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
해럴드 램 지음, 강영규 옮김 / 현실과미래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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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해럴드 램이라고 1962년도에 작고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늦어도 20 세기 중반쯤에 씌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일견 책이 명저이기(가치가 인정되었기) 때문에 1998년도에 이르러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칭기즈칸은 빈털털이 - 이다 못해 쫓겨 다니는 - 신세로부터 전세계를 정복한 황제로 벼락출세한 사람이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칭기즈칸이 누군가의 후원을 받아 성장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힘만으로 성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그도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들은 칭기즈칸과 동등한 위치, 혹은 부하로서 도움을 준 것이지 칭기즈칸을 능가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 그를 도와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칭기즈칸을 경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하나로 충분하다.

 그리고 칭기즈칸의 용인술은 자못 훌륭하였다. 그는 부하들의 특성을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을 알았다.

 

「테무친이 어떤 부하를 두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예수타이(Yessoutai)만큼 용감한 사람은 없어요. 그와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어요. 그러나 그는 자기가 오랜 행군에도 지치지 않고, 허기와 갈증을 느끼지 못하니까, 다른 장교와 병사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그에게는 높은 자리를 맡길 수 없는 겁니다. 장수들이 부하들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허기와 갈증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야 해요..."」

 

 우리나라의 - 대부분이 쓰레기 같은 - 군대 지휘관, 간부들도 이러한 사실을 깊이 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책을 보니까 저자는 아시아 지역의 역사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미국인이 날고 기어봤자 동양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든 법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한편 금나라 관리들은 이 새로운 임금에게 바칠 조공 목록과 함께 칭기즈칸에게 특사를 보냈다......그러나 칭기즈칸은 뻣뻣이 서서 특사에게 물었다.

 "새로운 황제의 이름이 뭐요?"

 "위왕입니다."」

 

 자고로 중국에서 당대의 황제는 항상 '천자'나 '폐하'로 불려왔을 뿐 '위왕' 같은 칭호로 불린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위'의 칭호는 그 황제가 죽고 나서 시호로 추증되어 후세에서 그렇게 불리는 것일 따름이다. 유럽 사람들이야 재위 기간에도 '리처드'니 '루이'니 이름을 내걸고 있었겠지만 중국의 경우는 다르다는 말이다(물론 몽골족인 칭기즈칸은 재위시에도 칭기즈칸이라고 불렸다).

 아무튼 칭기즈칸은 유목국가들을 통일한 후 중국을 유린하고 서쪽으로 뻗어나갔다. 전투마다 연전연승. 생각해 볼수록 신기하다. 최신무기를 갖춘 것도 아니고, 병법을 체계적으로 연구해 본 적도 없는 오랑캐 칭기즈칸이 어떻게 전세계를 유린할 수 있었을까?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는 몽골족의 특수성에 의해 가능했던 일로 보인다.

 물론 아직도 몽골족이 전투에서 상승(常勝)하였던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그들이 멀리까지 뻗어나가서도 별 무리없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조금 알만하다. 원래 군대란 본거지에서 멀리 나가 있을수록 불리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게 불리해지는 가장 큰 원인은 보급의 문제 때문인데, 몽골족은 항상 보급품을 현지 조달했기 때문에(한마디로 약탈) 보급 때문에 골치를 썩을 일이 없었다. 그들은 아쉬움이나 망설임없이 파괴를 일삼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몽골족은 태생적으로 사막 기후에 적응되어 있는 종족이었기 때문에 중앙아시아의 험난한 산맥을 넘거나 서남아시아의 사막 지대를 행군할 적에도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책에 보면 유일하게 - 인도 지역만은 무더위를 견디지 못해 공격을 중단했다고 한다.

 칭기즈칸 자체도 매우 신속한 사람이었다. 이슬람을 정복할 때의 기록을 보면, 도시 하나를 점령한지 불과 두 시간만에 초스피드로 약탈을 끝내고는 미련없이 다른 도시를 치러 갔다고 한다.

 

 책을 읽어보니 칭기즈칸은 아주 잔인한 사람이었다. 본문을 인용해 보겠다. 

