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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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리뷰를 쓰는 일이 어려워진다. 그건 첫 마디를 떼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읽으면서 좋다!고 감탄한 책일수록 더 그렇다. 왜 좋은지 설명해봐!라는 것인데, 그게 말이야, 야! 읽어보면 너도 알아! 이렇게 끝낼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래, 그러니까 이제 박민규 작가의 신작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여기까지 쓰는데 2시간 걸렸다.)



그리고 그녀가 그 사이에 서 있었다. 순간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을...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늘 시청하는 토요일의 쇼프로에서...즉 정해진 공식처럼 아이돌과, 발라드 가수가 출연하는 무대를 보고 있는데...카레를 먹으며 보고 있는데...방청객들의 박수소리도 여전한데...한결같은 MC에 늘 보던 무대인데...어떤 예고도 없었는데...느닷없이 요들송을 부르는 아저씨가 나와
요로레이리요 레이리요 레이요르리
하는 기분이었다.

(82p)





혹자는 이것은 판타지라고 이야기했다. 못생긴 여자와의 로맨스를 그린 소설이 누군가에게는 판타지로 분류되는 세상이다. 속물이라고 욕하지만 80%이상의 사람들이 외모지상주의자라는 것에 한 표를 걸겠다. 내색하는 외모지상주의자와 내색하지 않는 외모지상주의자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스타워즈의 광선검과 다를 바 없다고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못생긴 여자를 보고 요들송을 들었다는 남자의 심정을 이해하려면 '그래. 이건 소설이잖아'라는 암묵적 동의와 다짐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는 여자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판타지가 아니라고 믿고 싶은 사람이기에 5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가슴을 쿵하고 울릴만한 문장들을 턱턱 만나고 있었다.
일테면 이런 것이었다.



그녀에게 속삭인 요한의 말을 듣게 된 건 한참의 세월이 지나서였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를 이해하는 순간, 그녀의 아니, 아니에요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날 선배는 그렇게 얘기했어요. 더없이 작은 목소리였지만 지극히 단호한 목소리였어요. 그땐 무척 놀랐어요. 마치 내 마음을 꿰뚫어본 듯한 말이었거든요. 뭐라고 했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쟤는
진심(眞心)이야.

(140p)




못생긴 여자이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눈을 의심하면서 뒤를 돌아볼 만큼 못생긴 여자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자신이 받게된 관심이 진심인지 아닌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일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또 어떤 게임의 벌칙은 아닌지, 자신이 농락에 속고 있는 것인지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요한이 말했다. 그의 마음이 진짜라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쟤는 진심이야'라는 문장을 만났을 때 방심하고 있다가 열려진 맨홀 뚜껑에 빠진 기분이었다. 이것은 생각지도 못한 공격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항상 경계하고 있던 바로 그것이었다.
관심을 받는 것이 어색한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에게 친절한 말을 듣는 것이, 배려를 받는 것이 오히려 불편한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어떤 목적을 띠는가?를 먼저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무관심과 냉담함은 오히려 괜찮다. 그것은 익숙하다. 애써 신경쓰지 않으면 될 일이다. 문제는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따뜻한 말들이다. 그래서 더 당황한다. 이런 것에 대한 대처법은 아직 습득하지 못했다.
여자의 마음이 전해져 왔다. 요한의 귓속말을 듣고 놀랐을 여자의 마음, 그럼, 정말로 믿어도 될까? 이것이 현실일까? 갖가지 물음들로 가득했을 여자의 머릿속이 그려졌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고통은 그것이었어요. 누구에게라도 사랑받을 수 없다는 사실...누구도 날 사랑해 주지 않을 거란 절망감...가난이나 그런 것은 이미 제게는 아무런 고통도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쓰러지고 생활이 더욱 궁핍해졌지만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고생을 하고, 조금씩 불편을 덜어가고...그래도 어쨌거나 기회란 것이 있는 고통이니까, 또 어쨌든 노력에 따라 소소한 회복이 가능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 '사랑'의 문제에 관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274p)



 
20살에 체념을 먼저 배운 여자에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남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켄터키 치킨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며 맥주를 마셨다. 아주 오래 살아서 모르는 것이라고는 없는 영감같은 요한도 함께 있었다. 백화점에서 사람과 일에 치여 보냈던 하루를 셋은 닭다리와 맥주, 그리고 낯선 설레임으로 보상받았다. 남자와 여자는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다가갔다. 그것은 이어폰을 한짝씩 나눠끼고 같은 음악을 듣는 것이었다.

