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의 생애와 사상
황영선 지음 / 국학자료원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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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비단 조선조 뿐 아니라 옛조선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재상을 꼽으라면 단연 황희 정승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양반의 엄청난 명성은 본인도 익히 알고 있었으나 이 책을 읽고 나니 과연 이러한 위대한 명신 앞에 여하한 잡신(雜臣)들은 그저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희(1363~1452)는 호가 방촌이고, 시호는 익성공이다. 그는 고려 우왕 때부터 조선 세종조까지 관직을 74년간이나 역임하고 3정승을 24년간, 영의정만 19년을 지냈다고 한다. 저자는 황희가 죽었을 당시 사람들의 반응을 묘비에 쓰인 글을 인용해 밝히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의 장례일에는 사람들이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급히 달려와 애석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모든 사(司)의 서리(낮은 관리)들부터 노복(종)에 이르기까지 각자 베와 부조금을 내고 다투어 제물을 올렸는데, 극히 풍부하고 호화로웠으나 그 경비를 기탄하지 않았다. 옛사람의 유애(遺愛; 사랑을 끼침)가 한 귀퉁이 한 읍에 미치는 예는 있었지만 공의 경우같이 한 나라가 허둥지둥하며 연모한 예는 천고에 드물게 들었다」

 

 여기서 황희의 장례가 지극히 호화로웠다고 하였는데 이는 당사자의 생전 뜻과는 상반되는 것(장례를 간단히 치르라 하였음)이었으나 그의 죽음이 당시 사람들에게 워낙 안타까운 일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책에서 황희의 생애, 황희의 사상 두 장으로 나누어 설명을 하고 있는데, 과연 참고한 문헌의 양과 범위, 황희와 관련이 있는 유적들을 일일이 답사하여 사진으로 실어놓은 모양 등을 보아하니 상당히 공을 들인 흔적이 엿보인다. 하지만 제본시에 교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본문 중간중간에 오탈자가 많고,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해서 조금 지루한 맛도 없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황희라는 훌륭한 인물에 대하여 이렇게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 나와있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다. 그리고 저자가 소개를 '또 하고 또 하는' 황희의 일화들도 참으로 새겨볼 만한 것들이 많았는데, 그 중 몇 개만 옮겨보겠다.

 

「황익성공이 집에 거처할 때에는 위엄이 적으나 도당에 앉으면 좌우가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중략)..하루는 공회석상에서 (김종서가)술에 취해 비스듬히 앉아있는데 공은 소리(小吏)에게 명하여

 '병판의 자세가 단정치 못하니 그 의자 다리 좀 괴어주라'

 고 하였다. 김종서는 놀라고 당황하여 무서워서 몸을 소스라뜨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육진을 설치하고 적의 화살이 책상에 꽂혀도 안색이 부동이었는데 오늘은 뜻밖에 땀이 나와 등을 적시는구나'

 라고 말했다.」

 

「집은 초라하고 비가 오면 새고, 가재도구는 빈약하기 짝이 없고, 광은 아예 없었고, 심지어 등을 대고 자는 자리는 볏짚으로 엮은 멍석자리여서 공은 '이 자리는 가려운 데를 긁기에 좋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작은 아이들 여럿이 남루하고 맨발이었는데 공의 수염을 잡아당기고 혹은 공의 옷을 밟고 그 반찬을 집어 먹어 버리고 또한 공을 때리니 공은 그저 '아야 아야'하였다. 작은 아이들은 모두 노비의 아이들이다.」

 

 특히 마지막의 일화를 보라. 이게 말이나 되는가. 황희는 그야말로 聖人이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계란유골이니 검은소 흰소니 하는 이야기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효자에, 너그럽고 공사가 분명하고 박학다식하고 그야말로 명망을 사해에 드날렸으며 장수(90살)까지 한 사람. 도대체 이 사람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아직도 범부에 불과하다. 하고 싶은 일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지만 이 사람을 그저 본받고 싶어지는 것은 왜일까. 흠 잡을 곳 하나없는 이 완벽한 인물은 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스물세 살 대학생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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