「(칭기즈칸은)어느 날 자신의 텐트에서 한 몽골군 장교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자네는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폐하께서 다스리는 드넓은 초원, 청명한 날씨, 최고의 준마, 토끼 사냥용 매,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장교는 평범한 대답을 했다. 

"아니야. 이 세상 최고의 일은 적의 패배, 적의 죽음, 적의 가족들의 울음 소리를 직접 확인하는 것이지." 이것이 칭기즈칸의 최대 행복이었다.」

  악마다. 책에는 이슬람 도시들에 대한 대학살의 기록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몽골인들의 캠프는 사람을 찾아서 살육하기 위한 캠프였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무고한 주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나의 특별한 지시가 없는 한, 적들에게 부드러움을 보여 주는 모든 행위를 금하겠다. 두려움만이 그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칭기즈칸은 진정한 야인이었다. 일반적인 동양 군주들은 중국의 수도를 점령하여 왕조를 멸할 경우 스스로 칭제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싶어하는 법인데, 칭기즈칸은 금을 정복하고는 아무 미련없이 몽골로 돌아갔다. 그는 제국을 건설한 후에도 따로 궁전을 짓지 않고 단지 천막을 크게 지었을 뿐이며, 죽을 때에도 전쟁을 나갔다가 진중에서 병으로 객사하였다. 저자는 야인 칭기즈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그는 가족과 몽골인들에게 주고 싶은 것들을 얻기 위해 세계를 정복했다. 칭기즈칸은 이런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목적을 쟁취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 것들은 모두 파괴해 버렸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이용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야인이었던 칭기즈칸은 고향 땅의 산속에 묻혔다. 능묘의 위치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의 무덤은 아주 조촐하였을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이제는 흔적조차 없어진 칭기즈칸의 무덤. 칭기즈칸은 최후까지도 야인이었다!

 - 오탈자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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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 세계의 기둥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4
로베르 들로르 지음 / 시공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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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크거나 강한 생물에 매력을 느낀다. 코끼리는 크고 강하다. 특히 아프리카코끼리(Loxodonta africana) 같은 경우는 더욱 그렇다. 때문에 예전부터 찜해놓고 있었던 책을 - 이번에 사 보게 되었다.

 

 책의 서두에 저자인 로베르 들로르는 문학박사이자 이학박사라고 밝혀져 있으나 파리8대학에서 중세의 역사를 가르치곤 하였다는 것을 보면 이학보다는 인문학 쪽에 더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따라서 이 책 역시 코끼리의 생태보다는 코끼리와 인간 사이의 관계와 그 관계로써 만들어진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나는 여기서 다소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과의 관계라면 카리스마 있는 아프리카코끼리보다는 유들유들한 인도코끼리가 훨씬 더 친밀하고 돈독하니까 자연히 아프리카코끼리는 비교적 적은 비중으로 다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책은 코끼리의 생태에 한 장, 코끼리와 인간 사이에 일어난 역사 서술에 세 개의 장 및 여러 편의 발췌문을 할애하고 있다. 제1 장인 '코끼리의 가계'에 따르면, 매머드는 인도코끼리와 골격 구조가 비슷하지만 덩치는 아프리카코끼리 정도 크기이며, 최장 70센치에 이르는 털로 덮여 있고 무게 125키로에 길이가 5미터나 되는 상아를 한 쌍 가지고 있었다.

 아시아에서는 살아있는 코끼리를 길들여서 가축화시키는 데 애를 쓴 반면 아프리카에서는 코끼리를 사냥해서 고기와 상아를 얻는 데 주력했다. 이는 인도코끼리가 유순하고 영리한 반면 아프리카코끼리는 변덕이 심하고 다소 멍청한 데 이유가 있는 듯 하다. 물론 아시아인들은 문명이 발달했지만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석기시대의 생활을 고수하였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최근의 코끼리 개체 수 감소에는 상아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인도코끼리는 상아가 작다).

 코끼리에 대한 보호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일찍 시작되어 프랑스에서는 1905년도에 이미 '코끼리애호인협회'가 창설되었다. 저자는 보호와 수렵 사이에서 나름대로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 물론 보호를 더 부르짖기는 하지만 - 수렵을 정당화하는 자들의 주장도 그대로 실어놓고 있다.

