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소설집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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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멀었다는 말』

권여선 소설

문학동네


 

『아직 멀었다는 말』은 단편소설 8편이 있는데 책 표지처럼 출퇴근길 지하철을 타고 강을 건너 가는 날들, 헤어진 사람들을 미워하고 그리워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왔다.

 

<모르는 영역>의 서로 간의 관계가 회복되는 시간이나 <손톱>의 나를 버리고 떠났지만 돌아올 거라 기다리고 있는 작은 믿음, <희박한 마음>의 떠난 후에 후회와 그리움으로 현실의 감각이 둔해질 때까지 생각하는 것, <너머>속 자신도 어쩌면 누군가 손 내밀어 주면 좋겠지만 돌봐주어야 하는 상황, <친구>의 신이 있다면 과연 주인공에게 그런 상황까지 내버려 두었을까 하는 의문, <송추의 가을>에서 아빠의 묘와 아직 살아계신 엄마의 화장에 대해 의견이 갈리는 남매들, <재>에서 제아무리 지식인인들 아내와 딸 없이 홀로 병원 생활을 해야 할 자신의 앞날을 담배 연기처럼 둥둥 떠나보내길 바라는 마음, <전갱이의 맛> 어쩌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아직 멀었다는 말』 속의 인물들처럼 현재의 힘든 상황도 이미 나와 너무 함께 해 익숙해져 버린 상황들도 충분히 전투를 잘 하고 있는 중이라 생각한다. 위로하고 싶은 인물을 만나면 그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나를 보면서 위안을 삼기도 하고 또 그런 나에게 잘 살고 있다는 위로를 주는 것 같으니까.

 

 

📖모르는 영역

 

다영은 외계인이 모르는 영역인 만큼 아빠 명덕도 마찬가지라 한다. 고깃집 사장의 잘못된 계산을 한 번이니까 괜찮다고 하는 아빠를 보며 엄마를 떠올리며 왜 한 번은 해도 되냐고 윽박지르는 다영이의 모습이 섭섭한 게 많이 쌓였지만 몰라주는 아빠가 미우면서 또 걱정이다. 딸과 아빠의 거리감은 어릴 때부터 쌓여있지 않다면 쉽게 좁혀지지 않는 듯하다.

 

 

🔖 멍하니 서서 새가 몰고 온 작은 파문과 고요의 회복을 지켜보던 그는 지금 무언가 자신의 내부에서 엄청난 것이 살짝 벌어졌다 다물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새가 날아와 앉는 순간부터 나뭇가지가 느꼈을 흥분과 불길한 예감을 고스란히 맛보았다. 새여, 너의 작은 고리 같은 두 발이 나를 움켜잡는 착지로 이만큼 흔들렸으니 네가 나를 놓고 떠나는 순간 나는 또 그만큼 흔들려야 하리. 그 찰나의 감정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생생해 그는 거의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P29

 

🔖 왜 아침 달 낮달 저녁달이 아니고 모두 낮 달인가 생각하다, 해 뜨고 뜬 달은 죄다 낮 달인 게지, 생각했다. 해는 늘 낮달만 만나고, 그러니 해 입장에서 밤에 뜨는 달은 영영 모르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차를 몰아 농가 펜션의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P46

 

 

📖손톱

 

아빠는 갯벌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죽고 엄마는 딸 대출금을 갖고 집을 나가고, 언니마저 소희 대출금과 저축까지 갖고 집을 나갔다. 소희는 십만 원 더 주는 매장으로 옮기며 출퇴근 시간은 40분이 더 걸리는 것에 대해 시급으로 따져본다. 대출과 생활비 등의 지출도 계획적으로 세워보지만 혼자 감당해 내기엔 벅차다. 그런 생각들로 짬뽕 곱빼기를 먹고 싶지만 맵게는 5백 원이 추가되니 예상했던 지출을 넘어가 먹지 않는다. 오른쪽 손톱을 다쳤지만 병원에 가면 7만 원이나 써야 해서 미루고 손톱 하나쯤 없는 거 어떠냐며 생각을 달리해본다. 조금은 돈 생각하지 않으려 소소한 곳에서 행복을 느껴보려 노력하지만 현실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언니는 엄마가 못된 사람, 말이 없는 사람이 되어간다고 했다. 말이 없는데 착한지 못된지 언니가 어떻게 알 수 있나. 생각해 보니 실은 언니도 몰랐던 거다. 엄마가 얼마나 못된 사람이 되어갔는지를. 그러니 당했던 거고. P58

 

🔖슬프면서 좋은 거, 그런 게 왜 있는지 소희는 모른다. 밖은 어두워지고 휴일이 지나가는데 소희는 조금만, 조금만, 하며 울듯이 앉아 있다. P82

 

 

📖 희박한 마음

 

그리워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방법이 애잔했다. 그 사람의 행동을 바라보고 떠올려보고 실재의 감각이 둔해질 때까지 오래도록 기다려보기도 했다.

데런은 디엔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듯 추억했는데 그때의 감정들에 대해 후회하고, 하염없이 생각한다. 생각을 너무 하다 보면 무슨 고민이었는지도 모를 만큼 머리가 어지러워지는데 그런 상태에 대해 결국은 희박한 유사성이라 말하며 포기해가는 마음을 너무 잘 나타내서 읽으면서 감탄을 연발했던 소설.

 

🔖🔖디엔이 그 손을 잡았다. 언제나 그렇듯 디엔의 손은 서늘했는데 아직도 데런은 그 온도와 감촉을 기억하고 있다. 그 온도를 잊지 않기 위해 가끔 한 손을 일부러 담요 밖에 놓아 서늘하게 만든 다음 따뜻한 다른 손으로 맞잡아보고 이게 디엔의 온도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버릇이 들었다. P92

 

🔖데런은 평생 처음으로 디엔이 자신을 떠날지도 모르며 디엔 없이 자신이 혼자 남겨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끔찍한 공포와 고통스러운 자책에 빠져 맞은편 벽의 낡은 벽지만 하염없이 노려보았다. 어느덧 세상은 사라지고 아득히 멀어지는 디엔과 자신 사이에 놓인 측량할 수 없는 거리만이 절박한 실재로 남았다. P96

 

🔖어쩌면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망각 저편으로 넘어가버렸지만 어느 시절엔가 자신이 종종 이런 상태에 빠져 있어 몸이 기억하고 있는 흔적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데런은 생각했다. 자신은 끝내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이토록 희박한 유사성만으로는. P97

 

 

📖너머

 

N은 기간제 교사로 학교의 부당함을 알고 있지만 내색할 수 없다. 엄마는 간병인의 도움으로 병원에 있는데 간병인을 대하는 태도가 학교에서 다른 선생님들이 자신에게 하는듯한 행동들이다. 참, 아이러니하다.

