이 실시된다. 며칠 남지 않았다. 그 동안 나와 내 친구들의 등록금으로 학내 시설노동자들에게 야만을 자행해온 고려대학교는 이번 재입찰을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 계속해서 야만의 전당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지성의 전당으로 거듭날 것인지를.

김유진/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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