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전집 - 증보판
백석 지음, 김재용 엮음 / 실천문학사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백석을 대학 입시 공부를 하는 와중에 알게 되었다. 당시에 나는 여우난골족, 여승, 탕약, 국수, 고향,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의 시를 통하여 백석과 접하게 되었으며 - 항상 그러한 시를 대한 뒤로는 - 지문(시)에 관한 - 객관식 문제들이 뒤따르곤 하였다. 그런데 사람이 이런식으로 알게 된 작품에 대하여는 통상 정이 떨어지고 감흥이 줄게 마련이지만, 유독 백석의 작품들은 나에게 매번 강한 인상을 심어주곤 하였다. 특히 여승과 국수, 고향에서 좋은 느낌을 받은 나는『백석 전집』이라는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 탐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백석의 해방 전·후의 작품들을 온전히 아울러 정리해놓은 책이 없었다고 한다. 백석은 재북시인, 빨갱이였다. 때문에 해방 이후의 작품 - 을 구하기도 힘들 뿐더러 - 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꺼려졌던 모양이다. 아무튼 1997년 들어서야 이 책의 초판이 발행되었다.

 白石은 필명이고, 본명은 백기행(夔行)이었다고 한다. 책을 다 읽어보고(520쪽) 솔직히 실망을 했다. 사실 해방 이전의 작품들은 좋은 작품도 꽤 있었지만 해방 이후의 작품들은 쓰레기에 다름 아니었다. 물론 당시 북한의 문학이 죄다 그런 류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엮은이는 책 말미의 해설에서 백석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다른 대다수의 작가들과 달리 순수 문학과 문학을 통한 광의의 사상성(계급투쟁의식에 국한되지 않는) 교양을 추구하다가 배척도 받고 결국에는 절필하게 되었다고 변호 아닌 변호를 하고 있지만, 내가 봤을 때는 작품들의 주제와 목적이 오로지 선동 및 찬양 일색이며 - 해방 이전 백석이 추구하던 이미지와 미학은 완전히 실종되어 버렸던 것 같다.

 엮은이는 백석이 해방 이전에 향토적인 언어와 민속적 상상력에 집착하였던 것은 -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점에서 '고독'이라는 문제가 발생하자 그것을 극복해내려는, 과거의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마음에서였다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해방 이후 백석이 작품속에 '공산주의'라는 어휘를 사용한 것은 '특정한 사회를 지칭하기보다는 마음속에 있는 유토피아를 의미한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봤을 때는 완전히 어거지다. 예를 들어 보자.

 

 나는 제3인공위성

 나는 우주 정복의 제3승리자

 나는 쏘베트 나라에서 나서

...(중략)...

 나는 공산주의의 천재

...(중략)...

 나는 공산주의의 자랑이며 시위

 공산주의 힘의, 지혜의

 공산주의 용기의, 의지의

 

 모든 착하고 참된 정신들에는

 한없이 미쁜 의지, 힘찬 고무로

 모든 사납고 거만한 정신들에는

 위 없이 무서운 타격, 준엄한 경고로

...(중략)...

 지칠 줄 모르는 공산주의여

...(중략)...

 나는 공산주의의 사절

 나는 제3인공위성

 

-제3인공위성

 

 위의 시 어디를 봐서 '공산주의'가 특정한 이념이 아닌 마음 속 유토피아의 상징이란 말인가? 엮은이는 지나치게 백석을 미화하려 한 나머지 그의 드높은 '당'에 대한 충성심을 모른척 해버린 것이다. 솔직히 백석은 해방 이후 지독한 빨갱이가 되어 순수 문학의 색깔을 거의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해방 이후 아동문학에도 크게 관심을 가졌던 모양인데 그에 따른 결과물들도 썩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백석이 해방 이전에 쓴 시들의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닌지라 과연 그의 시 중에는 나의 마음을 잡아끄는 작품들이 여럿 있었다.

 

 옛날엔 통제사(統制使)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港口)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千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六月)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 방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통영(統營)

 

 백석은 통영에서 여자 하나를 짝사랑한 모양이다. 동일한 제목의 다른 시에도 '난(蘭)'이라는 여자가 등장하여 백석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이외에도 백석이 연정을 표현한 시는 은근히 많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이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바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그런데 백석은 사랑에 그리 성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북관에 계집은 아름답다...어늬 아침 계집은/머리에 무거운 동이를 이고/손에 어린것의 손을 끌고/가펴러운 언덕길을/숨이 차서 올라갔다/나는 한종일 서러웠다(절망)", "...내가 오래 그려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내가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은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이렇게 한여름을 보내면서 나는 하늑이는/물살에 나이금이 느는 꽃조개와 함께/허리도리가 굵어가는 한 사람을 연연해 한다(삼호(三湖)-묽닭의 소리 1)"...