 

 

📖 친구

 

답답하기 짝이 없다. 선생님이 민수 엄마에게 이야기하는데도 알면서도 방치하는 건지 진짜 가해자들을 친구라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신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듯 맹신한다. 학폭은 벗어날 수 없는 테두리 안에서 고통받고 그 차가운 시선을 혼자 견뎌야 하는 감옥 안의 고문과도 같을 것이고, 벗어나도 그 후유증으로 정신적 고통은 여전할 것이다. 부모가 종교를 핑계 삼아 자식의 정상 발달을 저해시킨다면 자식이 성인이 되어 부모를 원망하지는 않을까. 무엇보다 엄마가 말하는 그 신이 있다면, 왜 지금 엄마와 민수의 상황을 이렇게 만들도록 두었는지도 의문이다.

 

🔖 이 모든 것도 그분만이 아시겠지, 나의 기쁨 되시는 그분만이…… 필사적으로 그런 생각에 매달리느라 해옥은 아들이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P165

 

 

📖 송추의 가을

 

살아생전 엄마는 아빠와 떨어지고 싶다는 말에 아빠의 묘를 화장을 시킬지 사 남매는 의견이 분분하다. 아빠 묘지 앞에서도 왜 직장은 옮겼는지 잔소리 같은 걱정을 막내 혁이에게 던진다. 엄마는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유골함을 할지 엄마와 합장 또는 평묘를 할지 이야기를 한다. 누구를 위한 의견인지 결국엔 자신들이 관리해야 하니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말하는 것 같은데, 혁이는 엄마가 원하는데로 왜 안 하냐고 화를 낸다. 모든 가족이 그렇듯 막내에게는 가르치려 들고 막내에게는 선택과 개인의 의견을 듣지 않는다. 왜 꼭 이렇게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그 앞에서 이렇게 다들 싸울까. 조용히 그리워하고 추모할 수는 없는 것인지..

 

🔖 혁이 니가 뭘 몰라서 그러는데 이건 합장하고는 좀 달라. 석실을 나눌 거거든.

누나 미친 거야? 한 무덤에 들어가는 게 합장이지 무슨 합장이 아냐?

니가 뭘 몰라서 그러는데,라고 작은형이 말하는 순간 그가 주먹으로 운전대를 내리쳤다. P191

 

 

📖 재

 

아내가 딸을 데리고 떠난 후, 아내는 죽고 딸 소식이 끊어진 현재. 자신은 곧 병원에 가망 없는 수술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서 그레고르의 소설 속 인물을 상상하며 병원에서의 생활을 상상해 본다. 담배를 태우며 날리는 재들이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그리며 본인도 재처럼 하늘을 날아보고 싶은 것은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이 장면이 그레고르에 대한 냉혹한 예언처럼 생각되었다. 긴 병원 건물은 벌레가 된 그레고르의 연약한 둥근 머리를 관통하는 잿빛 쇠막대처럼 여겨졌고, 더 나아가 어쩌면 모든 병원의 작은 창문 속 병실에 갇혀 있는 환자들을 불가능한 삶의 희망을 볼모로 꼬치처럼 꿰고 있는 쇠꼬챙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들은 쓸모없는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가족의 재산을 갉아먹는 해충 같은 존재들이며 결국엔 가족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바삭한 껍질만을 남기고 죽어야 하는 그레고르의 운명인지도 모른다고. P202-203

 

 

📖 전갱이의 맛

 

이혼한 부부. 아내는 3년이 지나 이혼 전과 달라졌다고 느낀다. 남자는 시간강사로 말하기 좋아하던 사람이었지만 성대 낭종 수술을 받은 후 말을 하지 않게 되면서 자신을 위한 자신을 향한 말을 찾고 싶었다 말한다. 전갱이 생선 가시를 발라먹는 모습도 다른 두 사람은 여자는 결혼생활 때는 자신이 모든 것을 맞추며 지냈지만 남자가 자신이 몰랐던 시간을 찾아가는 과정에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어떤 마음이 생긴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부부와 연인들을 보면 완벽하게 이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본다는 것으로 과거의 상처들이 치유가 될 수도 있을까 하는 작은 마음들 때문에 멀어짐을 선택하기보다 만남을 선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 위한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나와 대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니까 그동안 난 쉴 새 없이 누군가에게 말을 해왔는데, 그 말을 사실 나도 듣고 있었던 거지. 그런 의미에서 말은 순순히 타인만 향한 게 아니라 나를 향한 것이기도 했던 거야. 그런데 말을 못 하게 되면서 타인을 향한 말은 그럭저럭 포기가 되는데 나를 향한 말은, 그건 절대 포기가 안 되더라고.” P241

 

🔖🔖묵언의 시간 속에서는 항상 나만의 말들이 태어난다. P249

 

🔖🔖어떤 말들은 뜻을 알 수 없는 채로 생겨난다고 그가 말했는데 정확히 그렇다. 어떤 감정이나 감각들은 나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몸으로 표현되고 기억에 각인된다.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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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이 그 손을 잡았다. 언제나 그렇듯 디엔의 손은 서늘했는데 아직도 데런은 그 온도와 감촉을 기억하고 있다. 그 온도를 잊지 않기 위해 가끔 한 손을 일부러 담요 밖에 놓아 서늘하게 만든 다음 따뜻한 다른 손으로 맞잡아보고 이게 디엔의 온도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버릇이 들었다. - P92

