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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자서전 ㅣ 범우 사르비아 총서 107
안중근 지음 / 범우사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말 그대로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이다. 원제는 '안응칠 역사'로서 - '응칠'은 의사의 아명임 - 옥중에서 쓰인 의사의 유고이다.
본문은 한문의 번역체임이 확연히 드러나며, 어휘 등을 보아도 마치 번역된 중국 고전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물론 이것이 흉은 아니다.
아무튼 이 책을 보면 안중근 의사의 일생을 그대로 따라가 볼 수 있는데, 그의 무용담이나 - 반대로 얻어맞았던 이야기 등을 보면 의사가 용력이 대단히 세거나 한 것은 아니었으나 임기응변의 재능이 있고 무엇보다도 의협심이 강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례로 그는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워지자 아버지와 상의하여 가산을 탕진해가며 독립운동을 하였다. 만주에서는 의병을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참패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 상황을 묘사한 구절 중에 특기할 만한 부분이 있어 여기 옮겨 보겠다.
「...다행히 산 속 두메산골에서 집 한 채를 찾았다. 그래서 주인을 불러 밥을 빌었더니 그 주인이 조밥 한 사발을 주면서 말하였다.
"당신들은 머뭇거리지 말고 어서 가시오. 빨리 가시오. 어제 이 아랫마을에 일본 병정이 와서, 죄없는 양민을 다섯 사람이나 묶어 가지고 가서 의병들에게 밥을 주었다는 구실로 그냥 쏘아 죽이고 갔소. 여기도 때때로 와서 뒤지니, 나를 원망치 말고 어서 가시오."
...(중략)...며칠 뒤 어느 날 밤, 또 한 집을 만나 문을 두들기며 주인을 불렀다. 그랬더니 주인이 나와 내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필시 러시아에 입적한 자일 것이니 차라리 일본 군대에 묶어 보내야겠다."
그리고는 몽둥이로 때리고 같은 패거리를 불러 나를 묶으려 하였다. 그러므로, 형세가 어쩔 수 없어 몸을 피해 도망쳐 버렸다.」
이는 왜놈들의 만행과 함께 우리나라 국민들이 얼마나 화합하지 못하는가를 보여주는 일화인 것이다. 당시에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위의 일화는 안중근 의사가 패전 이후 도망을 다니는 와중에 벌어진 일인데, 패전의 이유도 의병끼리 단합이 되지 않은 영향이 컸다고 한다.
그리고 의사가 이토를 죽일 당시의 정황을 서술한 부분도 눈여겨 볼만 하다.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일개 조그마한 늙은이가 이같이 염치없이 감히 하늘과 땅 사이를 횡행하듯 걸어오고 있었다.
"저것이 필시 늙은 도둑 이토일 것이다."
하며 곧 단총을 뽑아들고, 그 오른쪽을 향해서 신속히 4발을 쏘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십분 의아심이 머리 속에서 일어났다. 내가 본시 이토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일 한 번 잘못 쏜다면 큰 일이 낭패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뒤쪽을 향해서, 일본인 단체 가운데서 가장 의젓해 보이는, 앞서 가는 자를 새로 목표하고 3발을 잇달아 쏘았다.
또다시 생각하니, 만일 죄 없는 사람을 잘못 쏘아 다치게 했다면 반드시 잘된 일은 아니라, 잠깐 주춤하며 생각하는 사이에,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혔다.」
의사는 거사 직후 '꼬레아 후라(대한민국 만세)'를 세 번 외쳤다고 한다. 아무튼 의사가 저격을 하면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혹시나 저게 이토가 아니면 어쩌나'하는 생각 따위를 하였다는 것을 보면 과연 의사의 간은 얼마나 컸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의사는 체포 직후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였으며, 이후의 심문과정에서나 재판정에서도 항상 당당하게 진술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죽는 것에 대하여는 일절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책에는 부록으로 의사의 공판 기록도 실어 놓았는데, 다른 공모자들은 대부분 할말이 없다고 하거나 제대로 말을 못하는 반면 안중근 의사만 홀로 장황하게 주장을 펴는데 자신에 대한 변호는 단 한마디도 없고 이토의 죄상에 대해서만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야말로 '담대하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호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책의 부록에는 의사의 유묵이나 연보, 옥중에서 쓴 편지 등이 실려 있다. 그런데 비록 의사가 유묵을 많이 남기기는 하였으나 그는 학문을 많이 한 사람은 아니었다. 청소년기에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허구한날 사냥만 다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의사의 세계 정황을 살피는 안목이나 주장을 개진하는 모양은 매우 수준이 높은데, 이러한 식견은 신문 등을 많이 읽어보고 길러나간 것 같다.
또한 의사가 체포된 이후에 검찰관이 처음에는 잘해주다가 갑자기 태도가 급변한 점, 판사가 동경에 가서 지시를 받고 온 점, 재판에 있어 외국인 및 한국인 변호사 선임을 처음엔 허가하였다가 나중에 돌연 취소한 점 등 쪽발이들의 탐탁치 않은 만행들을 접할 수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이전에 일본인 중야태웅이 쓴 '죽은 자의 죄를 묻는다'를 보고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이미 그런 상태에서 이 책을 보았으므로 나에게 의거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재탕에 불과하지만 - 안중근 의사가 직접 저술한 자서전을 읽어 보았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다. 사실 책의 5분의 2 정도만 자서전이고 나머지는 전부 부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