 

「...백인에게 코끼리는 오랫동안 단지 상아를 제공하는 동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흑인에게 코끼리는 오로지 고기, 그것도 운이 좋으면 독을 바른 투창 하나로 가장 많은 고기를 얻을 수 있는 동물로 인식되어 왔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은 코끼리 사냥의 금지를 요구했고, 멀리서 코끼리들에게 열렬한 사랑을 보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실질적 행동은 회피하고, 그저 시늉만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서구의 관념론이 취해 온 전형적인 태도이며, 모렐이 완벽한 본보기였다...」

 

 구라파 사람들은 지금껏 대부분의 환경 파괴를 자신들이 저질러 놓고는 이제 와서 위선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코끼리에 대한 갖가지 정보들이 넘쳐난다. 상아의 거래를 금지하는 국제조약이 체결되자 매머드의 화석화된 상아들이 각광을 받고 있다든지, 아시아에서 신격화되고 있는 코끼리(브라만교의 가네시 神, 흰코끼리 등)라든지, 전쟁에서 활약하였던 코끼리들의 기록이라든지 하는 다양한 모습의 코끼리를 보여준다(한니발의 코끼리 부대를 그린 삽화를 보면 전부다 아프리카코끼리던데 과연 정말 그랬을지 궁금하다).

 

 책을 읽고 나니 웬지 코끼리가 친근감 있게 느껴지는 것 같다. 물론 이런 감정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다.--; 번역문은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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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전사 - 책으로 만나는 풀꽃평화 1
쿤가 삼텐 데와창 지음, 홍성녕 옮김 / 그물코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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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작년에 학교 도서관을 뒤지다가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였고 한번 훑어본 뒤 선뜻 구입을 결심하게 되었다. 내가 이 책에서 얻고자 하였던 바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 내지는 '폭력을 모르는 민족' 정도로 치부되는 티벳인들의 전사적인 면모에 대한 정보였다. 도서관에서 대충 훑어보았을 때도 전사들에 대한 내용이 본문의 주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완전히 잘못 짚었다. 나는 책을 보는 내내 지겨워서 책을 들었다 놓았다 하였으며, 독파에 보름이 걸린 것도 비단 바빴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책이 재미없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지나치게 상세한 정경 묘사

 2. 지나치게 상세한 경로 묘사

 3. 지나치게 상세한 행위 묘사

 

 책의 제목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온전한 거짓은 아니더라도 칠팔십 프로는 거짓이다. 책의 표지에는 한 무리의 티벳 게릴라 전사들의 사진이 실려 있으며, 사람들은 전사들의 활약상을 보기 위해 이 책을 고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전사들 다수의 투쟁사가 아닌 전사 중 단 한 명의 지극히,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역사를 다루었다.

 저자인 쿤가 삼텐 데와창은 아들 도르지 왕디 데와창에게 구술을 했고 도르지 왕디 데와창은 영어 원문 퇴고 후에 아버지의 이름만을 내세워 이 책을 펴냈다. 작품이 구술로써 씌여진 관계로 본문은 쿤가 삼텐 데와창의 독백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의 기억력은 그야말로 대단하여 매우 사소한 상황까지도 자세히 이야기해주고 있다. 이것이 심하다보니 책이 지겨워진 것이다. 생각해보라. 어느 누가 쿤가 삼텐 데와창이 초코르걀의 고요함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언덕을 세 시간 반 동안 기어올라간 이야기를 궁금해 하겠는가?

 쿤가 삼텐은 넉넉한 집에서 자라 어릴 적에 출가를 하였으나 사춘기 때 집안이 몰락한 것을 보고는 가세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환속을 한다. 이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여 엄청난 부를 쌓았으며, 아내가 낳은 첫 아이가 두 달만에 요절하자 순례여행을 다니기도 한다. 여기서 쿤가 삼텐은 무역을 하며 돌아다닌 장소들과 순례여행을 다닌 장소들에 관하여 지나치게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일일이 열거하고 있으며, 그 단조로운 기행문을 읽는 것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하지만 티벳 전통에 대해서도 상세한 기록을 남겨놓고 있어 자못 흥미로운 부분들도 많았는데, 다음과 같은 사실은 '과연 티벳'이라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기도 하였다.