데런은 평생 처음으로 디엔이 자신을 떠날지도 모르며 디엔 없이 자신이 혼자 남겨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끔찍한 공포와 고통스러운 자책에 빠져 맞은편 벽의 낡은 벽지만 하염없이 노려보았다. 어느덧 세상은 사라지고 아득히 멀어지는 디엔과 자신 사이에 놓인 측량할 수 없는 거리만이 절박한 실재로 남았다. - P96

어쩌면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망각 저편으로 넘어가버렸지만 어느 시절엔가 자신이 종종 이런 상태에 빠져 있어 몸이 기억하고 있는 흔적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데런은 생각했다. 자신은 끝내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이토록 희박한 유사성만으로는. - P97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 위한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나와 대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니까 그동안 난 쉴 새 없이 누군가에게 말을 해왔는데, 그 말을 사실 나도 듣고 있었던 거지. 그런 의미에서 말은 순순히 타인만 향한 게 아니라 나를 향한 것이기도 했던 거야. 그런데 말을 못 하게 되면서 타인을 향한 말은 그럭저럭 포기가 되는데 나를 향한 말은, 그건 절대 포기가 안 되더라고." - P241

묵언의 시간 속에서는 항상 나만의 말들이 태어난다. - P249

어떤 말들은 뜻을 알 수 없는 채로 생겨난다고 그가 말했는데 정확히 그렇다. 어떤 감정이나 감각들은 나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몸으로 표현되고 기억에 각인된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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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드 쿠쿠 랜드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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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드 쿠쿠 랜드』

 

앤서니 도어

민음사



 


‘몽상의 세계’를 뜻하는 『클라우드 쿠쿠 랜드(Cloud cuckoo land)』는 9세기 비잔티움 시대 디오게네스가 필사한 작품으로 팔십 년은 남자, 일 년은 당나귀, 일 년은 농어, 일 년은 까마귀로 산 아이톤의 이야기이다. 다섯 주인공 콘스턴스, 안나, 오메이르, 지노 니니스, 시모어의 15세기 콘스탄티노플부터 21세기 미국까지 다른 시대, 장소를 오가며 각 인물들은 현실에서 벗어나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닿고자 한다.

 

🔖유실된 그리스 산문 설화 『클라우드 쿠쿠 랜드』는 안토니우스 디오게네스가 하늘에 떠 있는 유토피아 도시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양치기의 이야기를 쓴 작품으로 집필 시기는 서기 1세기 말경으로 추정된다.(P18)

 

22세기 지구에서 다른 베타 Oph2로 향하는 아르고스호 우주선을 타고 가는 14살 소녀 콘스턴스는 인공지능 시빌과 함께 대화를 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격리되어 볼트원에서 내부 생활만 하던 중 우주선에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간 공간을 질주하는 우주선에 갑자기 전염병이 나타난 것과 시빌과 모두가 자신들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것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미션 여행이라는 단어를 책의 마지막에 가서야 왜 그렇게 불렀는지 뒤늦게 이해했다.(^^;)

홀로 삶을 산다는 고독, 외로움이 기계장치인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머지않은 미래일 수 있겠지만 이미 다가온 바이러스 감염으로 개인화가 심해졌고 거리 두기를 빙자한 이기주의, 감염과 완치가 되었음에도 그들을 향한 시선들은 볼트원에 격리된 콘스턴스를 보면서도 느낄 수 있다.

 

 

15세기 콘스탄티노플의 여덟 살 소녀 안나는 언니 마리아의 자수 실력이 좋은 덕분에 칼라파테스 집에 있을 수 있다. 안나는 자수 실력을 늘리는 것보다 글과 책에 관심이 많았는데 리니키우스 스승에게 글 읽기를 배우면서 책을 읽고 싶은 욕망은 더 커져간다.

 

🔖 “하지만 책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는다. 불에 타거나 홍수에 쓸리거나 벌레들의 먹이가 되기도 하고, 또 변덕스러운 폭군을 만나면 죽기도 한다. 보호하지 않으면 책은 세계 밖으로 빠져나가 버려. 그리고 책이 세계 밖으로 사라질 때, 기억은 다시 한 번 죽는다.” (P78) 안나의 스승. 리니키우스

 

안나는 히메리우스와 함께 수도원에서 찾은 염소 가죽으로 제본한 필사본을 고대 이야기를 읽고 책 속의 내용을 이해하면서 놀란다.

 

🔖

“책이야.” 필경사가 미소 짓는다.

“그리고 노아와 책을 실은 우리의 방주 이야기에서 홍수는 뭔지 아니?”

안나는 고개를 흔든다.

“시간이야. 하루하루, 일 년 또 일 년, 시간은 이 세계에서 오래된 책을 지워 버린단다. 네가 저번에 우리에게 가져다준 필사본 있지? 로마 제국 시대에 살았던 학자 아에리아누스가 쓴 거였단다. 이 방에 있는 우리에게, 바로 이 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그 책 속의 문장들은 십이 세기를 견뎌야 했어. …(P249)



 

🔖 “저 책 한 권 한 권이 하나의 문, 또 다른 장소와 시간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란다. 네 앞에는 창창한 삶이 펼쳐져 있어. 그리고 앞으로 넌 오늘 본 것을 평생 누리게 될 거야.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니, 어떻게 생각하니?” (P292)

 

가난한 여자가 책을 읽으면 마녀로 몰릴 수 있는 시대의 불쌍한 안나. 양초를 책을 읽기 위해 켰는데 언니 마리아가 칼라파테스에게 끌려가 머리를 부딪치는 사고를 당하고 책(양피지 책첩)은 불길에 타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책 읽기를 더 갈망한다. 이후 불타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도망친 안나는 오메이르를 만난다.

