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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 지음, 최호정 옮김 / 박종철출판사 / 1999년 2월
평점 :
절판
나는 고등학교 때 소셜리즘의 신봉자였다. 사실 소셜리즘이란 놈이 허황되고 실현 불가능한 '공상'주의라는 점은 여러 사례들 - 레닌의 잔재를 포함하여 - 을 통하여 입증된 바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소셜리즘만큼 이상사회를 똑바로 조준하는 이념은 찾기 힘들고 - 그럼에도 명백하게 실패한 이념인만큼, 그 이념이 태동한 직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애쓰던 시절을 돌아보는 것도 (교훈삼아)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레닌이 쓴 책이다.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 - 비단 러시아 뿐만이 아닌 전 유럽의 - 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당연히 내가 그런 것들을 알리는 없고, 그러한 점에서 역자의 식견과 노력이 크게 두드러진다. - 그러니까 책 본문 중간중간에는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대체적으로는 누구를, 어느 단체를 지적하는 건지) 알 수가 없는 구절이 많은데, 역자는 그러한 모든 구절마다 친절하게 주석을 달아놓아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또한 번역된 문장도 상당히 매끄럽고 편집도 깔끔하였다.
아무튼 이 책이 씌어질 당시 유럽에서는 사회주의가 대단히 유행하였는데, 정치하는 놈들이 으레 그렇듯이 사회주의하는 놈들 중에서도 당파가 갈리고 사익을 추구하는 놈들이 생겨났던 모양이다. 레닌은 갈라진 당파 중에 정통적인 맑스주의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고, 다른 당파들이 정통적인 맑스주의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며 '수정주의'를 내세우는 것을 - '경제주의', '기회주의'라고 일컬으며 비난한다.
그러고보면 레닌의 적은 매우 많다. 레닌 자신이 폭력혁명을 지지하면서도 '테러주의'는 용납하지 않으며, '노동조합주의'는 부르주아지의 영향이므로 싫어하고(레닌이 추구한 것은 노동자들이 착취 당하는 체제 자체의 전복이지 조합을 통한 절충 따위가 아니었다),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투쟁에 뒤처지는 것도 싫어했다(다른 당파는 '자생적'인 투쟁을 놔두면 노동자들이 알아서 현실의 괴리를 깨닫게 된다고 주장하는 반면 레닌은 '자생적'으로는 그러한 사실을 결코 알 수 없으며 (혁명가들이)그들에게 '의식성'을 부여해주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레닌에 따르면 노동자들에게 '의식성'을 부여해주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혁명가 조직이 필요하며, 그러한 혁명가 조직의 결성, 프롤레타리아트들과의 연계 및 선동 등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려면 '전러시아적 신문'을 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매우 자주 발간되는 전러시아적 신문 없이는 오늘날의 러시아에서 그러한 활동(*전술한 레닌의 주장)을 생각할 수 없다. 이 신문을 중심으로 저절로 형성되는 조직, 신문의 협력자들(광의의 의미에서 신문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조직이 이른바 모든 것, 즉 최악의 혁명적 "탄압"의 시기에 당의 명예, 권위, 계승성을 지켜나가는 것에서부터 전국민적인 무장 봉기를 준비하고 그 시기를 정하고 봉기를 수행하는 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일을 할 준비를 갖출 것이다.」
레닌의 이러한 주장들은 대부분 "다른 당파의 어떠어떠한 주장이 있는데 그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며 나의 이러이러한 주장이야말로 옳다"는 식의 패턴으로 펼쳐지는데, 그 문장들을 읽고 있노라니 도대체가 단 한 구절이라도 틀린 구석이 없으며, 이치에 합당하지 아니한 경우가 없고 그야말로 논리가 정연하여 반박할만 한 빈틈이 보이질 않았다. 과연 레닌은 천재였던 것 같다.
그리고 책의 어느 구석에서 - 논지와는 크게 상관없지만 상당히 인상깊은 인용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좀 더 나아가서, 맑스주의자가 도대체 꿈꿀 권리가 있느냐고 묻겠습니다. 맑스에 따르면 인류는 언제나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과제들을 제기한다는 것, 전술은 당과 함께 성장하는 임무의 성장 과정이라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면 말입니다."
이 준열한 질문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나는 등골이 서늘해져서, 어디 숨을 곳을 찾고만 싶은 기분이다. 삐사례프의 등 뒤로 숨어 보자.
삐사례프는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라는 문제를 두고 다음과 같이 썼다. "같은 괴리라 해도 천차만별이다. 나의 꿈은 사건의 자연스러운 진행을 앞지를 수도 있다. 또는 완전히 빗나가서 사건의 어떤 자연스러운 진행도 이를 수 없는 곳으로 갈 수도 있다. 첫째 경우에 꿈은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일하는 사람의 정력을 지탱시키고 증대시킬 것이다, 그러한 꿈에는 노동력을 왜곡하거나 마비시킬 요소가 전혀 없다 심지어 완전히 그 반대이다. 만일 사람이 이런 식으로 꿈꿀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박탈당하고 있다면, 종종 앞서 나가 자신의 손으로 이제 막 빚어지고 있는 창조물 자체를 완결된 통일적 상태로 정신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면, 그렇게 된다면 예술 · 과학 · 실천적 생활 등의 영역에서 광범위하고도 힘든 일을 인간이 계획하고 끝까지 추진할 수 있도록 만드는 각성제가 어떤 것이 있을지,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꿈꾸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꿈을 진지하게 믿는다면, 삶을 주의깊게 들여다보고 자신이 관찰한 바를 자신의 공중누각과 비교해 본다면, 그러니까 자신의 공상을 실현하기 위해 성실히 활동한다면, 아무런 해악도 끼치지 않는다. 꿈과 삶 사이에 조금이라도 만나는 지점에 있다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이다."」
조금 길긴 하지만 나는 이 문장이 상당히 가슴에 와닿았다. 인용문은 삐사례프라는 사람(만 28세로 단명했다고 한다)의 '빗나간 설익은 사상'이라는 책에서 발췌한 것이라고 한다.
책을 읽고 느낀 점은, 조금 읽기 어렵다 - 는 말이 발췌해 놓은 문장들을 보면 다소 이해가 될 것이다 - 는 것과 '레닌은 천재다'라는 것이었다. 일찍이 이 정도로 완벽한 구조의 논문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경이로움을 금할 수 없는 책이다. - 덧붙여 이 책은 러시아어판 완역이라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