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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돌
문영심 지음 / 가즈토이(God'sToy)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방송 글이란 최대한 쉽고 평범해야 한다. 표현의 독창성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 영상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효과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최소한의 언어, 그것뿐이다. 방송 글을 쓰는 동안 나의 언어 세계는 한없이 축소되고 빈약해졌다. 다큐멘터리 원고를 쓰다보면 늘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얘기를 어떤 선배에게 했더니 그는 ‘당연하다’고 말했다. 우리가 쓰는 언어는 고작 2천 단어 내외라는 것이다. 가장 상식적이고 평이한 언어들을 골라 조합해 내는 것이 우리의 작업이라고. 아닌게 아니라 이번 작품의 프롤로그에 썼던 말을 다음 작품의 에필로그에 순서만 바꿔서 거의 비슷하게 쓰고 있는 것을 수시로 발견하곤 했다.
- 기억과 망각의 강을 넘어 13-14
그런 의미에서 내가 우연히 선택한 다큐멘터리 작가라는 직업은 내가 삶을 ‘견디는’데 적합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나의 주제를 선택해서 그것을 영상물로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공부가 필요했다. 그것은 그르니에가 말한 것처럼 ‘경박한’ 주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연구하는 작업이었다. 산더미 같은 자료 더미에 파묻혀서 정보를 읽고 조합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나를 권태로부터 다소나마 구원해 주었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전파를 타고 영상이 날아가고 나면 그뿐이었다. 또 다른 작업에 매달려서 벌ㅆ 지난번에 다루었던 주제는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그것은 지극히 소모적인 작업이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얼치기 지성인이 되어 갔다.
-두통과 불면의 날들, 지하의 방 中 201
책이라는 사족을 못 쓰는 나를 위해 지인(知人)이 책 선물을 보내왔다. 그런데.....
어찌된 게 늘 인터넷 서점을 돌아다니는 내게도 생소한 책들이 많다. 모두 ‘초판’이라 그런가보다 하고 위로를 하며 받았는데, 이 책은 더 열심히 읽어보라는 주문이 적혀 있다.
처음을 넘기며 아하~~! 방송작가의 이야기이다.
요즘은 그런 이야기를 하기도 힘들지만 가끔 만나 직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푸념하던 소리를 꼭 같이 들을 수 있는 책이다. 소위 글을 좀 쓴다는 사람이 너무나 ‘소비적인 글’만 쓰는 것에 힘들어하는.....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한 문학기행 이야기가 잘 풀려 나가지 않던 중에 취재를 갔던 이로부터 받게 된 시베리아 유형생활을 했던 감옥에서 가져온 ‘도스토예프스키의 돌’을 받게 되면서 때로는 왜곡되었을지도 모르는 또렷한 회상을 풀어내는 이야기이다.
물론
작가는 언젠가는 자서전적 이야기를 쓴다고 했던가?
그의 첫 장편에서 문학에 발을 담그고 고민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유신 말기의 암울했던 시대 상황의 바깥에서도 어쩌지 못하는 힘든 짧았던 4월의 봄날 같은 대학 생활을 보내는 청춘의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청춘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불안하고 두려웠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었지만,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세상은 아름답기보다는 더러웠고 사람들은 어리석고 바보같이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초조함과 조바심이 스물한 살의 내 영혼을 파먹고 있었다.
-즐거운 집단 오줌 누기 中 45P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와 연극은 인생을 모방하는 거라고 했다. 그런데 스물한 살의 나는 문학을 모방하는 인생을 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문학적인 사랑, 문학적인 삶이라는 게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나는 그런 삶을 원했던 게 틀림없다.
-‘좃’ 때문에 좆된 사연 73
그 힘든 청춘들이 창조의 세계에서도 고민하니 더더욱 어려움이 느껴진다.
그렇다. 우리는 소설을 쓸 때 누구나 나만의 세계를 창조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앞선 작가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고 있다. 그 길을 따라가면서도 그들이 보지 못하고 내가 본 것을 찾아내려고 머리를 쥐어짜는 것이다. 그들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세계를 발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쥐의 눈을 빌려 오기도 하고 새의 눈을 빌려 오기도 하고 노인이건 어린아이건 그 누가 되었건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누군가를 불러 와야 한다.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밤새도록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지만 역시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 연애보다 문학이 더 중요해 中 92-93
내가 아는 것은 대부분 책에서 읽은 것이었다. 나를 둘러싼 현실 세계에 대해서 나 스스로 파악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책에서 얻은 관념의 잣대로 재보고 있었다. 그것이 소설을 쓰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인지도 몰랐다.
- 연못 시장, 축제의 밤 中 131
액자 소설이 많이 등장하는데, 책을 전반적으로 이끌어가는 글로는 장 그르니에의 [섬]이 있다. 오래 전 읽은 기억은 나는데 내용은 모두 생소하다. 다시 꺼내어 읽어볼 일이다.
소설 속에서 액자 소설의 형태로 여러 소설도 나온다. 오래토록 소설을 쓰고 싶어 힘들게 나온 소설인데,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내 그의 새 소설은 또 한참동안을 기다려야 하는게 아닌가 싶어 조바심이 나지만 글 속의 그처럼 '도스토예프스키의 돌'을 지녔으리라 믿고 빠른 후속작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