 그렇게 남의 여자가 되어 '허리도리가 굵어가는 한 사람을 연연해' 하다보니 백석은 동태가 되어버렸다.

 

 처마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멧새 소리

 

 나 역시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나도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참, 찌개가 되더라도 빨리 녹았으면 좋겠다.

 아무튼 이 책에는 백석의 시 외에도 수필, 소설 등의 산문들도 실려 있는데, 딱히 특출난 작품은 없었다. 단지 그가 1962년도에 쓴「프로이드 주의 - 쉬파리의 행장」은 조금 재미있었다. 백석은 공산주의자 및 인도주의자의 입장에서 프로이트의 - 성욕을 바탕으로 한 패륜적인(?) 이론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을 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썩어빠진 자본주의와 죽이 맞아 떨어져 자본주의가 닿는 곳이면 어디든 날아가 달라붙는다. 마치 쉬파리처럼. 백석은 남조선에 미제의 자본주의가 침투하면서 더러운 프로이트도 만연하고 있다며 크게 걱정을 한다. 흥미롭고 나름 유익한 글이었다.

 

 위에 내가 직접 인용한 시들 말고도 내가 수험생 때 지문으로 만났다고 한 시들 역시 괜찮았으며 마지막으로 읽고 있노라면 가슴이 싸 해지는 시를 하나 옮겨 보고자 한다.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리 묘향산 백오십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새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쪽발이) 주재소장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들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팔원(八院)-서행시초 3

 

 ...이러면 안되지만...군대 생각이 나기도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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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 지음, 최호정 옮김 / 박종철출판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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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고등학교 때 소셜리즘의 신봉자였다. 사실 소셜리즘이란 놈이 허황되고 실현 불가능한 '공상'주의라는 점은 여러 사례들 - 레닌의 잔재를 포함하여 - 을 통하여 입증된 바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소셜리즘만큼 이상사회를 똑바로 조준하는 이념은 찾기 힘들고 - 그럼에도 명백하게 실패한 이념인만큼, 그 이념이 태동한 직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애쓰던 시절을 돌아보는 것도 (교훈삼아)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레닌이 쓴 책이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 - 비단 러시아 뿐만이 아닌 전 유럽의 - 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당연히 내가 그런 것들을 알리는 없고, 그러한 점에서 역자의 식견과 노력이 크게 두드러진다. - 그러니까 책 본문 중간중간에는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대체적으로는 누구를, 어느 단체를 지적하는 건지) 알 수가 없는 구절이 많은데, 역자는 그러한 모든 구절마다 친절하게 주석을 달아놓아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또한 번역된 문장도 상당히 매끄럽고 편집도 깔끔하였다.

 아무튼 이 책이 씌어질 당시 유럽에서는 사회주의가 대단히 유행하였는데, 정치하는 놈들이 으레 그렇듯이 사회주의하는 놈들 중에서도 당파가 갈리고 사익을 추구하는 놈들이 생겨났던 모양이다. 레닌은 갈라진 당파 중에 정통적인 맑스주의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고, 다른 당파들이 정통적인 맑스주의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며 '수정주의'를 내세우는 것을 - '경제주의', '기회주의'라고 일컬으며 비난한다.

 그러고보면 레닌의 적은 매우 많다. 레닌 자신이 폭력혁명을 지지하면서도 '테러주의'는 용납하지 않으며, '노동조합주의'는 부르주아지의 영향이므로 싫어하고(레닌이 추구한 것은 노동자들이 착취 당하는 체제 자체의 전복이지 조합을 통한 절충 따위가 아니었다),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투쟁에 뒤처지는 것도 싫어했다(다른 당파는 '자생적'인 투쟁을 놔두면 노동자들이 알아서 현실의 괴리를 깨닫게 된다고 주장하는 반면 레닌은 '자생적'으로는 그러한 사실을 결코 알 수 없으며 (혁명가들이)그들에게 '의식성'을 부여해주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레닌에 따르면 노동자들에게 '의식성'을 부여해주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혁명가 조직이 필요하며, 그러한 혁명가 조직의 결성, 프롤레타리아트들과의 연계 및 선동 등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려면 '전러시아적 신문'을 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매우 자주 발간되는 전러시아적 신문 없이는 오늘날의 러시아에서 그러한 활동(*전술한 레닌의 주장)을 생각할 수 없다. 이 신문을 중심으로 저절로 형성되는 조직, 신문의 협력자들(광의의 의미에서 신문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조직이 이른바 모든 것, 즉 최악의 혁명적 "탄압"의 시기에 당의 명예, 권위, 계승성을 지켜나가는 것에서부터 전국민적인 무장 봉기를 준비하고 그 시기를 정하고 봉기를 수행하는 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일을 할 준비를 갖출 것이다.」

