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전사 - 책으로 만나는 풀꽃평화 1
쿤가 삼텐 데와창 지음, 홍성녕 옮김 / 그물코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나는 작년에 학교 도서관을 뒤지다가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였고 한번 훑어본 뒤 선뜻 구입을 결심하게 되었다. 내가 이 책에서 얻고자 하였던 바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 내지는 '폭력을 모르는 민족' 정도로 치부되는 티벳인들의 전사적인 면모에 대한 정보였다. 도서관에서 대충 훑어보았을 때도 전사들에 대한 내용이 본문의 주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완전히 잘못 짚었다. 나는 책을 보는 내내 지겨워서 책을 들었다 놓았다 하였으며, 독파에 보름이 걸린 것도 비단 바빴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책이 재미없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지나치게 상세한 정경 묘사

 2. 지나치게 상세한 경로 묘사

 3. 지나치게 상세한 행위 묘사

 

 책의 제목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온전한 거짓은 아니더라도 칠팔십 프로는 거짓이다. 책의 표지에는 한 무리의 티벳 게릴라 전사들의 사진이 실려 있으며, 사람들은 전사들의 활약상을 보기 위해 이 책을 고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전사들 다수의 투쟁사가 아닌 전사 중 단 한 명의 지극히,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역사를 다루었다.

 저자인 쿤가 삼텐 데와창은 아들 도르지 왕디 데와창에게 구술을 했고 도르지 왕디 데와창은 영어 원문 퇴고 후에 아버지의 이름만을 내세워 이 책을 펴냈다. 작품이 구술로써 씌여진 관계로 본문은 쿤가 삼텐 데와창의 독백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의 기억력은 그야말로 대단하여 매우 사소한 상황까지도 자세히 이야기해주고 있다. 이것이 심하다보니 책이 지겨워진 것이다. 생각해보라. 어느 누가 쿤가 삼텐 데와창이 초코르걀의 고요함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언덕을 세 시간 반 동안 기어올라간 이야기를 궁금해 하겠는가?

 쿤가 삼텐은 넉넉한 집에서 자라 어릴 적에 출가를 하였으나 사춘기 때 집안이 몰락한 것을 보고는 가세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환속을 한다. 이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여 엄청난 부를 쌓았으며, 아내가 낳은 첫 아이가 두 달만에 요절하자 순례여행을 다니기도 한다. 여기서 쿤가 삼텐은 무역을 하며 돌아다닌 장소들과 순례여행을 다닌 장소들에 관하여 지나치게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일일이 열거하고 있으며, 그 단조로운 기행문을 읽는 것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하지만 티벳 전통에 대해서도 상세한 기록을 남겨놓고 있어 자못 흥미로운 부분들도 많았는데, 다음과 같은 사실은 '과연 티벳'이라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기도 하였다.

 

「티벳 사람들은 육류를 먹기는 하지만 불법(佛法)의 영향으로, 동물을 죽이거나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것을 자제했다. 우리 지역에서는 행정부가 일반적이거나 특수한 지시 사항을 반포하곤 했다. 새해 초하루에 반포되는 일반적 지침은 새해의 첫 한 달 동안 가축과 야생동물의 살육을 금한다는 것이었다. 그 대신 동물을 도축하는 특정한 기간이 지정되었다. 겨우내 먹을 육류를 비축하기 위해 10월에 한 번, 새해를 위해 고기를 공급하는 12월에 한 번으로 정해졌다. 물새가 알을 낳기 시작할 때도 기본적 지시 사항들이 발령된다......4월에는 새로 태어난 티벳 영양을 다른 동물과 인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비슷한 지시 사항이 공포되었다. 물고기도 산란기에는 같은 방식을 적용해 보호했다.

 초목 법은 장사를 위해 목재를 무차별적으로 벌목하는 것을 금했다...」

 

 이 책은 '풀꽃평화연구소'라는 자연주의 단체에서 지원하여 발간되었으며, 내지는 전부 재생용지로 되어 있었다.