 

🔖 그녀는 이곳에 와서 몇 번의 겨울을 지냈는지 잊어버리고 기억 또한 희미해진다. 물을 긷다가, 오메이르의 다리에 난 상처를 꿰매다가, 그의 머릿니를 잡아 주다가, 뜬금없이 시간이 두 겹으로 접히면서 그녀의 눈앞에 노를 잡은 히메리우스의 두 손이 떠오르거나, 소수도원 벽을 타고 내려올 때 몸을 끌어 내리던 중력의 아찔함이 느껴진다. 인생이 막바지로 향하면서 이런 기억들은 그녀가 사랑했던 기억들과 뒤섞여 하나가 된다. 고향이 그리운 나머지 폭풍우 속에서 뗏목을 버리고 파이아케스인들의 섬으로 가기 위해 바닷물에 몸을 맡기는 오디세우스, 바늘처럼 찔러 대는 쐐기풀에 보드라운 입술을 묻고 있는 당나귀 아이톤, 모든 시간과 모든 이야기는 결국 하나가 되며 같아진다. (P768)

 

이 장면이 늙은 안나가 과거의 기억과 책 속 내용들을 떠올리며 현재와 과거가 뒤섞여 있는 듯한데, 의식적으로 책 속 내용을 읽으며 장면 속으로 뛰어들 수도 있지만 안나는 아닌듯하다. 의지와 달리 시간과 장소가 달라지는 듯 새롭게 느껴진다면 느낌은 어떠할지 궁금해졌다. 노인 치매처럼 눈앞의 현재는 사라지고 머릿속의 기억이 눈앞에 보인다면 살아온 동안 읽었던 책의 한 장면의 감성으로 사는 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잘 모르겠다.

 

 

15세기 오메이르. 안나와 같은 시대. 불가리아 로도페산맥 어느 나무꾼 마을. 얼굴에 언청이로 태어난다. 태어날 때 아버지가 죽어 악마라는 오해를 받아 산으로 올라와 살고 있지만 용기로 극복하라는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말씀은 늘 옳다. 오메이르는 갈색 소 ‘나무’와 회색 소 ‘달빛’과 함께 자연을 사랑하는 소년이다. 오메이르 이야기는 문명과는 거리가 멀어 도서관이나 사서, 선생이 존재하지 않을 장소 같아 책과 관련이 없을 것 같은데 왜 나오는지 궁금했었는데 안나와 만나는 장면이 나오면서부터 이해가 되었다. 어쩌면 할아버지의 옛날 신들의 호수에 누구도 찾을 수 없는 호수 밑바닥에 상자를 자물쇠로 채워 숨겨진 책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오메이르는 이미 언어를 초월한 삶의 용기를 주는 방법을 알았고 언어로 인하여 인간이 신을 믿으며 벌어지는 전쟁에 대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안나와 같은 시대 다른 장소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메이르가 술탄의 콘스탄티노플 전투에 징발되고 동물들의 죽어가는 모습에 탈출한다. 도주 중 안나와 만나 오메이르 고향으로 함께 가는데 안나가 가지고 온 필사본은 신이 어떻게 사람들을 믿게 만드는지 문자의 힘을 아는 안나는 오메이르의 도움으로 나무에 숨겨둔다. 시간이 흘러 오메이르와 안나의 막내 아들이 폭우 내리는 날 고열에 시달리자 오메이르는 답을 찾고자 숨겨둔 필사본을 안나에게 가져다 준다. 아이들에게 필사본의 모험이야기를 들려주며 행복한 날들이 이어진다. 안나와 오메이르의 이야기는 한편의 동화같은 이야기였다. 안나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에서 오메이르에 의해 우르비노까지 간 이 원고는 동물과 자연을 사랑하고 가족과 함께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은 여성과 장애, 약자의 보호에 대한 인식이 있는 세계를 꿈꾸는 자들이 그 희망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21세기 아이다호주 레이크포트. 지노는 마녀라 불리는 도서관 사서에게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다. 어느 날 일본 군대가 미국 진주만을 공격한 사건으로 지노 아빠는 군대 입대 하고 아빠에게 관심 있는 보이즈턴 부인과 살게 된다. 아빠는 전쟁 중 돌아가시며 영웅이 되고, 제설작업을 하던 지노는 아버지처럼 군대 입대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게 된다. 이등병 E-1 지노 니니스 이름을 듣게 되기 전까지 『클라우드 쿠쿠랜드』를 번역했던 지노 니니스가 아니라 다른 인물로 착각했었다(--;;) 전쟁 중 같은 포로인 렉스를 만나 솥단지 위, 눈 위 어디든 그리스 문자를 쓰는 렉스에게 고대 글을 배우고 제대 후에 렉스를 수소문하여 고대 문자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렉스를 좋아했던 지노는 소설 다른 인물들처럼 사회의 소외자다. 동성애자이지만 책을 통해 도전하는 정신을 보여준 것 같다.

여든이 넘어 레이크 포트 공공도서관에서 5학년 학생들과 연극을 준비하며 지노는 아이들에게 관용구에 통달할 필요 없이 이야기 암시 내용만 있다면 나머지는 상상으로 채워갈 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은 렉스가 지노에게 “고대 그리스인들이 말할 때 그것이 실제로 어떤 소리였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아무리 해 봐야 그들이 쓴 단어를 지금 우리가 쓰는 단어에 결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작부터 실패가 자명한 작업이다. 하지만 무작정 도전하는 것, 역사의 어둠으로부터 강 건너편에 있는 무언가를 끌어내 우리의 시대로, 우리의 언어로 옮기려고 시도하는 것, 바로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헛고생이라고 그는 말했다.”(P618) 처럼 이해하지 못한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언어로 해석해 보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듯하다.

 

 

21세기 손 발 귀 청각에 예민한 시모어를 위해 엄마 버니는 유산으로 받은 자연 속 집으로 간다. 도서관 사서가 올빼미 책을 읽어준 후 시모어는 올빼미에게 트러스티프렌드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인간의 욕심으로 파괴되는 자연을 지켜보던 올빼미를 대신해 총을 쏜 시모어.