 

 레닌의 이러한 주장들은 대부분 "다른 당파의 어떠어떠한 주장이 있는데 그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며 나의 이러이러한 주장이야말로 옳다"는 식의 패턴으로 펼쳐지는데, 그 문장들을 읽고 있노라니 도대체가 단 한 구절이라도 틀린 구석이 없으며, 이치에 합당하지 아니한 경우가 없고 그야말로 논리가 정연하여 반박할만 한 빈틈이 보이질 않았다. 과연 레닌은 천재였던 것 같다.

 그리고 책의 어느 구석에서 - 논지와는 크게 상관없지만 상당히 인상깊은 인용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좀 더 나아가서, 맑스주의자가 도대체 꿈꿀 권리가 있느냐고 묻겠습니다. 맑스에 따르면 인류는 언제나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과제들을 제기한다는 것, 전술은 당과 함께 성장하는 임무의 성장 과정이라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면 말입니다."

 이 준열한 질문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나는 등골이 서늘해져서, 어디 숨을 곳을 찾고만 싶은 기분이다. 삐사례프의 등 뒤로 숨어 보자.

 삐사례프는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라는 문제를 두고 다음과 같이 썼다. "같은 괴리라 해도 천차만별이다. 나의 꿈은 사건의 자연스러운 진행을 앞지를 수도 있다. 또는 완전히 빗나가서 사건의 어떤 자연스러운 진행도 이를 수 없는 곳으로 갈 수도 있다. 첫째 경우에 꿈은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일하는 사람의 정력을 지탱시키고 증대시킬 것이다, 그러한 꿈에는 노동력을 왜곡하거나 마비시킬 요소가 전혀 없다 심지어 완전히 그 반대이다. 만일 사람이 이런 식으로 꿈꿀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박탈당하고 있다면, 종종 앞서 나가 자신의 손으로 이제 막 빚어지고 있는 창조물 자체를 완결된 통일적 상태로 정신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면, 그렇게 된다면 예술 · 과학 · 실천적 생활 등의 영역에서 광범위하고도 힘든 일을 인간이 계획하고 끝까지 추진할 수 있도록 만드는 각성제가 어떤 것이 있을지,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꿈꾸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꿈을 진지하게 믿는다면, 삶을 주의깊게 들여다보고 자신이 관찰한 바를 자신의 공중누각과 비교해 본다면, 그러니까 자신의 공상을 실현하기 위해 성실히 활동한다면, 아무런 해악도 끼치지 않는다. 꿈과 삶 사이에 조금이라도 만나는 지점에 있다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이다."」

 

 조금 길긴 하지만 나는 이 문장이 상당히 가슴에 와닿았다. 인용문은 삐사례프라는 사람(만 28세로 단명했다고 한다)의 '빗나간 설익은 사상'이라는 책에서 발췌한 것이라고 한다.

 

 책을 읽고 느낀 점은, 조금 읽기 어렵다 - 는 말이 발췌해 놓은 문장들을 보면 다소 이해가 될 것이다 - 는 것과 '레닌은 천재다'라는 것이었다. 일찍이 이 정도로 완벽한 구조의 논문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경이로움을 금할 수 없는 책이다. - 덧붙여 이 책은 러시아어판 완역이라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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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의 생애와 사상
황영선 지음 / 국학자료원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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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비단 조선조 뿐 아니라 옛조선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재상을 꼽으라면 단연 황희 정승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양반의 엄청난 명성은 본인도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이 책을 읽고 나니 과연 이러한 위대한 명신 앞에 여하한 잡신(雜臣)들은 그저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희(1363~1452)는 호가 방촌이고, 시호는 익성공이다. 그는 고려 우왕 때부터 조선 세종조까지 관직을 74년간이나 역임하고 3정승을 24년간, 영의정만 19년을 지냈다고 한다. 저자는 황희가 죽었을 당시 사람들의 반응을 묘비에 쓰인 글을 인용해 밝히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의 장례일에는 사람들이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급히 달려와 애석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모든 사(司)의 서리(낮은 관리)들부터 노복(종)에 이르기까지 각자 베와 부조금을 내고 다투어 제물을 올렸는데, 극히 풍부하고 호화로웠으나 그 경비를 기탄하지 않았다. 옛사람의 유애(遺愛; 사랑을 끼침)가 한 귀퉁이 한 읍에 미치는 예는 있었지만 공의 경우같이 한 나라가 허둥지둥하며 연모한 예는 천고에 드물게 들었다」