 

「티벳 사람들은 육류를 먹기는 하지만 불법(佛法)의 영향으로, 동물을 죽이거나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것을 자제했다. 우리 지역에서는 행정부가 일반적이거나 특수한 지시 사항을 반포하곤 했다. 새해 초하루에 반포되는 일반적 지침은 새해의 첫 한 달 동안 가축과 야생동물의 살육을 금한다는 것이었다. 그 대신 동물을 도축하는 특정한 기간이 지정되었다. 겨우내 먹을 육류를 비축하기 위해 10월에 한 번, 새해를 위해 고기를 공급하는 12월에 한 번으로 정해졌다. 물새가 알을 낳기 시작할 때도 기본적 지시 사항들이 발령된다......4월에는 새로 태어난 티벳 영양을 다른 동물과 인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비슷한 지시 사항이 공포되었다. 물고기도 산란기에는 같은 방식을 적용해 보호했다.

 초목 법은 장사를 위해 목재를 무차별적으로 벌목하는 것을 금했다...」

 

 이 책은 '풀꽃평화연구소'라는 자연주의 단체에서 지원하여 발간되었으며, 내지는 전부 재생용지로 되어 있었다.

 아무튼 쿤가 삼텐은 이후 중국군의 티벳 침공에 의해 삶의 기반을 거의 빼앗겼으며 - 부르주아였으므로 더욱 그랬을 것이다 - 친형까지 본보기로 처형되자 중국군에 대한 분노로 불타 티벳 게릴라 부대인 '추시 강드룩'의 작은 우두머리가 되었다. 쿤가 삼텐 본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진 적이 거의 없었으며 전술에 대한 감각이 있었다. 또한 라사가 함락 직전까지 몰리자 14대 - 현재도 재위 중인 -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의 탈출 작전에 일조를 하기도 하였다.

 결국 인도까지 퇴각한 쿤가 삼텐은 국경(NEFA) 부근에서 고향 땅으로 돌아가게 될 날을 학수고대하다가 중국과 인도 사이에도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또다시 피난을 가게 된다. 쿤가 삼텐이 중국을 얼마나 싫어할지 가히 짐작이 간다.

 내가 지겨운 책이라고 혹평을 했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쿤가 삼텐의 이야기는 티벳 난민 전체의 이야기와 다를 바 없고, 역사에서 항상 약자의 입장이었던 우리의 모습과도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쿤가 삼텐은 책 말미에서 전세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나의 마지막 소망은 독립된 티벳, 자유와 평화가 깃든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 망명자로서 나는 자유의 중요성을 배웠다.

 나의 바람과 소망은 자유를 누리는 행운을 가진 사람 모두가 자유를 소중히 여기고, 그들보다 적은 자유만을 누리는 사람들 - 그 중에서도 티벳 사람들도 포함될 것이다 - 을 돕는 데 자유를 사용하는 것이다.

 - 1985년 5월 봄딜라에서」

 