 

🔖그 세계, 그가 사랑했던 전부. 아케이디 레인 뒤편의 숲, 개미 떼가 바삐 오가며 물결을 이루던 모습, 잠자리들이 이리저리 빠르게 날아다니던 모습, 사시나무 숲에서 들려오던 바스락 소리, 7월 첫월귤 열매의 시큼털털한 달콤함, 폰데로사소나무 숲을 지키던 파수꾼들은 그가 만났고 만나게 될 어떤 존재보다 사려 싶었고 인내심이 많았다. 그리고, 자신의 나뭇가지에 앉아서 이 모든 것을 굽어보던 큰회색올빼미 트러스티프렌드. (P590)

 

모든 인물들에게 책이 있었다. 현실의 전쟁, 소음, 고독, 차별 등으로 부터 책 속의 또 다른 시간과 장소에 데려가 주었으며 온 세계의 이야기와 그 너머의 수수께끼들, 자신이 모르는 세상에 대해 인물들은 깨닫지 않았을까. 책이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모든 이들을 연결하고 있다는 느낌은 클라우드 쿠쿠랜드라는 소설이 주고 싶었던 메시지 인 듯하다. 벽돌책이 주는 무게는 어떤 날은 힘겨웠지만 인물들의 여정을 통해 책이 주는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때로 이젠 사라지고 없어졌다고 생각한 것이, 다만 감춰져 있을 뿐 다시 발견되기를 기다리기도 하니까.”(P550) 이 책의 또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은 마지막 장까지 덮은 후에야 발견한 느낌이다.

 

  

 

🔖뿌리를 빻으면서 그녀는 모두에게 우리 몸은 한낱 먼지이며, 우리의 영혼은 지금껏 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그리워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그곳이 멀지 않으니, 우리의 영혼이 육신이라는 껍데기를 벗어 버리고 신이 거하는 집으로 가게 되리라는 기대에 떨고 있다고 말한다. P515



 

 

 

🔖언젠가 렉스는 그에게 말했다. 인간이 하는 미친 짓거리 가운데 죽은 언어를 번역하는 것만큼 겸손한, 아니, 숭고한 건 없을 거라고. 고대 그리스인들이 말할 때 그것이 실제로 어떤 소리였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아무리 해 봐야 그들이 쓴 단어를 지금 우리가 쓰는 단어에 결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작부터 실패가 자명한 작업이다. 하지만 무작정 도전하는 것, 역사의 어둠으로부터 강건너편에 있는 무언가를 끌어내 우리의 시대로, 우리의 언어로 옮기려고 시도하는 것, 바로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헛고생이라고 그는 말했다. P618 렉스가 지노에게

 

 

🔖지저분하고, 벌레 먹은 구멍에, 곰팡이에 뒤덮여 있는 것이 흡사 곰팡이 균과 시간과 물이 합작하여 유실 시(erasure poem)*를 만들려고 손잡은 꼴이지만, 지노의 눈에는 마법처럼, 페이지 밑 깊은 곳 어딘가에서 그리스 문자들이 배경 위로 은은한 하얀빛으로 빛나는데, 손으로 필사한 것이라기보다는 글자의 유령처럼 보인다. 렉스의 편지가 도착했을 때 처음엔 렉스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떠오른다. 때로 이젠 사라지고 없어졌다고 생각한 것이, 다만 감춰져 있을 뿐 다시 발견되기를 기다리기도 하는 것이다. P632

 

*블랙아웃 시(blackout poem)라고도 불린다. 기존 텍스트에서 단어들을 상당수 지우고 남은 단어들로 완전히 새로운 시를 만드는 발견 시(found poem)의 한 형태.

 

 

🔖언젠가 할아버지가 옛날 신들이 지구를 떠나면서 남기고 간 책에 관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할아버지는 그 책이 자물쇠를 채운 황금 상자에 들어 있다고 했다. 신들은 이 상자를 자물쇠를 채운 청동 상자에 넣고, 그런 후 청동 상자를 철 상자에 넣고, 마지막으로 나무 궤에 넣어 어느 호수 밑바닥에 내려놓은 후 길이가 30미터인 물의 용들을 시켜 그 상자를 맴돌게 했는데, 내로라하는 용자도 용을 죽일 수 없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또 만에 하나 책을 손에 넣어 읽는 자는 하늘을 나는 새들과 땅 밑을 기어다니는 것들이 쓰는 온갖 언어를 알아듣게 된다고, 만약 귀신이 그 책을 읽게 된다면 죽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말했었다. P701 오메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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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로부터 도서지원 받았습니다.

"하지만 책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는다. 불에 타거나 홍수에 쓸리거나 벌레들의 먹이가 되기도 하고, 또 변덕스러운 폭군을 만나면 죽기도 한다. 보호하지 않으면 책은 세계 밖으로 빠져나가 버려. 그리고 책이 세계 밖으로 사라질 때, 기억은 다시 한 번 죽는다." - P78

"저 책 한 권 한 권이 하나의 문, 또 다른 장소와 시간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란다. 네 앞에는 창창한 삶이 펼쳐져 있어. 그리고 앞으로 넌 오늘 본 것을 평생 누리게 될 거야.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니, 어떻게 생각하니?" - P292

그녀는 이곳에 와서 몇 번의 겨울을 지냈는지 잊어버리고 기억 또한 희미해진다. 물을 긷다가, 오메이르의 다리에 난 상처를 꿰매다가, 그의 머릿니를 잡아 주다가, 뜬금없이 시간이 두 겹으로 접히면서 그녀의 눈앞에 노를 잡은 히메리우스의 두 손이 떠오르거나, 소수도원 벽을 타고 내려올 때 몸을 끌어 내리던 중력의 아찔함이 느껴진다. 인생이 막바지로 향하면서 이런 기억들은 그녀가 사랑했던 기억들과 뒤섞여 하나가 된다. 고향이 그리운 나머지 폭풍우 속에서 뗏목을 버리고 파이아케스인들의 섬으로 가기 위해 바닷물에 몸을 맡기는 오디세우스, 바늘처럼 찔러 대는 쐐기풀에 보드라운 입술을 묻고 있는 당나귀 아이톤, 모든 시간과 모든 이야기는 결국 하나가 되며 같아진다. - P768

언젠가 렉스는 그에게 말했다. 인간이 하는 미친 짓거리 가운데 죽은 언어를 번역하는 것만큼 겸손한, 아니, 숭고한 건 없을 거라고. 고대 그리스인들이 말할 때 그것이 실제로 어떤 소리였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아무리 해 봐야 그들이 쓴 단어를 지금 우리가 쓰는 단어에 결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작부터 실패가 자명한 작업이다. 하지만 무작정 도전하는 것, 역사의 어둠으로부터 강건너편에 있는 무언가를 끌어내 우리의 시대로, 우리의 언어로 옮기려고 시도하는 것, 바로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헛고생이라고 그는 말했다. - P618