 아무튼 쿤가 삼텐은 이후 중국군의 티벳 침공에 의해 삶의 기반을 거의 빼앗겼으며 - 부르주아였으므로 더욱 그랬을 것이다 - 친형까지 본보기로 처형되자 중국군에 대한 분노로 불타 티벳 게릴라 부대인 '추시 강드룩'의 작은 우두머리가 되었다. 쿤가 삼텐 본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진 적이 거의 없었으며 전술에 대한 감각이 있었다. 또한 라사가 함락 직전까지 몰리자 14대 - 현재도 재위 중인 -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의 탈출 작전에 일조를 하기도 하였다.

 결국 인도까지 퇴각한 쿤가 삼텐은 국경(NEFA) 부근에서 고향 땅으로 돌아가게 될 날을 학수고대하다가 중국과 인도 사이에도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또다시 피난을 가게 된다. 쿤가 삼텐이 중국을 얼마나 싫어할지 가히 짐작이 간다.

 내가 지겨운 책이라고 혹평을 했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쿤가 삼텐의 이야기는 티벳 난민 전체의 이야기와 다를 바 없고, 역사에서 항상 약자의 입장이었던 우리의 모습과도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쿤가 삼텐은 책 말미에서 전세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나의 마지막 소망은 독립된 티벳, 자유와 평화가 깃든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 망명자로서 나는 자유의 중요성을 배웠다.

 나의 바람과 소망은 자유를 누리는 행운을 가진 사람 모두가 자유를 소중히 여기고, 그들보다 적은 자유만을 누리는 사람들 - 그 중에서도 티벳 사람들도 포함될 것이다 - 을 돕는 데 자유를 사용하는 것이다.

 - 1985년 5월 봄딜라에서」

 

 사족. 오탈자가 많았다. 번역문도 매끄럽지 못했다(마지막 인용문 중 '그 중에서도 티벳 사람들도 포함될 것이다'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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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노예와 노예상인 : 인류 최초의 인종차별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62
장 메이메 지음, 지현 옮김 / 시공사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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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힙합이라는 음악 장르에 빠져들었었다. 그후 고3 이 되기 전까지 꾸준히 힙합 음악을 찾아 들었고 - 당시로서는 - 고급 리스너가 되었다. 나중에는 자작곡들을 만들면서 스스로 랩퍼의 길을 가려고 마음먹기도 하였으나 그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무튼 힙합이라는 음악이 흑인들에게서 나온 음악이고, 주류 역시 흑인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자연 흑인들의 문화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인터넷이나 신문, 책 등에서 접한 흑인들의 생활은 '불우' 그 자체였다. 흑인들은 대부분이 하류의 인생을 살고 있었으며, 노예가 해방된지 백여년이 지난 요즘에도 심한 차별 대우를 받고 있었다.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의 평전이나 흑인 지식인 '프란츠 파농' 평전, 랭스턴 휴즈의 시집 '집시의 발라드' 등을 읽어보고 '말콤 엑스'의 전기 영화까지 보고 나자 흑인들에 대한 동정심과 백인들에 대한 경멸감은 매우 커졌다(솔직히 지금 생각으로는 - 흰둥이나 깜둥이나 우리를 무시하는 건 마찬가지고, 우리도 깜둥이나 동남아인을 무시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 굳이 내가 흑인을 위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아무튼 나는 지금도 아프리카의 역사라든지 흑인들의 문화에 대하여 관심이 많으며, '노예'라 함은 인권유린의 극단을 달리는 단어이므로 - 인종 감정 따위와는 별개로 -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우선 이 책은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중의 하나로서, 다른 예로 '살림 지식 총서' 같은 것이다. 나는 이미 '시공...' 시리즈의 책을 여러 권 - 공룡, 아마존, 호치민, 바이킹 기타 등등 -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은 고등학교 때 다 읽어보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책들에서 만족을 얻었기에 이번에도 서슴없이 이 책을 사게 된 것이다.