 사족. 오탈자가 많았다. 번역문도 매끄럽지 못했다(마지막 인용문 중 '그 중에서도 티벳 사람들도 포함될 것이다'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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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노예와 노예상인 : 인류 최초의 인종차별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62
장 메이메 지음, 지현 옮김 / 시공사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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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힙합이라는 음악 장르에 빠져들었었다. 그후 고3 이 되기 전까지 꾸준히 힙합 음악을 찾아 들었고 - 당시로서는 - 고급 리스너가 되었다. 나중에는 자작곡들을 만들면서 스스로 랩퍼의 길을 가려고 마음먹기도 하였으나 그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무튼 힙합이라는 음악이 흑인들에게서 나온 음악이고, 주류 역시 흑인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자연 흑인들의 문화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인터넷이나 신문, 책 등에서 접한 흑인들의 생활은 '불우' 그 자체였다. 흑인들은 대부분이 하류의 인생을 살고 있었으며, 노예가 해방된지 백여년이 지난 요즘에도 심한 차별 대우를 받고 있었다.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의 평전이나 흑인 지식인 '프란츠 파농' 평전, 랭스턴 휴즈의 시집 '집시의 발라드' 등을 읽어보고 '말콤 엑스'의 전기 영화까지 보고 나자 흑인들에 대한 동정심과 백인들에 대한 경멸감은 매우 커졌다(솔직히 지금 생각으로는 - 흰둥이나 깜둥이나 우리를 무시하는 건 마찬가지고, 우리도 깜둥이나 동남아인을 무시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 굳이 내가 흑인을 위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아무튼 나는 지금도 아프리카의 역사라든지 흑인들의 문화에 대하여 관심이 많으며, '노예'라 함은 인권유린의 극단을 달리는 단어이므로 - 인종 감정 따위와는 별개로 -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우선 이 책은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중의 하나로서, 다른 예로 '살림 지식 총서' 같은 것이다. 나는 이미 '시공...' 시리즈의 책을 여러 권 - 공룡, 아마존, 호치민, 바이킹 기타 등등 -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은 고등학교 때 다 읽어보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책들에서 만족을 얻었기에 이번에도 서슴없이 이 책을 사게 된 것이다.

 각설하고, 이미 흑인들이 본격적으로(?) 노예 신세가 되기 전부터 노예는 존재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노예들은 피부색으로 구별되어진 것이 아니라, 전쟁 포로라든지 이교도, 혹은 죄수이기 때문에 노예가 되었다.

 흑인들이 노예로 팔려가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무렵부터이다. 일부 포르투갈 인들이 동부 아프리카를 탐험하다가 여행경비 조달을 위하여 흑인들을 잡아다 판 것이 계기가 되어 시작된 흑인노예매매는 아메리카의 발견과 맞물려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하게 된다. 책은 4세기 동안 1200만~1500만 명 정도의 흑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동 중 사망률은 10프로에 달했다.

 모든 것은 제국주의 - 및 중상주의 -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제국주의의 피해자는 유럽을 제외한 전세계이겠지만, 대항해시대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대륙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였다.

 

「"커피와 설탕이 유럽인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두 식물이 두 대륙을 불행에 빠뜨렸음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심을 땅을 얻기 위해 아메리카를 공략했고, 이것을 키울 사람을 얻기 위해 아프리카를 약탈했지요."」

 

 아프리카가 '미지의 대륙'이 된 것도 이놈의 노예매매 때문이었다고 한다.

 

「노예도매상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정당화했다...(중략)...유럽인의 덕으로 흑인들은 문명에 접할 기회를 얻게 되고...하지만 아프리카인의 생각은 이와 같지 않아, 아프리카 전체는 아니더라도 내륙지역에서는 백인에 대한 적대감이 일기 시작했다. 15세기 지도만 해도 상세히 올라 있던 아프리카의 종단로들이 자취를 감추었고, 곧이어 아프리카는 '미지의 땅'이 되었다.」

 

 그런데 조금 웃긴 것은 노예가 되는 흑인들을 백인들이 일일이 찾아내서 납치한 것이 아니라, 현지의 족장이나 왕이 다른 부족을 습격하거나 해서 노예를 마련해놓고 백인 노예매매상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기 동족을 팔아먹다니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다. 게다가 노예가 된 후에도 잘못을 저지른 노예를 체벌하는 일은 대부분 노예 신분을 어느 정도 벗어난 흑인들이 도맡아 했다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 친일파들을 보는 듯 하다. 세상 어디를 가나 그런 놈들은 있는 모양이다.

 흑인들이 노예선에 실릴 때에는 마치 화물을 싣듯이 선창에 차곡차곡 포개어 졌다고 한다. 솔직히 이런 것은 군대랑 비슷하다. 나는 군시절 2 1/2톤 트럭(일명 육공트럭) 적재함 바닥에 차곡차곡 실려서 이동할 때면 '내가 물건인가 사람인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였다. 아무튼 흑인들은 때때로 선상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대부분은 금방 진압되었고, 주모자는 다음과 같이 처벌되었다.

