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
강상중.현무암 지음, 이목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 유력 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할 투표일은 두 달 정도 남았다. 이 후보의 최대 강점이자 약점은 아버지인 박정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다. 사람들은 경제가 성장한 반면 민주화의 흐름은 퇴보하다 못해 열악했던 박정희 시대에 대해 상반된 평가를 내린다. 경제와 민주화, 어느 것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대한 판단은 완전히 달라지기 마련이다.


일본의 50년대 총리 중 하나였던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를 만주국의 경험을 통해 묶어서 서술한 강상중, 현무암의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라는 새 책은 공부가 부족한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동안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정치, 경제를 미국에 절대 의존한 관계로만 상상했는데 일제 시기의 경험이 결국 한국 현대사에 진하게 배어있었고, 외면적인 혹은 수사적인 배일, 반일과 달리 실제로는 일본과 상당히 친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미국 경험이 풍부했던 이승만 시기와 일본 장교 출신인 박정희 시기의 차이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일제 시기의 관료, 경찰, 군인과 같은 인력들이 어떻게 해방 정국, 50년대, 60년대에 활용되었는지를 더욱 알아보고 싶어진다. 어떤 인물들은 박정희처럼 아니 기시 노부스케처럼 시대의 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해서 살아남고 정상의 자리에 섰을 것이다. 사실 친일이라는 경력은 광복 이후 치명적 약점이 되었지만 거의 곧바로 형성된 세계적 냉전 체제 때문에 쉽사리 용서받는 측면이 컸다. 박정희는 좌파 경력까지 만주 시절 인맥과 운을 통해 극복했다는 점이 더 부각된다.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기원은 다양한 측면에서 볼 수 있지만 이 책은 박정희의 만주국 경험과 집권 후의 활용 그리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에서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한 최근 내 관심사와 딱 맞는 책을 읽게 된 셈인데 이 책의 내용은 하나의 흐름으로 인식해야지 이게 전부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박정희가 자신이 젊은 시절에 갈망해서 성취한 일본 장교의 꿈, 그리고 그 꿈을 펼치던 무대인 만주국의 경험이 군사 쿠데타 이후 한국에서 다시 실현된다는 것은 일견 수긍이 간다(그리고 그런 주장은 이미 2006년 한중연 박사 논문으로 나왔다. 이 책의 독특한 점은 기시와 박정희를 만주국 시기부터 1970년대까지 묶었다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기시나 박정희 같은 개인의 사상적 측면에 주목하는 바람에 그들의 사상이 어떻게 그의 지지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하다. 박정희 집권기의 한국 사회의 모습이 순전히 박정희의 생각만으로 채색되었다는 건 지나친 평가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대목에 대해선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원래 이 책은 일본 고단샤의 '흥망의 세계사' 시리즈 18권으로 '대일본.만주제국의 유산'이라는 제목이었다. 하지만 한국 번역서는 대선 정국을 의식해서인지 박정희라는 이름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부제를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로 설정하고, 해제에서 '친일' 경력의 박정희를 강조하는 등 원래 책의 내용보다는 박정희를 더욱 부정적으로 그려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많지도 않은 조선 출신의 일본 장교 중 하나이며 좌익 경력으로 사형까지 언도받았던 인물이 한국의 대통령으로 장기 집권했다는 것 자체도 큰 아이러니고 한국 사회 전반의 압도적인 반일 감정을 생각한다면 박정희가 여전히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 인간사라는 것이 하나의 잣대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특히 장기적인 피식민 상태는 사람들의 이중성을 극대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무엇에 대해서건 마음대로 쉽게 단정지을 수 있지만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한국 현대사에 대해 학문적 엄격함을 지키기는 어렵다는 걸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두운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무조건 지금의 잣대로 평하가지는 말고, 사과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사과하고 복권되어야 할 사람은 재평가를 해주는 게 공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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