 각설하고, 이미 흑인들이 본격적으로(?) 노예 신세가 되기 전부터 노예는 존재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노예들은 피부색으로 구별되어진 것이 아니라, 전쟁 포로라든지 이교도, 혹은 죄수이기 때문에 노예가 되었다.

 흑인들이 노예로 팔려가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무렵부터이다. 일부 포르투갈 인들이 동부 아프리카를 탐험하다가 여행경비 조달을 위하여 흑인들을 잡아다 판 것이 계기가 되어 시작된 흑인노예매매는 아메리카의 발견과 맞물려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하게 된다. 책은 4세기 동안 1200만~1500만 명 정도의 흑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동 중 사망률은 10프로에 달했다.

 모든 것은 제국주의 - 및 중상주의 -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제국주의의 피해자는 유럽을 제외한 전세계이겠지만, 대항해시대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대륙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였다.

 

「"커피와 설탕이 유럽인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두 식물이 두 대륙을 불행에 빠뜨렸음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심을 땅을 얻기 위해 아메리카를 공략했고, 이것을 키울 사람을 얻기 위해 아프리카를 약탈했지요."」

 

 아프리카가 '미지의 대륙'이 된 것도 이놈의 노예매매 때문이었다고 한다.

 

「노예도매상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정당화했다...(중략)...유럽인의 덕으로 흑인들은 문명에 접할 기회를 얻게 되고...하지만 아프리카인의 생각은 이와 같지 않아, 아프리카 전체는 아니더라도 내륙지역에서는 백인에 대한 적대감이 일기 시작했다. 15세기 지도만 해도 상세히 올라 있던 아프리카의 종단로들이 자취를 감추었고, 곧이어 아프리카는 '미지의 땅'이 되었다.」

 

 그런데 조금 웃긴 것은 노예가 되는 흑인들을 백인들이 일일이 찾아내서 납치한 것이 아니라, 현지의 족장이나 왕이 다른 부족을 습격하거나 해서 노예를 마련해놓고 백인 노예매매상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기 동족을 팔아먹다니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다. 게다가 노예가 된 후에도 잘못을 저지른 노예를 체벌하는 일은 대부분 노예 신분을 어느 정도 벗어난 흑인들이 도맡아 했다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 친일파들을 보는 듯 하다. 세상 어디를 가나 그런 놈들은 있는 모양이다.

 흑인들이 노예선에 실릴 때에는 마치 화물을 싣듯이 선창에 차곡차곡 포개어 졌다고 한다. 솔직히 이런 것은 군대랑 비슷하다. 나는 군시절 2 1/2톤 트럭(일명 육공트럭) 적재함 바닥에 차곡차곡 실려서 이동할 때면 '내가 물건인가 사람인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였다. 아무튼 흑인들은 때때로 선상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대부분은 금방 진압되었고, 주모자는 다음과 같이 처벌되었다.

 

「...뿐만 아니라 더 깊이 잘못을 뉘우치도록 엉덩이의 껍질을 벗겨냈다. 이렇듯 채찍질을 하고 껍질을 벗겨서 노예들의 엉덩이를 피범벅으로 만들고 나면, 화약, 레몬즙, 소금물, 고춧가루, 그리고 외과의사가 준 다른 약을 함께 넣고 뒤섞어서 엉덩이에 문질렀다. 회저병이 옮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엉덩이를 더욱 쓰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외에도 이 책에 나와있는 노예들에 대한 가혹행위는 한도 끝도 없다(참, 노예는 일단 매매거래가 성사되면 몸에 주인의 낙인이 찍혔다). 이러한 만행을 저지른 백인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매우 적절히 표현한 구절이 있었다. 다음은 독일·스위스계 퀘이커 교도들의 '저먼타운 항의문' 일부이다.

