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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박정호 지음 / 나무수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여행기를 읽다보면 나름의 여행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들이나 변명(??^&^)같은 것들이 있다. 제목을 보면서 아~~하! 이거지...싶었었다. 책 중에도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떠남을 갈망해 왔으며그러는 동안 삶이 여행의 일부가 되어 버린 느낌이다.떠날 수 없어 외롭고 우울해진다면아마도 그건 중독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 여행 중독자의 로망 207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 본능적으로 경계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두려움의 정체는 아주 사소한 것이거나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가려진 저편이 깊고 어두울수록 두려움의 부피는 크다. 부고 만질 세상이 좁은 아이들의 공포와 불안은 그래서 넓고 또 깊다.
상상은 두려움의 집이며 기원이다. 상상 없는 동물들에게 공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은 냄새로 감지되고 귀로 들리며 보이는 것에 반응할 뿐이다. 사냥꾼 혹은 포식 동물에 잡히거나 먹힐 것을 미리 알고 떨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상상 속 공포의 문 맞은편에는 또 다른 문이 있다. 호기심이다. 호기심도 공포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것, 낯선 것을 향해 열려 있다. 새로운 것에 끌리는 ‘네오필리아Neophilia'와 낯선 것을 싫어하는 ’네오포비아Neophobia'는 서로 같은 곳을 향해 열린 다른 문이다. 모험은 낯설고 위험한 것이지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 어두운 변경에 끌리고 유혹받는다. 간혹 표류하고 머뭇거릴 때도 있지 결코 그 길을 포기하거나 멈추지 않는다. 영장류는 아주 오랜 시간 떠돌며 살아왔고 결코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영장류인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끊임없이 이주하고 탐험하며 자신의 영역을 넓혀 왔다. 나에게 여행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본능의 영역이다.
- 두려움에 대하여 149-150
여행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모든(??^&^) 여행기에서 공통적으로 바라는 어떤 것들이 있다. 지도가 첨가되었으면 좋겠고(적당한 지도?? 첨가), 어딘인지도 모를 곳에 앉아 있는 듯한 넘치는 감정 표현은 싫고, 아직은 제대로 된 여행가가 아닌 관광객으로서 있는 나로서는 내가 간 코스를 관광객으로 간 듯한 느낌이 진하게 풍기는 여행기는 싫다는 것이다. 그런저런 여행기에 갖는 기대감을 만족시키는 여행기라고 할 수 있다. 적당한 선에서 감정이 끊어지는 것도 좋고, 그렇다고 그 흔한 여행서들에 나와 있는 그 지역의 역사적 사실만 읊은 듯한 세계사 교과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지도 않다. 조금 건조한 듯한 느낌도 있지만 그것이 박정호 글의 매력인 듯 하다.
가 본 적이 있는 카파도키아가 나오길래 어떨까? 하고 읽었는데, 아~~ 이렇게 감상이 나올 수도 있구나. 하면서 공감이 들었다,
지구의 한 공간이라고 믿기엔 너무나 고요하며 동시에 현란하다. 살아서 천국을 본 자가 없기에 그곳은 영원히 낯선 곳으로 남을 테지만 카파도키아는 현실이라고 하기엔 기괴하고 환상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생생하다.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는 앨리스처럼 나는 낯선 세상으로 들어간다.
- 이상한 나라 카파도키아 68
또한, 산티아고 순례길의 이야기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중세에는 신의 음성을 따라 이 길을 걸었고 지금은 자신 안의 신을 찾아 산티아고로 향한다. 성 야고보의 무덤 이야기는 성경에 등장하는 설일뿐이며 진실 여부를 가리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종교적 신념에 따르는 이들도, 신앙과 무관한 이들도 이 길을 걷는다. 그들은 길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자신을 발견한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순례자들에게는 세상을 향한 도전이고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21세기에 접어든 지금도 이 같은 명분은 여전히 유효하다.