아무도 나의 나무에 오지 않아요.
나무가 아주 높거나 낮아야 했나봐요.
당신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걸 알겠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그리 나쁘다고 생각지 않아요.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요? 난 딸기밭에 가는 중이에요.
실감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머뭇거릴 일도 없죠.
딸기밭이여, 영원하리

스무살의 그들은 조심스럽게 말을 놓고,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의 집을 향해 걷는다.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는다. 그 연애에는 못생긴 여자와 남자의 연애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남자와 여자의 연애일 뿐이다. 하지만, 모든 연애가 그렇듯이 언제나 순탄할 수 만은 없다.

나는 우선 남자와 여자의 조심스러운 만남, 또한 거기에서 여자가 느꼈을 복잡한 마음에 대한 묘사도 좋았지만 요한이 켄터키 치킨을 앞에 두고 남자에게 했던 이야기들에서 더 오래 머물러 있었다.



이 포크를 봐. 앞에 세 개의 창이 있어. 하나는 동정이고 하나는 호의, 나머지 하나는 연민이야. 지금 너의 마음은 포크의 손잡이를 쥔 손과 같은 거지. 봐, 이렇게 찔렀을 때 그래서 모호해지는 거야. 과연 어떤 창이 맨 먼저 대상을 파고 들었는지...호의냐 물으면 그것만은 아닌 거 같고, 동정이냐 물으면 그것도 아니란 거지. 뭐, 맞는 말이긴 해. 손잡이를 쥔 손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상대도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어.
처음엔 어떤 창이 자신을 파고든 건지 모호해. 고통과 마찬가지로 감정이란 것 역시 통째로 전달되기 마련이지. 특히나 여자는 더 그래. 왜 그런지 모르면서도...그래서 일단 전반적으로 좋거나 싫어지는 거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하나의 창을 더듬어보게 돼. 손잡이를 쥔 손은 여전히 그 무엇도 알 수가 없는거지. 알아? 적어도 세 개의 창 중에서 하나는 사랑이어야해.

(122p)



박민규 작가의 전작 '핑퐁'을 읽었을 때도 나는 이것은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던 진리의 말씀을 발견한 것 마냥 호들갑을 떨었었다. 덕분에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은 포스트잇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요한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 작가의 말들은 도대체 이 사람은 도인이야? 라는 물음을 갖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자의 마음과 또 한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세밀하고 정확하게 짚어내고 설명할 수 있느냐 말이다.

책을 읽는 내내 여자의 마음에 공감하고, 그들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바랐지만 결국 마지막 장을 덮고 나는 말할 수 없이 깊은 허전함을 느꼈다. 그것은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이건, 결국 판타지일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을 숨기고 방어하고 있지만 누군가가 60억의 이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자신을 알아봐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존재감이 없다는 것, 멀쩡히 하루를 살고 있고, 이 거리를 걷고 있는데 아무도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은 기분은 깊은 절망감을 느끼게 한다.
그저, 영원히, 평생에 한번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거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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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시스터즈 키퍼 - My Sister's Keep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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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늦은 아침을 먹기 위해 모두 식탁에 모였다. 아버지는 아침부터 불판을 올리고 삼겹살을 굽고 계셨다. 엄마는 땀을 흘리면서 조기를 굽고 계셨고, 잠이 덜 깬 나는 보는 것 만으로도 땀이 나는 식탁을 보고 있었다. 야간에 일하는 동생은 아침에 퇴근해서 옷을 훌훌 벗고 식탁 앞으로 왔다. 일요일 아침, 부모님은 무엇 때문인지 모두 모여 아침을 함께 하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밥을 먹는 동안 부모님은 양념처럼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었고, 자식들은 멍한 눈으로 밥만 먹고 있었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에서의 저녁 식사 장면이 떠올랐다. 가족들은 식탁에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고르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의연하게 웃었고, 농담으로 현재의 상황을 애써 보지 않으려고 했다. 큰 딸의 암으로 식탁 전체는 유기농 채소로 채워져 있었지만 그런 것을 이야기의 중심에 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가족은 식탁 앞에서 솔직해 질 수 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의 예고편을 보고 "이 영화를 봐야겠다."라고 마음 먹었다. 그 이유는 팔 할이 리틀 미스 선샤인에 나왔던 '올리브' 때문이었다. 올리브는 훌쩍 커 있었다. 언니의 암을 치료하기 위해 태어난 맞춤형 아기 역할을 누구보다 잘 하리라고 생각했다. 올리브는 어린 아이인데도 눈이 깊고 생각이 많아보였다. 조숙한 아이에게서 풍겨나오는 눈빛이 있었다. 아이의 웃음은 따뜻했다. 영화를 보기로 마음 먹게 해 준 것은 '올리브'였는데 정작 영화가 시작되고 나는 카메론 디아즈가 맡은 엄마 역할에 푹 빠져버렸다.