언젠가 할아버지가 옛날 신들이 지구를 떠나면서 남기고 간 책에 관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른다. 할아버지는 그 책이 자물쇠를 채운 황금 상자에 들어 있다고 했다. 신들은 이 상자를 자물쇠를 채운 청동 상자에 넣고, 그런 후 청동 상자를 철 상자에 넣고, 마지막으로 나무 궤에 넣어 어느 호수 밑바닥에 내려놓은 후 길이가 30미터인 물의 용들을 시켜 그 상자를 맴돌게 했는데, 내로라하는 용자도 용을 죽일 수 없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또 만에 하나 책을 손에 넣어 읽는 자는 하늘을 나는 새들과 땅 밑을 기어다니는 것들이 쓰는 온갖 언어를 알아듣게 된다고, 만약 귀신이 그 책을 읽게 된다면 죽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말했었다. - P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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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6월
평점 :
품절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장편소설

박소현 옮김

다산책방 출판



 

  한국계 미국인 작가의 베스트셀러 『작은 땅의 야수들』이 기백 넘치는 호랑이에 한국인의 혼을 담은 ‘호랑이 에디션’으로 1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미국에서 먼저 출간된 소설이고 일제강점기가 배경이라는 점은 『파친코』가 생각났지만 『작은 땅의 야수들』은 독립운동의 이야기가 담겨있어 더 묵직하게 다가왔다. 한국인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일환으로 호랑이 사냥을 하던 일본인들의 만행이 근대사의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통해 묘사되어 있었고, 우리 민족의 절대 꺾이지 않는다는 불굴의 의지가 잘 표현되어 더욱 실감 나게 읽을 수 있었다.

 

  1917년 겨울 일제강점기 조선, 깊은 산속 굶주림으로 짐승을 쫓으며 산을 헤매던 사냥꾼은 호랑이를 만난 일본군 대위 야마다 겐조를 구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우리 민족은 대대로 호랑이가 먼저 죽이려 들지 않는 한, 절대로 호랑이를 죽이지 말라고 가르침을 받아 새끼 호랑이가 사정거리 안에 두고서도 활시위를 당기지 않지만 일본군은 돈이 되는 호랑이를 총으로 쏴 죽이려 한다. 화가 난 호랑이를 남경수가 막아서며 일본군을 구하게 되고, 야마다 대위는 적에 맞서 동맹군을 몸 바쳐 보호하는 위엄을 가진 호랑이 사냥꾼 남경수를 존중하게 된다. 길을 안내한 백 씨는 바로 죽인 반면, 호랑이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준 것에 대해 보답으로 살려줘야 한다며 그를 두둔하고 목숨을 구해준다. 선물로 남경수에게 라이터 주었는데, 훗날 아들 정호는 아버지의 유품인 라이터를 소중히 간직한다. 누이는 마을 홀아비에게 시집을 보내고 정호는 스스로 살기 위해 경성으로 향한다.

 

  인물들 중 가난한 집 맏딸로 태어나 열 살에 견습 기생으로 팔린 옥희에게 조금 더 애정이 갔다. 소설의 많은 내용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사냥꾼의 아들인 정호보다 참혹했던 그 시대를 견디고 살아남았기 때문에 기억에 남았다.    

  기생이었던 옥희의 삶을 통해 기생은 예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주기도 했고, 경성에 택시나 전차가 등장하여 인력거꾼의 줄어드는 일자리를 일종의 동정심같이 자신들이 조금은 보전해 주고자 인력거를 탔으며  자신들의 공연을 통해 그들의 자녀들의 사립학교 모금을 마련해 주기도 하며 일본으로 인해 바뀌어가는 한국의 모습들 속에 전통성을 지켜나가고자 했다. 

  그리고 옥희를 보며 가장 중요한 권력과 자신밖에 모르는 남자를 절대 사랑하면 안된다는 가르침을 얻는데, 안동 김씨 본가와 연이 끊긴 가난한 장남 인력거꾼 한철과 사랑에 빠져 그의 대학 등록금과 가족의 생활금도 주었지만 6년의 사랑 동안 돌아오는 것은 현재 배우이지만 과거 기생과는 가문의 명예가 있어 옥희와 결혼만은 할 수 없다 말하며 둘 사이는 끝이 난다. 기생으로 한몫 챙겨 노후를 준비해야 했던 옥희와 연화는 영원할 거라 믿었던 불같은 사랑 때문에 자신의 직업도 노후준비도 모두 놓치고만 꼴이다. 

 

  무자비한 일본군에 짓밟힌 월향이라는 인물은 그 시대 여성들이 힘없이 당해야 했던 참혹함에 화가 났다. 권력에 맞선 복수는 꿈꿀 수도 없이 한 소녀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 그냥 꺾이고 짓밟혀 버렸으니. 교양은 찾아볼 수 없을 야만적인 행태들로 그것을 정복이라 말하며 웃고 있는 모습은 읽으면서 속에서 감정이 거칠게 치밀어 올랐다. 마치 내가 그 장면 속 만행을 보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복받치는 분노를 억지했다.

 

  젊은 남자 한 명이 3.1운동 시작을 알리는 선언문을 크게 낭독하는 장면에서 밀려오는 감동은 아직도 남아있다. 이 장면을 영화로 만든다면 속에서 눈물이 터져 나와 멈출 수는 없을 것 같다.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이 가진 최고의 옷을 입고 머리도 단정히 하고 다녔는데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과 붙잡혔을 때 한국을 대표하여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했다는 말을 읽으며 그들이 어떤 마음을 갖고 살았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3.1운동에는 단이를 중심으로 분칠한 여자들이 두려움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손을 맞잡고 대항한다. 기생이었음에도 사랑에 헌신하고 나라를 위해 쓰임을 할 수 있다면 기꺼이 육체를 내 던져서라도, 배우지 못했어도 나라 잃은 설움을 알고 자주 독립해야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느낄 수 있으니까.

