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역사서들이 실용서적이나 팩션의 탈을 쓰고 출간되는 현실이 반갑기만 하다. 물론 역사적 인물의 과장된 영웅화나 자극적인 해석 등이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든 일반인들이 역사에 한걸음 더 가깝게 다가서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조선의 마지막 개혁 군주라고도 불리는 정조를 분노와 콤플렉스라는 단어로 분석한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과 자신의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 오랫동안 참고 견뎌야 했던 분노의 세월...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이렇게 쉽게 정의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엄격하게 구속하기 시작해서 20년이 넘도록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무서운 인물이다. 자신의 하루하루를 꼼꼼하게 기록하고 분노를 삭이기 위해서 글을 쓰는 모습 또한 예사롭지 않다. 결국 그런 치밀함과 인내심, 광기에 가까운 집념이 그를 아버지 사도세자와는 다른 성공적인 군주로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이후로는 계획과 실행, 적과 동지에 관한 뻔하고 식상한 교훈들이 나열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정조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바로 그 이면의 태도다. 스스로의 단점을 부정하거나 비관하지 말고, 냉철하게 대응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인생에 있어서 소소한 행복을 바란다면 그런 삶이 너무 팍팍할 것이다. 하지만 정조처럼 뜨거운 열정이 있는 인물이라면 그런 치열한 삶 자체가 행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월간 시사 잡지의 특집 기사나 주간지의 연재기사 정도의 분량이면 좋았을 내용이다. 전체적으로 중복되는 분량이나 야사에 가까운 내용들이 좀 있다. 특히 정조의 명대사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는 몇 번이 나오는지 셀 수 없을 지경이다. 개인적으로는 다음의 두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실용 서적에서는 읽을 수 없는 주인공의 뜨거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 정조가 살면서 항상 주문처럼 한 말이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고립무원 대궐에서 정조는 살기 위해 자신을 숨기기도 해야 했고 감추어야 했다. 그래서 정조의 모습은 복잡하다.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의 생각과 일치한다고 하지만 정조를 보는 우리는 복잡하다. -26 체제공의 말을 듣고 정조는 다시 한 번 치솟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눈에서는 연신 눈물이 쏟아지고 답답한 나머지 손으로 가슴을 계속 치고 있었다. "수화와 풍빙으로 인한 재변이 극심한데 이런 아버지의 시신을 봉안한 채 지금 몇 년이나 이러고 있었는가! 이런 묘를 놓고 나는 대궐에 편히 있었으니, 그야말로 내가 불효하고 불초한 것이다." -p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