 

「"'백인을 노예로 부리기보다 흑인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 합당하다'는 주장을 용인할 수 없다. 사람을 훔치거나 납치하는 이들, 사람을 사고 파는 이들, 이들이야말로 노예로 삼아 마땅한 이들이다."」

 

 한편 책을 보다가 크게 충격을 받은 적도 있었다. 바로 책 158페이지에 실려있는 사진을 보고 그러하였는데, 사진에는 '미국의 흑인 처형 장면'이 찍혀 있었다. 웬 흑인 두 명이 거적대기 같은 옷을 걸친채로 큰 나무에 목이 매달려 늘어져 있었고(어디서 많이 두들겨 맞은 듯 옷은 매우 지저분하다), 그 앞에 수많은 백인 군중들이 모여 구경을 하고 있었다. 카메라 근처의 몇몇 백인들은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하거나 손가락으로 흑인을 가리키며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진을 보고 대단히 역겨웠다. 저 허연 피부에 큰 눈을 한 동물들이 과연 인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얻은 것이 많은 책이다.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일'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가지, 저자는 링컨을 마치 聖者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내가 알기로 이는 오도된 것이다. 다음은 내가 고등학교 때 스크랩해 놓았던 동아일보 기사의 일부이다.

 

「흔히 '남북전쟁 = 노예해방전쟁'으로 불리지만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인도주의적 이유가 아니라 남북전쟁의 전략의 일환으로 노예를 해방시켰다. 공화당 출신의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에서는 연방을 탈퇴하는 주가 속출했다. 링컨은 대통령에 취임하자 "나의 목표는 연방을 유지하는 것이지 노예제도 타파는 아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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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 밀레니엄 프로파일 1
로버트 서비스 지음, 정승현 외 옮김 / 시학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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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외모에서부터 사람을 압도한다. 표지라든가 제본 스타일 때문이 아니라, 그 두께 - 약 900쪽 - 로 하여금 보는 이를 질리게 만든다. (뭐 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나는 분명히 이 책에게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때문에 구입 후 수 년만에야 책을 펴보게 되었으며, 왜 이 책을 미리 보지 않았나 후회를 하게 되었다.

 

 레닌의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이다. '레닌'은 필명인데, 그는 이외에도 여러 이름을 썼으나 - 내가 얼마전에 읽은 바 있는 - '무엇을 할 것인가?'를 출간하면서 쓴 이름이 레닌인 - 그리고 그 책이 그의 저작들 중 최초로 큰 반향을 일으킨 - 관계로 대중에게 그는 '레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레닌은 귀족적인 집안에서 자라났으며 - 부친은 교육자인 관계로 교육열이 대단했다. 그는 집안의 왕자였고, 모친이나 누이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았다. 사랑과 기대를 받는만큼 레닌은 열심히 공부를 했고 성적은 항상 최상급이었다.

 레닌에게는 형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알렉상드르였다. 레닌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공부벌레였던 그는 대학에 가서 과격한 테러 단체에 몸을 담은 후 황제 암살 음모에 가담하였고 결국 실패하여 일당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형을 항상 존경해왔던 레닌은 이 사건으로 인해 러시아의 짜르 왕정을 증오하게 되었다. 이후 점점 대가리가 굵어간 레닌이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맑스의 사상이었다.

 맑스를 접한 레닌은 일생에 있어 단 한가지의 목표를 설정하게 된다. 그것은 짜르 체제의 전복에 이은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레닌은 처음에 상당히 교조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알고 보니 이 책의 제목은 체르니셰프스키의 동명소설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를 읽었을 때에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레닌은 맑스주의를 비판없이 무조건적으로 떠받들었으며, 자신이 해석한 맑스만이 진정한 맑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맑스나 레닌이나 중산층 출신의, 체험이 심히 결여된 이론가들이다. 아무리 머리가 좋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이론과 현실은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레닌은 맑스의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내가 여기서 레닌의 유배 생활, 망명 생활, 정치 투쟁 등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술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레닌이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이었고, 분명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도 볼셰비키('다수파'라는 뜻. 멘셰비키는 소수파 - 하지만 결코 볼셰비키가 항상 다수는 아니었다)의 리더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결국 혁명을 일구어내고 만다.