 

「...뿐만 아니라 더 깊이 잘못을 뉘우치도록 엉덩이의 껍질을 벗겨냈다. 이렇듯 채찍질을 하고 껍질을 벗겨서 노예들의 엉덩이를 피범벅으로 만들고 나면, 화약, 레몬즙, 소금물, 고춧가루, 그리고 외과의사가 준 다른 약을 함께 넣고 뒤섞어서 엉덩이에 문질렀다. 회저병이 옮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엉덩이를 더욱 쓰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외에도 이 책에 나와있는 노예들에 대한 가혹행위는 한도 끝도 없다(참, 노예는 일단 매매거래가 성사되면 몸에 주인의 낙인이 찍혔다). 이러한 만행을 저지른 백인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매우 적절히 표현한 구절이 있었다. 다음은 독일·스위스계 퀘이커 교도들의 '저먼타운 항의문' 일부이다.

 

「"'백인을 노예로 부리기보다 흑인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 합당하다'는 주장을 용인할 수 없다. 사람을 훔치거나 납치하는 이들, 사람을 사고 파는 이들, 이들이야말로 노예로 삼아 마땅한 이들이다."」

 

 한편 책을 보다가 크게 충격을 받은 적도 있었다. 바로 책 158페이지에 실려있는 사진을 보고 그러하였는데, 사진에는 '미국의 흑인 처형 장면'이 찍혀 있었다. 웬 흑인 두 명이 거적대기 같은 옷을 걸친채로 큰 나무에 목이 매달려 늘어져 있었고(어디서 많이 두들겨 맞은 듯 옷은 매우 지저분하다), 그 앞에 수많은 백인 군중들이 모여 구경을 하고 있었다. 카메라 근처의 몇몇 백인들은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하거나 손가락으로 흑인을 가리키며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진을 보고 대단히 역겨웠다. 저 허연 피부에 큰 눈을 한 동물들이 과연 인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얻은 것이 많은 책이다.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일'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가지, 저자는 링컨을 마치 聖者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내가 알기로 이는 오도된 것이다. 다음은 내가 고등학교 때 스크랩해 놓았던 동아일보 기사의 일부이다.

 

「흔히 '남북전쟁 = 노예해방전쟁'으로 불리지만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인도주의적 이유가 아니라 남북전쟁의 전략의 일환으로 노예를 해방시켰다. 공화당 출신의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에서는 연방을 탈퇴하는 주가 속출했다. 링컨은 대통령에 취임하자 "나의 목표는 연방을 유지하는 것이지 노예제도 타파는 아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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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 밀레니엄 프로파일 1
로버트 서비스 지음, 정승현 외 옮김 / 시학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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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외모에서부터 사람을 압도한다. 표지라든가 제본 스타일 때문이 아니라, 그 두께 - 약 900쪽 - 로 하여금 보는 이를 질리게 만든다. (뭐 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나는 분명히 이 책에게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때문에 구입 후 수 년만에야 책을 펴보게 되었으며, 왜 이 책을 미리 보지 않았나 후회를 하게 되었다.

 

 레닌의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이다. '레닌'은 필명인데, 그는 이외에도 여러 이름을 썼으나 - 내가 얼마전에 읽은 바 있는 - '무엇을 할 것인가?'를 출간하면서 쓴 이름이 레닌인 - 그리고 그 책이 그의 저작들 중 최초로 큰 반향을 일으킨 - 관계로 대중에게 그는 '레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레닌은 귀족적인 집안에서 자라났으며 - 부친은 교육자인 관계로 교육열이 대단했다. 그는 집안의 왕자였고, 모친이나 누이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았다. 사랑과 기대를 받는만큼 레닌은 열심히 공부를 했고 성적은 항상 최상급이었다.

 레닌에게는 형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알렉상드르였다. 레닌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공부벌레였던 그는 대학에 가서 과격한 테러 단체에 몸을 담은 후 황제 암살 음모에 가담하였고 결국 실패하여 일당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형을 항상 존경해왔던 레닌은 이 사건으로 인해 러시아의 짜르 왕정을 증오하게 되었다. 이후 점점 대가리가 굵어간 레닌이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맑스의 사상이었다.