 

카메론 디아즈가 삭발하는 사진이 언젠가 포털 사이트 뉴스로 떴었다. 그녀는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새겨지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정말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밀고 있었다. 그것이 이 영화에 나오는 장면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또 엄마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서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카메론 디아즈와 엄마는 절대 부등호가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영화에서 완벽하게 암에 걸린 딸의 엄마가 되어 있는 카메론 디아즈를 보았다.

 


사라는 변호사였다. 그녀는 성공한 전문직업 여성의 표본처럼 똑 부러지고, 활기차고, 명쾌하게 자기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딸 케이트가 이상했다. 아이를 안고 병원에 갔을 때 아직 말도 할 줄 모르는 아이가 암이라는 진단을 얻었다. 사라는 변호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사라는 이제 온전히 암에 걸린 케이트를 살리기 위한 인생을 살았다. 그래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이는 의사가 말한 것 보다는 오래 살고 있었지만 병은 날이 갈 수록 깊어졌고, 아이는 고통스러워했다. 의사는 해결책으로 맞춤 아기를 낳아, 케이트가 필요한 골수라든지, 신장을 이식할 수 있게 할 수 있다고 조언해주었다. 부모님은 맞춤아기 안나를 낳았다. 아주 아기였을 때 부터 언니의 필요한 부분을 공급하던 안나가 어느 날 부모님을 고소했다. 언니에게 신장을 이식하지 않겠으며 자신의 몸을 부모님의 의견대로 이용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사라는 안나의 변호사와 맞서 재판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라의 모든 관심이 오로지 케이트에게 쏠려 있는 덕분에 다른 아이들은 홀로 큰다. 그것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감히 토로할 수 없는 것은 눈 앞에서 힘겹게 병마와 싸우고 있는 케이트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케이트에 일에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강인한 군인같은 모습이었다. 케이트가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버린 자신을 흘깃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외출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하자 사라는 화장실로 들어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버렸다. 그리고 가족들은 모두 카니발에 참여하고 즐겁게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사라는 자신이 희생하고 있다고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지도 않았고, 병 든 아이를 돌보는 엄마라는 듯이 고생이 찌든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누구보다 에너지가 넘쳤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세상을 살면 살수록 좋은 부모, 건강한 정신을 가진 엄마 노릇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느끼곤 한다. 모든 엄마들이 엄마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처럼 살지 못한다. 당연히 그것을 강요할 수도 없다. 엄마들도 자아를 찾고, 엄마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우리는 당연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짜 '엄마'를 바란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돌아갈 곳이 있길 바라는 마음과 같다. 사라는 아마 우리가 엄마라는 사람들에게 바라는 어떤 이상향을 만족시켜주었는데 그것도 박수를 쳐주고 싶을 만큼 건강한 모습으로 그것을 이루어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은 모두 했고, 크게 웃기도 했고, 따지고 싶을 만큼 큰 소리로 따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딸에 대한 애정과 열정 때문이었다.

 

 가족이란 공동체가 사랑으로만 묶여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이제 드물다. 가족이란 공동체는 그 어떤 곳보다 분노와 증오가 폭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코 도망칠 곳이 없는 곳 또한 이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마이시스터즈키퍼가 좋은 영화인 이유는 이것이 어떤 특별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영화 곳곳에서 우리의 부모, 형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아무도 얘기 꺼내지 못하고 있던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슬그머니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거나, 입가에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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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도 걸어도 - Still Walking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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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가족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지금 내 얘기 듣고 있습니까?'라고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나는 가족만큼 자신들의 이야기만 하는 집단을 본 적이 없다. 이곳은 가족이기 때문에 배려가 없다. 가족이기 때문이 이해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서로 자신의 이야기만 하기 때문에 당연히 대화가 지속되기가 힘들다. 대화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다. 한 사람은 입을 다물고 이야기 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줘야 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어느 순간 폭발 할 수 밖에 없다. 그건 대개 몇 년, 혹은 몇 십년 동안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재생되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은 원래 그런 존재다. 똑같은 이야기를 끝도 없이 하는 집단. 
 