 10월 혁명으로 인하여 러시아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1차 대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러시아의 경제는 피폐했으며 레닌은 대단한 지지를 받고 있지도 않았다.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었고 레닌은 그것을 모두 해결하려 했다. 또한 그는 자기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나면 자연적으로 유럽의 모든 나라들에서 혁명이 일어날 줄로만 믿고 있었는데, 그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책을 보다보면 레닌이 해놓은 일은 엄청나게 많다. 그는 50세 조금 넘게 사는 동안 제대로 쉰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사람이 과로를 하면 안된다. 건강의 위협은 아무리 혁명적 영웅이라도 비켜가지 않는다. 레닌은 죽기 전에 스탈린을 경계했고 끝까지 그를 몰아내려 했다. 하지만 역사는 레닌의 후계자로 스탈린이 집권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레닌은 그야말로 황소고집이었으며 교조적이면서도 기회적인, 참으로 모순된 인간이었다.

 

「이러한 위선은 참으로 놀랄만하다. 레닌 자신도 (스탈린처럼)주의가 부족했으며 (트로츠키와 피야타코프처럼)너무 관료적인 방법에 집착해왔고 (지노비예프처럼)혁명에 대해 지나친 낙관주의로 일관해왔으며 또한 (부하린처럼)정통 맑스주의에 모호한 모습을 보여왔던 것이다.」

 

 저자의 이 말이야말로 레닌의 정치적인(일부는 사상적인) 모습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또한 레닌은 상당히 폭력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레닌은...(중략)...화를 내며 간섭했다. '악당들'은 현장에서 총살되어야 한다. '진압의 속도와 힘'은 강화되어야 한다. 어떤 헌법상이나 입법상의 개정도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모든 활동'에 적용될 수 있는 사형제도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공식화되어야 한다...(중략)...그는 법에 공포정치의 본질과 정당성을 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훌륭한 정치가였다. 그가 선택한 노선은 거의 항상 최선의 해결책을 동반하였다. 그런 그가 기반을 다져놓은 덕분에 '소련'은 70 여년간 존속할 수 있었다.

 

 사실 레닌 같은 사람이야말로 충분한 자료에 근거하여 객관적인 입장에서 전기를 쓰기가 대단히 어려운 사람일 것이다. 정치라는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 저자는 소련이 무너진 후에 레닌에 대한 방대한 양의 기밀문서를 연구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왜곡이 최소화된 레닌의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었다. 과연 저자가 밝혀놓은 참고문헌이나 주석들을 보면 그 어마어마한 양에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이다. 물론 본문 중간중간에 사건진행이 뒤죽박죽이거나 문단이 이상하게 나뉜 곳 등이 눈에 띄었지만 워낙 방대한 양의 자료를 가지고 900쪽 정도의 책을 저술하다보니 아주 완벽할 수는 없을 것이라 웬만큼은 이해할 수가 있었다.

 단지 눈에 거슬린 것은 번역자들의 무성의함이었다. 무성의한 번역문장, 무성의한 교정 - 오탈자의 남발 등은 양서의 질을 떨어뜨리는 재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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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팬 - 국내 최초 완역판
제임스 매튜 배리 지음, 육근영 그림, 김정미 옮김 / 아이들판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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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국내 최초로 완역된 '피터팬'이다. 책 말미의 해설에 보면 '피터팬'은 원래 희곡으로 씌였다가 성공에 고무된 작가가 재차 소설로 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소설은 커다란 두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번째 장이 '켄싱턴 공원의 피터 팬'이고 두번째 장이 '피터와 웬디'이다. 그 중 국내에 줄기차게 소개되었던 것이 '피터와 웬디'뿐이었고, '켄싱턴 공원의 피터 팬'은 배제되어 왔다는 것이 역자의 주장이다.