 

  일제강점기의 억울하지만 당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을 꿈꾸지만 돈에 백발의 권력 있는 남자의 첩으로 살기를 택하는 것이 최선인 기생의 인생이지만, 그래도 희망을 꿈꿔보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꿈꾸어보는 희망으로 살아가는 기생들. 월향. 은실. 연화. 옥희. 예단. 그들은 가장 밑바닥 계층이었지만 인생이었지만 풍류를 알고 아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다리 밑 고아 거지들의 왕초가 된 남경수의 아들. 정호는 상경해 미꾸라지라는 또래 소년을 만나 아이들의 거지 왕초 영구를 만나게 되는데 영구를 제압하고 자신이 새로운 왕초가 된다. 중국집, 카페, 한약방 등에 자리비를 명목으로 수금을 하며 패거리가 된다. 정호는 옥희를 향한 짝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한철을 만나는 것을 알게 되자 사회사상가 이명보를 만나 독립운동의 임무를 받고 활동하게 된다. 옥희에게 상처 준 한철에게 복수하는 정호를 보면서 호랑이 잡던 사냥꾼 아들이 큰 활약이 아니라 사랑의 복수 따위를 하다니! 공산당 이명보의 손발이 되어 딱히 큰 업적을 남기지 않은 것도 실망감이 컸다. 

 

  출판사와 자전거 사업을 하는 김성수는 일본이 승리할 경우 한국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라 이명보는 왜 우리가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지 합리적이지만 정의롭지 않다고 되려 설명하게 된다. 단이와 인연이 있던 김성수는 이명보의 제안을 받아들여 독립운동 선언문을 인쇄해 주는데, 이 인쇄판이 결국은 친일로 편안히 살던 김성수에게 독립운동을 했다는 증거물이 되어 해방 후에도 벌을 줄 수 없었다. 김성수는 친척과 집안이 모두 친일이었음에도 일본과 직접적인 증거를 찾지 못해 축적한 부로 잘 살아간다. 

 

  사냥꾼 남경수는 호랑이가 죽이지 않고 살려준 것은 말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일이기에 죽은 어머니가 호랑이가 되어 자신을 돌봐준 것 같다고 말했다. 어쩌면 우리 땅에서 최고 포식자인 호랑이가 우리를 지켜준 듯, 이 땅에 야수들이 존재했었으며 몸집이 크고 힘센 모습이 아닌 연약한 여성도 우리나라를 지킬 수 있는 야수가 내면에 있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읽는 내내 가슴이 끓어올랐고 독립운동이 무사히 거사가 이루어 지지 않았을 경우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우직하게 자신의 맡은 바 소임을 충실히 하는 인물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겠다. 

 

 


 

 

 

🔖 각 지역의 특성을 빗댄 옛말을 따라, 사람들은 남자를 ‘평안도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물론 그 사나운 야수들은 평안도뿐 아니라 이 작은 땅의 모든 산과 숲마다 넘쳐났기에 고대 중국은 이곳을 ‘호랑이의 나라’라 부르기도 했을 정도였지만, 확실히 그 별명은 남쪽에서 왔다는 농부들보다 그 남자에게 훨씬 잘 어울렸다. P20

 

 

 

🔖 그러나, 야마다는 순간적으로 그 남자의 눈 속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보았다. 서로 대치하고 있는 군인들은 다르기보다 오히려 비슷할 수밖에 없으며, 그들에게는 각자의 편에 있는 민간인들보다 자신과 맞선 상대편 군인들이 훨씬 더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기 마련이다. 비록 외양은 초라할지언정, 남경수는 자신의 적수들을 기꺼이 살해하고 동맹군을 몸 바쳐 보호할 인물 같아 보였다. 야마다는 그러한 위엄을 존중했다. P44

 

 

🔖 아마도 이것이 예전에 어머니가 교육이 끼치는 해약에 대해 경고했던 이유일지도 몰랐다. 눈앞에 남자 한 사람 보이지 않아도, 언어 자체가 옥희를 유혹했다. 옥희는 특정한 단어들을 특정한 순서로 나열하면 자기 내면의 모습도 마치 가구를 옮기듯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고 한 마리 춤추는 나비처럼 언어 속을 누볐다. 내면에 쌓이는 단어들이 계속해서 그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가는데도 외부에서는 누구도 그 차이를 감지할 수 없었다. P68

 

 

🔖 옥희에 비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정호는 절대로 비굴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결코 자신의 상황을 탓하거나 과거를 후회하지 않았다. 마치 텅 빈 그릇 같았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 정호가 가진 지식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그의 정신은 어떤 방향으로든 자유롭게 흘렀으며 제 스스로 고통을 키워내는 법이 없었다. 그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든, 옥희는 그가 장독 같은 마음 안에 깊이 묻어준 것을 꿋꿋이 지켜내리라 확신했다. 씨처럼 떨어져 내린 곳에서 멀리 탈출하기는 힘들 테지만, 갇힌 존재가 되기를 스스로 거부했다는 그 단순한 이유만으로 정호는 충분히 행복할 거라고. P163



 

 

🔖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남학생이 손에 들린 커다란 대자보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혼자만의 목소리는 먼 거리 까지 가 닿지 못한 채 도중에 사그라들어야 마땅할 텐데, 싸늘한 주변 공기를 타고 증폭된 듯 도리어 공원 전체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인파로 가득한 광장은 물을 끼얹은 듯 소름 끼치는 침묵에 휩싸였다.

 

“우리는 인류 평등이라는 불가침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그리고 우리의 후세까지 영원토록 자주권과 생존권을 누릴 수 있도록, 전 세계 앞에 이를 선언하려 한다. 이는 인류 양심에 따라 만들어가는 세계적 윤리, 하늘의 법령, 그리고 우리 현대의 정신과도 나란히 발맞추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그 어떤 힘으로도 우리를 가로막을 수 없을 것이다.”

P195



 

 

🔖 인생을 통틀어 아마 두 번은 없을, 말 그대로 천재일우의 순간이었다. 어느덧 한낮이 한참 늘어진 오후 3시, 영구의 개가 햇볕 속에 나른히 눕곤 하던 자리엔 마른 낙엽들만 모래 위에서 바스락대고 있었다. 정호는 무의식적으로 이 모든 풍경을 차곡차곡 마음에 담았다. 과거 자신에게 깊은 굴욕을 안긴 누군가에게 모욕을 대갚음하는 이 행복의 순간을 나중에 실컷 곱씹을 수 있도록 말이다. P441

 

 

🔖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에. P603

 

 

아무런 인정이나 대가를 받지도, 기대지도 않고 오직 조국의 독립에 일조한 나의 할아버지. 그리고 그와 같은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이 책의 시초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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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북스’로부터 도서지원 받았습니다.

