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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시스터즈 키퍼 - My Sister's Keep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우리 가족은 늦은 아침을 먹기 위해 모두 식탁에 모였다. 아버지는 아침부터 불판을 올리고 삼겹살을 굽고 계셨다. 엄마는 땀을 흘리면서 조기를 굽고 계셨고, 잠이 덜 깬 나는 보는 것 만으로도 땀이 나는 식탁을 보고 있었다. 야간에 일하는 동생은 아침에 퇴근해서 옷을 훌훌 벗고 식탁 앞으로 왔다. 일요일 아침, 부모님은 무엇 때문인지 모두 모여 아침을 함께 하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밥을 먹는 동안 부모님은 양념처럼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었고, 자식들은 멍한 눈으로 밥만 먹고 있었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에서의 저녁 식사 장면이 떠올랐다. 가족들은 식탁에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고르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의연하게 웃었고, 농담으로 현재의 상황을 애써 보지 않으려고 했다. 큰 딸의 암으로 식탁 전체는 유기농 채소로 채워져 있었지만 그런 것을 이야기의 중심에 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가족은 식탁 앞에서 솔직해 질 수 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다.
마이 시스터즈 키퍼의 예고편을 보고 "이 영화를 봐야겠다."라고 마음 먹었다. 그 이유는 팔 할이 리틀 미스 선샤인에 나왔던 '올리브' 때문이었다. 올리브는 훌쩍 커 있었다. 언니의 암을 치료하기 위해 태어난 맞춤형 아기 역할을 누구보다 잘 하리라고 생각했다. 올리브는 어린 아이인데도 눈이 깊고 생각이 많아보였다. 조숙한 아이에게서 풍겨나오는 눈빛이 있었다. 아이의 웃음은 따뜻했다. 영화를 보기로 마음 먹게 해 준 것은 '올리브'였는데 정작 영화가 시작되고 나는 카메론 디아즈가 맡은 엄마 역할에 푹 빠져버렸다.
카메론 디아즈가 삭발하는 사진이 언젠가 포털 사이트 뉴스로 떴었다. 그녀는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새겨지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정말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밀고 있었다. 그것이 이 영화에 나오는 장면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또 엄마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서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카메론 디아즈와 엄마는 절대 부등호가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영화에서 완벽하게 암에 걸린 딸의 엄마가 되어 있는 카메론 디아즈를 보았다.
사라는 변호사였다. 그녀는 성공한 전문직업 여성의 표본처럼 똑 부러지고, 활기차고, 명쾌하게 자기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딸 케이트가 이상했다. 아이를 안고 병원에 갔을 때 아직 말도 할 줄 모르는 아이가 암이라는 진단을 얻었다. 사라는 변호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사라는 이제 온전히 암에 걸린 케이트를 살리기 위한 인생을 살았다. 그래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이는 의사가 말한 것 보다는 오래 살고 있었지만 병은 날이 갈 수록 깊어졌고, 아이는 고통스러워했다. 의사는 해결책으로 맞춤 아기를 낳아, 케이트가 필요한 골수라든지, 신장을 이식할 수 있게 할 수 있다고 조언해주었다. 부모님은 맞춤아기 안나를 낳았다. 아주 아기였을 때 부터 언니의 필요한 부분을 공급하던 안나가 어느 날 부모님을 고소했다. 언니에게 신장을 이식하지 않겠으며 자신의 몸을 부모님의 의견대로 이용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사라는 안나의 변호사와 맞서 재판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라의 모든 관심이 오로지 케이트에게 쏠려 있는 덕분에 다른 아이들은 홀로 큰다. 그것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감히 토로할 수 없는 것은 눈 앞에서 힘겹게 병마와 싸우고 있는 케이트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케이트에 일에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강인한 군인같은 모습이었다. 케이트가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버린 자신을 흘깃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외출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하자 사라는 화장실로 들어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버렸다. 그리고 가족들은 모두 카니발에 참여하고 즐겁게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사라는 자신이 희생하고 있다고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지도 않았고, 병 든 아이를 돌보는 엄마라는 듯이 고생이 찌든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누구보다 에너지가 넘쳤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세상을 살면 살수록 좋은 부모, 건강한 정신을 가진 엄마 노릇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느끼곤 한다. 모든 엄마들이 엄마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처럼 살지 못한다. 당연히 그것을 강요할 수도 없다. 엄마들도 자아를 찾고, 엄마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우리는 당연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짜 '엄마'를 바란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돌아갈 곳이 있길 바라는 마음과 같다. 사라는 아마 우리가 엄마라는 사람들에게 바라는 어떤 이상향을 만족시켜주었는데 그것도 박수를 쳐주고 싶을 만큼 건강한 모습으로 그것을 이루어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은 모두 했고, 크게 웃기도 했고, 따지고 싶을 만큼 큰 소리로 따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딸에 대한 애정과 열정 때문이었다.
가족이란 공동체가 사랑으로만 묶여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이제 드물다. 가족이란 공동체는 그 어떤 곳보다 분노와 증오가 폭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코 도망칠 곳이 없는 곳 또한 이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마이시스터즈키퍼가 좋은 영화인 이유는 이것이 어떤 특별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영화 곳곳에서 우리의 부모, 형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아무도 얘기 꺼내지 못하고 있던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슬그머니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거나, 입가에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