 아무튼 내가 '켄싱턴 공원의 피터 팬'을 읽어보니, 그동안 그 두 개의 장이 같이 소개되지 않아온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일단은 '피터와 웬디'보다 박진감이라든지 흥미면에서 상당히 떨어지는 내용이었고, 두 장을 같이 읽다보면 모순되는 점 - 피터가 집에서 탈출한 날을 '켄싱턴..'은 (태어난지)7일, '피터와..'는 (태어난)당일이라고 하는 등 - 이 몇 군데 드러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켄싱턴..'을 통해서 피터 팬의 여러가지 비밀을 알게 된 것 역시 사실이고, 나름 큰 수확이라 할 수 있었다(여기서 비밀 한가지. 피터 팬의 첫사랑은 '마이미'이다. 나중에 웬디와 벌이는 '키스와 골무' 이야기도 원래는 마이미와 먼저 벌여본 일이었다).

 다음으로 '피터와 웬디'. 정말 재미있다. 예전에 책으로도 읽어봤고 애니메이션, 영화 등으로 익숙한 이야기지만 - 역시 다시 봐도 재미있다. 아무튼 책을 읽다보면 여러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일단 팅커 벨은 '포동포동한 몸매(원문은 혹시 glamorous였을지도 모르지만)'를 가지고 있는 요정이다. 따라서 일관되게 모델 몸매인 - 영화 속의 팅커 벨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네버랜드로 가는 데에는 날아서 몇 날 며칠이 걸린다. 영화처럼 순식간에 시공간을 이동해서 가는 것이 아니다. 또한 피터 팬은 원래 자기 힘만으로는 날지 못한다. 천하의 피터 팬도 팅커 벨의 요정가루가 있어야만 날아다닐 수 있다.

 영화가 원작보다 긍정적인 부분도 여럿 있다. 일례로 원작에서는 후크가 탄 독약을 피터 대신 팅커 벨이 마시고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는 과정이 매우 간략하게 나와있지만, 영화에서는 상당히 극적이고 감동적으로 묘사되곤 한다.

 각설하고 사실 피터 팬이나 후크나 둘다 중요한 것이 결핍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다. 그들은 항상 즐거움 속에서 살거나 모험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가슴 속 깊은 곳에 상처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그렇게 자주는 아니지만 때로 피터는 꿈을 꿉니다. 피터의 꿈은 다른 소년들의 꿈보다 더 고통스러웠어요. 꿈속에서 애처롭게 엉엉 울면서도, 몇 시간이나 꿈에서 깨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 꿈들은 피터의 존재에 관한 수수께끼와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래서 마침내 피터가 과감하게, "내 소원은 이제 영원히 엄마에게 돌아가는 것이야"라고 말했을 때, 요정들은 할 수 없이 피터가 떠나가도록 그의 어깨를 간질여 주어야 했습니다.

...(중략)...하지만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위에는 창살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안을 들여다보자, 어떤 작은 아기를 품안에 꼭 안고 평화롭게 잠이 든 엄마의 모습이 보였죠.

 피터는 외쳤어요. "엄마! 엄마!" 하지만 엄마는 피터의 외침을 듣지 못했습니다...(중략)...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두번째 기회란 없습니다. 창문에 도착할 때면, 이미 문은 닫힌 뒤입니다. 쇠창살이 삶을 가로막고 있기까지 하지요.」

 

 후크 선장은 원래 귀족 출신이었다. 그래서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도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귀족 학교를 다니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좋은 행실'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 그가 피터 팬을 싫어하는 이유도 자신의 오른팔을 잘라버리고 악어에게 쫓기게 만든 일보다는 그저 피터 팬이 '건방진' 것이 마음에 안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한 피터와 후크의 대결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의 마지막 대결을 보자.

 

「"건방지고 무례한 녀석 같으니라고. 죽음을 맞을 각오나 해라."

 "음침하고 사악한 어른이여, 덤비기나 해."

...(중략)...하지만 의연한 태도로 피터는 적에게 칼을 다시 집어들게 했답니다. 칼을 홱 주워들긴 했지만, 후크는 피터가 좋은 행실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비참해졌지요.

 이제까지 후크는 자신이 나쁜 녀석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졌습니다.

 "피터 팬, 넌 대체 누구이며 무엇이냐?" 후크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어요.