여기 일본의 평범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제목은 '걸어도 걸어도'라고 했고, 포스터는 싱그럽기 그지 없다. 녹차 맛처럼 청량한 가족을 보여주려는가보다. 지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녹차의 청량함보다 '걸어도 걸어도'의 가족들은 녹차의 쌉싸름한, 떪은 끝 맛을 더 닮았다. 
 

아버지는 두 아들 중 한명이라도 자신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아들이 없었다. 그래도 장남에게 거는 기대는 남달랐다. 그런 장남이 자신보다 먼저 죽었다. 둘째 아들은 총명한 장남 대신에 자신이 죽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아버지의 마음은 언제나 둘째 아들과 어긋났고, 아들은 집을 찾는 일이 어려웠다. 그렇게 1년에 1번정도만 보면 족하다는 생각을 갖고 살고 있는 둘째 아들이 아들까지 딸린 과부와 결혼을 했다. 장남의 기일을 맞아 집으로 가는 둘째 아들의 가족의 심정은 복잡하다. 부모님의 불평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딸과 사위, 둘째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주들까지 모두 모이자 고즈넉하기만 했던 시골 집에는 고소한 기름냄새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어머니는 잠시도 쉬지 않고 음식을 만들었다.
이 영화에서는 음식을 하는 장면이 꽤 많이 나온다. 고슬고슬한 밥, 보글보글 끓고 있는 고기찜, 바삭하게 튀겨지는 옥수수 튀짐 등. 스크린으로 한껏 차려진 음식의 냄새가 날것처럼 장면이 생생하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집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은 뗄 수 없는 상관관계인 듯 하다. 정성을 들여서 해 놓는 음식이 없다면 집은 사람들로 꽉 차 있어도 허전하다.
영화는 시종일관 따뜻해보이지만 가족들의 속 마음은 모두 편칠 않다. 하고 싶지만 묻어두는 말들이 쌓여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진심을 억누르기가 힘들다. 그 중에서도 시종일관 온화하고 자상해보이는 어머니의 마음이 가장 나를 놀라게 했다. 어머니는 뜨개질을 하면서, 갈아입을 속옷과 수건을 준비하면서, 덮밥을 먹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듯이 한 마디씩 말을 내뱉는데 식구들은 모두 마음이 서늘해진다. 엄마의 마음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들은 다음 날 버스를 타고 집을 떠나오면서 이번에 왔으니 이번 설은 오지 않아도 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루 동안 기억나지 않았던 스모 선수의 이름이 생각난다. (어머니와 함께 끝까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서 궁금해 했던 스모선수) 그리고 아들은 말한다. "꼭 이렇게 한 발 늦는단 말이야."
그렇다. 아들의 말 처럼 아들이 채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그리고 아들은 전과 같이 1년에 한번씩 집을 찾아 부모님의 묘를 찾는다. 
 영화는 어떤 해결책도 보여주지 않았다. 상황이 마무리 된다거나, 변화를 보여주지도 않았다. 나는 그 결말이 너무 좋았다. 그것이 매우 자연스러워보였기 때문이다. 영화라고 해서 아들이 마지막에 부모님과 극적으로 화해한다거나, 마음문을 열고 우리 모두 행복해요. 라는 미소를 짓고 영화가 끝났다면 마음이 꽤 씁쓸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모든 가족들이 그렇듯이 그렇게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끝났다.
걸어도 걸어도 닿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중에서도 가장 닿기 힘든 것이 가족의 마음이다. 그 마음 길이 너무 복잡하고 때로는 험난해서 우리는 도중에 포기하기도 하고, 다른 길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국 그 길로 돌아가고 그 길이 그래도 가장 편안했노라고 추억하게 될 것이다. 결국, 마음이 아프지만 뒤늦게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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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노 이발관 - Yoshino's Barber 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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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는 이발관이 하나밖에 없다. 바로 요시노 아줌마가 운영하는 요시노 이발관이다. 아이들은 700엔을 내고 항상 이곳에서 바가지 머리를 자른다.  동네의 남자아이들은 모두 바가지 머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바가지 머리를 특이하다고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날! 이 마을로 한 명의 전학생이 왔다. (모든 문제는 전학생으로부터 시작된다. 꼭 도시에서 전학 온 아이들은 도시 문물을 시골에 퍼뜨려서 아이들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한다!) 아이들은 모두 놀란 눈이 된다. 전학생의 머리는 바가지 머리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갈색으로 염색까지 했다. 아이답지 않은 옷매무새까지 자랑하는 전학생은 반 여자아이들의 관심과 인기를 독차지 하고, 4인방이 좋아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하여 성장이 빠른 여자아이까지 전학생에게 관심을 둔다. 
  