 

 여기서 황희의 장례가 지극히 호화로웠다고 하였는데 이는 당사자의 생전 뜻과는 상반되는 것(장례를 간단히 치르라 하였음)이었으나 그의 죽음이 당시 사람들에게 워낙 안타까운 일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책에서 황희의 생애, 황희의 사상 두 장으로 나누어 설명을 하고 있는데, 과연 참고한 문헌의 양과 범위, 황희와 관련이 있는 유적들을 일일이 답사하여 사진으로 실어놓은 모양 등을 보아하니 상당히 공을 들인 흔적이 엿보인다. 하지만 제본시에 교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본문 중간중간에 오탈자가 많고,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해서 조금 지루한 맛도 없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황희라는 훌륭한 인물에 대하여 이렇게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 나와있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다. 그리고 저자가 소개를 '또 하고 또 하는' 황희의 일화들도 참으로 새겨볼 만한 것들이 많았는데, 그 중 몇 개만 옮겨보겠다.

 

「황익성공이 집에 거처할 때에는 위엄이 적으나 도당에 앉으면 좌우가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중략)..하루는 공회석상에서 (김종서가)술에 취해 비스듬히 앉아있는데 공은 소리(小吏)에게 명하여

 '병판의 자세가 단정치 못하니 그 의자 다리 좀 괴어주라'

 고 하였다. 김종서는 놀라고 당황하여 무서워서 몸을 소스라뜨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육진을 설치하고 적의 화살이 책상에 꽂혀도 안색이 부동이었는데 오늘은 뜻밖에 땀이 나와 등을 적시는구나'

 라고 말했다.」

 

「집은 초라하고 비가 오면 새고, 가재도구는 빈약하기 짝이 없고, 광은 아예 없었고, 심지어 등을 대고 자는 자리는 볏짚으로 엮은 멍석자리여서 공은 '이 자리는 가려운 데를 긁기에 좋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작은 아이들 여럿이 남루하고 맨발이었는데 공의 수염을 잡아당기고 혹은 공의 옷을 밟고 그 반찬을 집어 먹어 버리고 또한 공을 때리니 공은 그저 '아야 아야'하였다. 작은 아이들은 모두 노비의 아이들이다.」

 

 특히 마지막의 일화를 보라. 이게 말이나 되는가. 황희는 그야말로 聖人이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계란유골이니 검은소 흰소니 하는 이야기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효자에, 너그럽고 공사가 분명하고 박학다식하고 그야말로 명망을 사해에 드날렸으며 장수(90살)까지 한 사람. 도대체 이 사람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아직도 범부에 불과하다. 하고 싶은 일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지만 이 사람을 그저 본받고 싶어지는 것은 왜일까. 흠 잡을 곳 하나없는 이 완벽한 인물은 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스물세 살 대학생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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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자서전 범우 사르비아 총서 107
안중근 지음 / 범우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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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말 그대로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이다. 원제는 '안응칠 역사'로서 - '응칠'은 의사의 아명임 - 옥중에서 쓰인 의사의 유고이다.

 본문은 한문의 번역체임이 확연히 드러나며, 어휘 등을 보아도 마치 번역된 중국 고전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물론 이것이 흉은 아니다.

 

 아무튼 이 책을 보면 안중근 의사의 일생을 그대로 따라가 볼 수 있는데, 그의 무용담이나 - 반대로 얻어맞았던 이야기 등을 보면 의사가 용력이 대단히 세거나 한 것은 아니었으나 임기응변의 재능이 있고 무엇보다도 의협심이 강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례로 그는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워지자 아버지와 상의하여 가산을 탕진해가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만주에서는 의병을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참패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 상황을 묘사한 구절 중에 특기할 만한 부분이 있어 여기 옮겨 보겠다.

 

「...다행히 산 속 두메산골에서 집 한 채를 찾았다. 그래서 주인을 불러 밥을 빌었더니 그 주인이 조밥 한 사발을 주면서 말하였다.

 "당신들은 머뭇거리지 말고 어서 가시오. 빨리 가시오. 어제 이 아랫마을에 일본 병정이 와서, 죄없는 양민을 다섯 사람이나 묶어 가지고 가서 의병들에게 밥을 주었다는 구실로 그냥 쏘아 죽이고 갔소. 여기도 때때로 와서 뒤지니, 나를 원망치 말고 어서 가시오."