 "난 젊음이요, 즐거움이다." 피터는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대답했죠. "나는 알을 깨고 나온 작은 새 한 마리이다."」

 

「...마지막으로 후크에게 한 가지만 소원을 들어 줍시다. 후크는 장벽 위에 올라서서 허공을 가르며 날아드는 피터를 어깨 너머로 보곤, 발을 이용해 자신을 차버리라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래서 피터는 찌르는 대신 후크를 발로 걷어찼죠.

 마침내 후크는 마음에 새겨뒀던 소원을 성취했습니다.

 "나쁜 행실이야!" 후크가 마구 비웃으며 외쳤어요. 그리고 그대로 악어 입 속으로 떨어졌죠.」

 

 후크는 지독한 신념을 가진, 전근대적인 인물이었다. 이 소설이 씌어진 때는 1906~1911년이다.

 

 일장 모험을 끝낸 피터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다 준다. 그리고 고독한 모험을 영원히 계속한다. 하긴, 피터는 고독이란 것이 뭔지 모를 수도 있다. 워낙 망각에 능한 그이기 때문에 - 1년만에 만난 웬디가 팅커 벨의 안부를 묻자 피터는 "팅커 벨이 누구야?" "여기에는 요정들이 무척 많잖아. 그 요정은 죽은 모양이야."라고 대답할 정도이다 - 추억 따위를 회상하며 고독, 혹은 향수에 젖을 새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피터의 이 특출한(?) 망각의 재능을 가질 수가 없기에 결코 피터 팬이 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히려 망각을 싫어하기에 - 아니, 차마 그럴 수가 없기에 - 젖니가 난 채 '꼬끼오' 소리를 내는 한 소년을 따를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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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전집 - 증보판
백석 지음, 김재용 엮음 / 실천문학사 / 200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백석을 대학 입시 공부를 하는 와중에 알게 되었다. 당시에 나는 여우난골족, 여승, 탕약, 국수, 고향,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의 시를 통하여 백석과 접하게 되었으며 - 항상 그러한 시를 대한 뒤로는 - 지문(시)에 관한 - 객관식 문제들이 뒤따르곤 하였다. 그런데 사람이 이런식으로 알게 된 작품에 대하여는 통상 정이 떨어지고 감흥이 줄게 마련이지만, 유독 백석의 작품들은 나에게 매번 강한 인상을 심어주곤 하였다. 특히 여승과 국수, 고향에서 좋은 느낌을 받은 나는『백석 전집』이라는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 탐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백석의 해방 전·후의 작품들을 온전히 아울러 정리해놓은 책이 없었다고 한다. 백석은 재북시인, 빨갱이였다. 때문에 해방 이후의 작품 - 을 구하기도 힘들 뿐더러 - 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꺼려졌던 모양이다. 아무튼 1997년 들어서야 이 책의 초판이 발행되었다.

 白石은 필명이고, 본명은 백기행(夔行)이었다고 한다. 책을 다 읽어보고(520쪽) 솔직히 실망을 했다. 사실 해방 이전의 작품들은 좋은 작품도 꽤 있었지만 해방 이후의 작품들은 쓰레기에 다름 아니었다. 물론 당시 북한의 문학이 죄다 그런 류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엮은이는 책 말미의 해설에서 백석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다른 대다수의 작가들과 달리 순수 문학과 문학을 통한 광의의 사상성(계급투쟁의식에 국한되지 않는) 교양을 추구하다가 배척도 받고 결국에는 절필하게 되었다고 변호 아닌 변호를 하고 있지만, 내가 봤을 때는 작품들의 주제와 목적이 오로지 선동 및 찬양 일색이며 - 해방 이전 백석이 추구하던 이미지와 미학은 완전히 실종되어 버렸던 것 같다.

 엮은이는 백석이 해방 이전에 향토적인 언어와 민속적 상상력에 집착하였던 것은 -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점에서 '고독'이라는 문제가 발생하자 그것을 극복해내려는, 과거의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마음에서였다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해방 이후 백석이 작품속에 '공산주의'라는 어휘를 사용한 것은 '특정한 사회를 지칭하기보다는 마음속에 있는 유토피아를 의미한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봤을 때는 완전히 어거지다. 예를 들어 보자.