- 별이 빛나는 들판을 향해 걷다 112-113
서로의 길을 향해 떠나기 좋은 시간이다. 우리는 길에서 만나고 길에서 헤어진다. 답은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항상 다른 이에게 묻는다. 어디로 가는지. 그곳에는 왜 가는지. 사람들은 길에서 신을 만났다고도 하고 믿음에 확신을 가졌다고도 하며 행복을 느꼈다고도 하고 건강을 되찾았다고도 한다. 내가 보고 느낀 것은 무엇인가?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내 속에 깊이 잠기고 싶을 뿐이다. 홀로 푸른 여명을 맞이하거나 고요한 노을에 잠길 때 순례는 민얼굴을 드러낸다. 몸은 길에서 부서지고 길에서 다시 만들어진다. 오래된 피와 살이 흩어지고 흙과 햇살이 만든 몸이 다시 태어난다. 길은 순례자의 몸이며 집이고 마음이며 세상이다.
-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156-157
앞서 가는 이의 등이 외롭다. 평생 눈길 한 번 주는 법 없이 아파해도 안아주지 못하고고작 무거운 짐을 지우거나 심지어 매를 맞을 때도 시린 뼈를 외면한다. 그래도 등은 차갑고 배기는 바닥을 군소리 없이 견뎌 낸다.순례길에서 가장 많이 보았던 것은 십자가도 이정표도 아닌,타인의 등이다. 지치고 외롭고 힘들어 굽고 무너져 가는 앞선 이의 등.길은 타인의 등을 보라 조용히 이른다. 사람은 자신의 등을 안을 수 없지만타인의 등을 어루만지고 감쌀 수 있다. 그리고 기꺼이 내 등을 내주는 믿음도 필요하다.길에서 생각한다. 타인에 대한 연민과 자신에 대한 교만을.
- 오세브레이로에서 갈리시아로 180
언덕에 이르러 걸음을 멈춘다. 이 순간을 잘게 나누고 아끼어 마음에 두고 싶었던 까닭이다. 무엇보다 여정의 끝에 남는 쓸쓸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절정의 순간 뒤에 찾아올 허무가, 한점을 향해 치달았던 열망의 부재가 두려운 것이다. 순례자는 그 정점의 순간에서 모든 것을 얻고 동시에 버려야 한다. 아무도 정상에서는 머뭇거리거나 오래 머물 수 없다.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순례다. 순례는 삶을 닮았고 삶은 또 순례에서 이어진다.
- 기쁨의 언덕, 몬테델고조 196-197
‘용서의 고개 Alto de Perdon'이곳에서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할 수도 있고 자신을 용서할 수도 있다. 용서는 죄의식에서 비롯된 슬프고 어두운 사랑이다. 지구상에서 오직 사람만이 죄를 짓고 용서를 한다. 자연 세계에서는 용서란 없다. 자비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죄가 없기 때문에.
- 용서의 고개 139
물론 요즘 책(??) 같지 않게 넓은 행간인데도 불구하고 좀 작은 듯한 글자 크기가 아쉽고, 특히나 전면 사진 위에 올라앉은 사연은 가끔씩 신경을 거스를 정도로 활자가 흐리게 보이는 곳도 있다. 그러나 그 아래 전면의 사진은 멋지다. 따로 한 권으로 나왔을만한 산티아고 순례나 타클라마칸 사막의 길까지 모두 한 권에 담겨 있는 것도 멋지다. 물론 충분한 두께의 분량에서 굳이 들어 있는 Living의 파트는 조금 생뚱맞지만 말이다.
여행자가 다른 나라, 특히 대도시에서 지하철 노선표를 이해할 때쯤이면 그 도시에서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음조차 불가능한 환승역, 다양한 종류의 지하철 표와 개찰 방식, 심지어 버튼을 눌러야 열리는 출입문에 이르기까지 자질구레한 지하철의 기초 상식을 깨우칠 때쯤이면 나는 어느새 그 도시의 일원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공중도덕을 준수하고 간접세도 제법 내서 도시 발전에 기여하는 모범 시민. 하지만 내가 이 도시에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며 다시 온다 하더라도 그때쯤이면 또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 어쩌다 마주친 그녀 2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가방을 꾸리는 우리는 여행중독자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