질투심에 가득 차 있던 동네 4인방의 마음을 연 것은 전학생이 가지고 온 포르노 잡지였다. 그것으로 친구가 되기로 결심한 이들은 아지트에서 흐뭇한 독서의 시간을 가지며 친해지게 된다. 하지만, 아이들의 마음에 점점 파고드는 생각 하나! '나도 얼짱이 되고싶다!!' 촌스러운 바가지 머리를 탈피하기 위해서 4인방은 생애 첫 반항을 시도한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바가지 머리를 고집하는 요시노 아줌마와 4인방의 투쟁은 어떻게 끝나게 될까? (훗, 4인방의 변신 장면은 보지 않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아.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면 산림욕을 한 기분이 든다. 마음이 깨끗해지고 요양을 하고 온 것 같은 기분 마저 든다. 그의 영화는 깨끗하고, 느리고, 꾸밈이 없다. 감독의 영화 중 '카모메 식당'은 그런 의미에서 슬로우 라이프 예찬론을 펼 수 밖에 없을정도로 정갈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졌다. 핀란드 어딘가에 가면 진짜 오니기리를 먹을 수 있는 카모메 식당이 존재할 것 같은 기분마저 드니까. 요시노 이발관은 카모메 식당과는 또 다른 웃음은 선사한다. 이건 정말 아이들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웃음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아이들의 빛나는 바가지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다. (나중에 내 아이에게 꼭 한번 바가지 머리를 해보고 싶은데. 그건 인권침해일까? 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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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 달린다 - Running tur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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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그러는겨~"

조필승에게 큰 딸이 하는 소리다. 조필승은 억울함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본다. 딸은 그대로 발길을 돌려 가버린다.

거북이 달린다에 나오는 조필승의 현 상황, 또 그의 위치를 가장 잘 표현해주고 있는 장면이다. 초등학생 딸에게 구박을 받는 아빠, 비오는 날 속옷만 입고 쫓겨나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그. 바로 충남 예산의 형사 노릇을 하고 있는 조필승이다. 조필승은 하릴없이 동네를 돌아다니고, 오합지졸같은 친구들과 어울린다. 어느 날 부인의 통장을 털어 소싸움 도박판에 돈을 걸었는데 그것이 덜컥 대박이 터지고야 말았다. 조필승은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즈음 마을로 숨어든 탈주범 송기태에게 그 돈을 싹 털리고 만다. 하지만 돈을 털렸다는 사실보다 그의 복장을 터지게 한건 송기태에게 맞을 만큼 흠씬 매를 두들겨 맞고 "너 형사 맞냐?" 라는 비웃음을 들은 것이다.



조필승은 그 때부터 달리기 시작한다. 송기태와 일대 일로 붙기 위해서! 오로지 그 이유 뿐이다. 그런데 송기태는 당연히 조필승과 상대해 줄 마음이 없다. 송기태는 어서 이 나라를 떠야 하는데 조필승은 그런 그를 자꾸 훼방을 놓는다. 송기태는 "도 너냐? 다음에 만나면 죽는다." 라고 엄포를 놓는다. 과연 조필승은 송기태에게 죽을 것인가? 아니면 조필승은 송기태를 잡을 것인가?
거북이 달린다 는 농촌 스릴러다. 스릴러는 스릴런데 진한 막걸리 냄새가 난다. 생활 연기의 달인 (송강호와 더불어) 김윤석은 그냥 조필승 자체이다. 대사 한 마디당 씨*이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는 대사가 없다. 그런데 그가 입만 열면 웃음이 터진다. 송기태를 잡으려고 아둥바둥 하면 할 수록 그는 송기태에게 당하고, 그의 어리바리한 친구들은 덩달아 당한다. 그런데도 그가 포기할 수 없는 건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딸에게 "도대체 왜 이러는겨~"라는 말까지 들었다. 이건 도무지 아버지로서 위신이 서지 않는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거북이 송기태는 아버지로서 달린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장면은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말 그대로 감동의 도가니! 
 


나는 우리 아버지들이 송기태처럼 제발 달려주시길 바란다.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식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땀 나게 달려주셨으면 한다는 것이다. 자식을 위해서, 부인의 구멍난 팬티를 위해서. 아버지들은 어느 순간 열정을 잃었고, 눈빛은 언제나 피로하다. 그런 아버지에게 아이들은 말 한마디 걸 수가 없다.  
아. 나는 땀냄새 진하게 나는 조필승에게 한번 안기고 싶다. 그의 후덕한 덩치로 그의 딸을 안듯이 투박하게 안아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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