 

 나는 제3인공위성

 나는 우주 정복의 제3승리자

 나는 쏘베트 나라에서 나서

...(중략)...

 나는 공산주의의 천재

...(중략)...

 나는 공산주의의 자랑이며 시위

 공산주의 힘의, 지혜의

 공산주의 용기의, 의지의

 

 모든 착하고 참된 정신들에는

 한없이 미쁜 의지, 힘찬 고무로

 모든 사납고 거만한 정신들에는

 위 없이 무서운 타격, 준엄한 경고로

...(중략)...

 지칠 줄 모르는 공산주의여

...(중략)...

 나는 공산주의의 사절

 나는 제3인공위성

 

-제3인공위성

 

 위의 시 어디를 봐서 '공산주의'가 특정한 이념이 아닌 마음 속 유토피아의 상징이란 말인가? 엮은이는 지나치게 백석을 미화하려 한 나머지 그의 드높은 '당'에 대한 충성심을 모른척 해버린 것이다. 솔직히 백석은 해방 이후 지독한 빨갱이가 되어 순수 문학의 색깔을 거의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해방 이후 아동문학에도 크게 관심을 가졌던 모양인데 그에 따른 결과물들도 썩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백석이 해방 이전에 쓴 시들의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닌지라 과연 그의 시 중에는 나의 마음을 잡아끄는 작품들이 여럿 있었다.

 

 옛날엔 통제사(統制使)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港口)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千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六月)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 방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통영(統營)

 

 백석은 통영에서 여자 하나를 짝사랑한 모양이다. 동일한 제목의 다른 시에도 '난(蘭)'이라는 여자가 등장하여 백석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이외에도 백석이 연정을 표현한 시는 은근히 많다.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이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바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그런데 백석은 사랑에 그리 성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북관에 계집은 아름답다...어늬 아침 계집은/머리에 무거운 동이를 이고/손에 어린것의 손을 끌고/가펴러운 언덕길을/숨이 차서 올라갔다/나는 한종일 서러웠다(절망)", "...내가 오래 그려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내가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은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이렇게 한여름을 보내면서 나는 하늑이는/물살에 나이금이 느는 꽃조개와 함께/허리도리가 굵어가는 한 사람을 연연해 한다(삼호(三湖)-묽닭의 소리 1)"...

 그렇게 남의 여자가 되어 '허리도리가 굵어가는 한 사람을 연연해' 하다보니 백석은 동태가 되어버렸다.

 

 처마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멧새 소리

 

 나 역시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나도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참, 찌개가 되더라도 빨리 녹았으면 좋겠다.

 아무튼 이 책에는 백석의 시 외에도 수필, 소설 등의 산문들도 실려 있는데, 딱히 특출난 작품은 없었다. 단지 그가 1962년도에 쓴「프로이드 주의 - 쉬파리의 행장」은 조금 재미있었다. 백석은 공산주의자 및 인도주의자의 입장에서 프로이트의 - 성욕을 바탕으로 한 패륜적인(?) 이론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을 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썩어빠진 자본주의와 죽이 맞아 떨어져 자본주의가 닿는 곳이면 어디든 날아가 달라붙는다. 마치 쉬파리처럼. 백석은 남조선에 미제의 자본주의가 침투하면서 더러운 프로이트도 만연하고 있다며 크게 걱정을 한다. 흥미롭고 나름 유익한 글이었다.

 

 위에 내가 직접 인용한 시들 말고도 내가 수험생 때 지문으로 만났다고 한 시들 역시 괜찮았으며 마지막으로 읽고 있노라면 가슴이 싸 해지는 시를 하나 옮겨 보고자 한다.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리 묘향산 백오십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새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쪽발이) 주재소장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들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팔원(八院)-서행시초 3

 

 ...이러면 안되지만...군대 생각이 나기도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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