 맑스를 접한 레닌은 일생에 있어 단 한가지의 목표를 설정하게 된다. 그것은 짜르 체제의 전복에 이은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레닌은 처음에 상당히 교조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알고 보니 이 책의 제목은 체르니셰프스키의 동명소설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를 읽었을 때에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레닌은 맑스주의를 비판없이 무조건적으로 떠받들었으며, 자신이 해석한 맑스만이 진정한 맑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맑스나 레닌이나 중산층 출신의, 체험이 심히 결여된 이론가들이다. 아무리 머리가 좋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이론과 현실은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레닌은 맑스의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내가 여기서 레닌의 유배 생활, 망명 생활, 정치 투쟁 등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술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레닌이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이었고, 분명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도 볼셰비키('다수파'라는 뜻. 멘셰비키는 소수파 - 하지만 결코 볼셰비키가 항상 다수는 아니었다)의 리더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결국 혁명을 일구어내고 만다.

 10월 혁명으로 인하여 러시아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1차 대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러시아의 경제는 피폐했으며 레닌은 대단한 지지를 받고 있지도 않았다.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었고 레닌은 그것을 모두 해결하려 했다. 또한 그는 자기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나면 자연적으로 유럽의 모든 나라들에서 혁명이 일어날 줄로만 믿고 있었는데, 그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책을 보다보면 레닌이 해놓은 일은 엄청나게 많다. 그는 50세 조금 넘게 사는 동안 제대로 쉰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사람이 과로를 하면 안된다. 건강의 위협은 아무리 혁명적 영웅이라도 비켜가지 않는다. 레닌은 죽기 전에 스탈린을 경계했고 끝까지 그를 몰아내려 했다. 하지만 역사는 레닌의 후계자로 스탈린이 집권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레닌은 그야말로 황소고집이었으며 교조적이면서도 기회적인, 참으로 모순된 인간이었다.

 

「이러한 위선은 참으로 놀랄만하다. 레닌 자신도 (스탈린처럼)주의가 부족했으며 (트로츠키와 피야타코프처럼)너무 관료적인 방법에 집착해왔고 (지노비예프처럼)혁명에 대해 지나친 낙관주의로 일관해왔으며 또한 (부하린처럼)정통 맑스주의에 모호한 모습을 보여왔던 것이다.」

 

 저자의 이 말이야말로 레닌의 정치적인(일부는 사상적인) 모습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또한 레닌은 상당히 폭력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레닌은...(중략)...화를 내며 간섭했다. '악당들'은 현장에서 총살되어야 한다. '진압의 속도와 힘'은 강화되어야 한다. 어떤 헌법상이나 입법상의 개정도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모든 활동'에 적용될 수 있는 사형제도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공식화되어야 한다...(중략)...그는 법에 공포정치의 본질과 정당성을 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훌륭한 정치가였다. 그가 선택한 노선은 거의 항상 최선의 해결책을 동반하였다. 그런 그가 기반을 다져놓은 덕분에 '소련'은 70 여년간 존속할 수 있었다.

 

 사실 레닌 같은 사람이야말로 충분한 자료에 근거하여 객관적인 입장에서 전기를 쓰기가 대단히 어려운 사람일 것이다. 정치라는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 저자는 소련이 무너진 후에 레닌에 대한 방대한 양의 기밀문서를 연구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왜곡이 최소화된 레닌의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었다. 과연 저자가 밝혀놓은 참고문헌이나 주석들을 보면 그 어마어마한 양에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이다. 물론 본문 중간중간에 사건진행이 뒤죽박죽이거나 문단이 이상하게 나뉜 곳 등이 눈에 띄었지만 워낙 방대한 양의 자료를 가지고 900쪽 정도의 책을 저술하다보니 아주 완벽할 수는 없을 것이라 웬만큼은 이해할 수가 있었다.

 단지 눈에 거슬린 것은 번역자들의 무성의함이었다. 무성의한 번역문장, 무성의한 교정 - 오탈자의 남발 등은 양서의 질을 떨어뜨리는 재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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