 ...(중략)...며칠 뒤 어느 날 밤, 또 한 집을 만나 문을 두들기며 주인을 불렀다. 그랬더니 주인이 나와 내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필시 러시아에 입적한 자일 것이니 차라리 일본 군대에 묶어 보내야겠다."

 그리고는 몽둥이로 때리고 같은 패거리를 불러 나를 묶으려 하였다. 그러므로, 형세가 어쩔 수 없어 몸을 피해 도망쳐 버렸다.」

 

 이는 왜놈들의 만행과 함께 우리나라 국민들이 얼마나 화합하지 못하는가를 보여주는 일화인 것이다. 당시에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위의 일화는 안중근 의사가 패전 이후 도망을 다니는 와중에 벌어진 일인데, 패전의 이유도 의병끼리 단합이 되지 않은 영향이 컸다고 한다.

 그리고 의사가 이토를 죽일 당시의 정황을 서술한 부분도 눈여겨 볼만 하다.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일개 조그마한 늙은이가 이같이 염치없이 감히 하늘과 땅 사이를 횡행하듯 걸어오고 있었다.

 "저것이 필시 늙은 도둑 이토일 것이다."

 하며 곧 단총을 뽑아들고, 그 오른쪽을 향해서 신속히 4발을 쏘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십분 의아심이 머리 속에서 일어났다. 내가 본시 이토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일 한 번 잘못 쏜다면 큰 일이 낭패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뒤쪽을 향해서, 일본인 단체 가운데서 가장 의젓해 보이는, 앞서 가는 자를 새로 목표하고 3발을 잇달아 쏘았다.

 또다시 생각하니, 만일 죄 없는 사람을 잘못 쏘아 다치게 했다면 반드시 잘된 일은 아니라, 잠깐 주춤하며 생각하는 사이에,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혔다.」

 

 의사는 거사 직후 '꼬레아 후라(대한민국 만세)'를 세 번 외쳤다고 한다. 아무튼 의사가 저격을 하면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혹시나 저게 이토가 아니면 어쩌나'하는 생각 따위를 하였다는 것을 보면 과연 의사의 간은 얼마나 컸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의사는 체포 직후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였으며, 이후의 심문과정에서나 재판정에서도 항상 당당하게 진술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죽는 것에 대하여는 일절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책에는 부록으로 의사의 공판 기록도 실어 놓았는데, 다른 공모자들은 대부분 할말이 없다고 하거나 제대로 말을 못하는 반면 안중근 의사만 홀로 장황하게 주장을 펴는데 자신에 대한 변호는 단 한마디도 없고 이토의 죄상에 대해서만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야말로 '담대하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호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책의 부록에는 의사의 유묵이나 연보, 옥중에서 쓴 편지 등이 실려 있다. 그런데 비록 의사가 유묵을 많이 남기기는 하였으나 그는 학문을 많이 한 사람은 아니었다. 청소년기에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허구한날 사냥만 다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의사의 세계 정황을 살피는 안목이나 주장을 개진하는 모양은 매우 수준이 높은데, 이러한 식견은 신문 등을 많이 읽어보고 길러나간 것 같다.

 또한 의사가 체포된 이후에 검찰관이 처음에는 잘해주다가 갑자기 태도가 급변한 점, 판사가 동경에 가서 지시를 받고 온 점, 재판에 있어 외국인 및 한국인 변호사 선임을 처음엔 허가하였다가 나중에 돌연 취소한 점 등 쪽발이들의 탐탁치 않은 만행들을 접할 수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이전에 일본인 중야태웅이 쓴 '죽은 자의 죄를 묻는다'를 보고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이미 그런 상태에서 이 책을 보았으므로 나에게 의거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재탕에 불과하지만 - 안중근 의사가 직접 저술한 자서전을 읽어 보았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다. 사실 책의 5분의 2 정도만 자서전이고 나머지는 전부 부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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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의 계보 살림지식총서 28
방성수 지음 / 살림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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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조폭의 계보에 대한 책이다.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건달들부터 김두한, 이정재, 신상사..., 양은이, OB, 범서방까지 우리나라 깡패들에 대하여 시간순으로 줄줄이 열거해 놓은 책이다. 그리고 매우 얇다(100쪽이 채 안 됨).

 당시 그 조직이 생성된 배경이나 사건 등도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으며 중간중간 깡패 사진들도 실려 있어 제법 볼만하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쯤 - 현재도 깡패와 정치, 경제 권력이 (매우 심하게)유착되어 있음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특정 정당 세력을 폄훼하는 듯한 부분이 있어 조금 뻘쩍지근하였다. 작가는 현재 조선일보 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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