옥희에 비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정호는 절대로 비굴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결코 자신의 상황을 탓하거나 과거를 후회하지 않았다. 마치 텅 빈 그릇 같았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 정호가 가진 지식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그의 정신은 어떤 방향으로든 자유롭게 흘렀으며 제 스스로 고통을 키워내는 법이 없었다. 그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든, 옥희는 그가 장독 같은 마음 안에 깊이 묻어준 것을 꿋꿋이 지켜내리라 확신했다. 씨처럼 떨어져 내린 곳에서 멀리 탈출하기는 힘들 테지만, 갇힌 존재가 되기를 스스로 거부했다는 그 단순한 이유만으로 정호는 충분히 행복할 거라고. - P163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남학생이 손에 들린 커다란 대자보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혼자만의 목소리는 먼 거리 까지 가 닿지 못한 채 도중에 사그라들어야 마땅할 텐데, 싸늘한 주변 공기를 타고 증폭된 듯 도리어 공원 전체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인파로 가득한 광장은 물을 끼얹은 듯 소름 끼치는 침묵에 휩싸였다. - P195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에. - P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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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200호 - 2023.여름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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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비평 200호> 2023.여름_스위치_클럽필라멘트

 

『자유인』

- 정용준

 

소설에서는 노인의 안락사에 대한 내용으로 디스토피아적 근미래를 그리고 있다.

불량하고 악독하고 고집스러운 노인. 맞다. 하지만 나는 애쓰고 있다.(P 290)이 구절은 아마도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노인들의 자신이 생각이 옳다는 고집스런 모습을 보는듯했다. 노인의 인생과 성격 등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하고 단편적인 모습만을 보고 우리가 생각하는 방향이 아닌 구시대적 생각이라고 단정 지어버리기 때문에 변화에 부적응하는 모습을 우리는 고집스럽다고 보는 것은 아닐까.

 

노래교실에서 노인들을 애 취급한다는 것을 알고 기분나빠하지만 개그맨의 재미있는 유행어에 웃고 있는 본인의 모습을 노인은 부정하려 노력한다. 본인도 알 수 없는 죽음 이후에 대해 센터와 가족은 노인이 선택할 수 없을 때까지 무기력한 상태로 계속 만든다. 치료가 아닌 진정제를 줌으로. 삶이 희미해지고, 현실과 꿈인지 헷갈려하는 상황을 만들어간다.

 

센터에 거주한 지 일 년이 다 되어 연회장에서는 리본과 풍선이 가득하고 노인은 축하와 인사를 받는데 환영이 아니라 일주일 후에 진행될 안락사에 대한 축하였다. 아기처럼 기저귀를 차거나 원하는 데로 움직이지 못하는 비참함을 남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보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안락사를 선택하는 것으로 종용시키고자 하는데 죽음으로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행위인가에 대해 소설 속 노인은 질문한다. 본인도 이 진창에서 벗어나고프지만 어디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인사를 해주는 너희들이 말하는 영원한 꿈이라는 게 실재하는지 답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안락사를 결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죽기 싫다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감각을 느끼고 생각하고 되새기며 자신의 의지로 기억이 마를 시간을 허용받기를 원했다. 육체의 한계를 소진한 후 자신 스스로가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를 원하는데 사람들은 그 정리하는 시간마저도 돈이 들고 인력이 소요되는 것을 낭비라 표현했다. 죽기 전의 질소 공급으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죽음에 이른다는 것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죽음을 감성적으로 표현한 것이지 노인이 죽기 직전에 카타르시스를 원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노인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싶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날에 죽음으로 향하도록 만들어가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아니라 어쩌면 현실에서도 벌어지고 있을 수도 있고 내가 그 죽음의 선택을 해야 하는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젊은이가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때 앞으로의 삶을 이어가고자하는 노력 없이 삶을 버린 것에 안타까워하고 하지만 육체의 쓸모없음, 추하게 변해버린 모습, 고통의 연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찬란했던 시간들과 대비된다는 이유로 죽음이 되어야한다는 것은 허용해도 되는 일일까. 종교에서 말하는 생을 버리는 행위는 신께 죄를 짓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죽음으로 가는 선택이 노인 자신이 했던 것인지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면 과연 신은 그 죽음을 용서해줄지 궁금하다.

 


 


🔖책 속 밑줄긋기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당신은 이제 고통 없고 슬픔 없는 세계에서 행복할 자격이 있습니다. 더 이상 아픔을 참지 마세요. 자신을 의심하고 회의하는 슬픔에서 벗어나세요. 당신의 존엄을 지키고 안락을 누리십시오.” P293

 

안락사가 허용됐을 때 노인들은 안도했다. 고통의 저주와 치욕이 형벌에서 벗어나 존엄을 지키고 진정한 안락에 이를 수 있다 믿으며 박수쳤고 환영했다. 하지만 몰랐다. 허용이 곧 강제가 되리라는 것을. 모든 사람은 만 85세가 되면 마지막 6개월은 국립요양센터에 입소해야 한다. 센터에서는 삶의 끝을 목격할 수 있다. 광대한 밤이 시작되고 사막 같은 날들이 펼쳐진다. P294

 

ED를 거부했다는 건 86세가 됐다는 뜻이겠죠? 센터에서 퇴소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자유인이 되십니다. 사회의 모든 법과 제도와 규율에서 벗어난 진정한 아나키스트. 선 바깥의 사람이자 울타리를 넘은 영혼입니다. 국가는 그를 존중합니다. 더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법으로 보호하지도 않고 어떤 지원도 하지 않습니다. 건강보험, 연금 혜택, 없습니다. 의료비와 간병비, 응급비와 생명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공공서비스조차 모두 개인의 책임입니다. P299

 

한때는 존엄사 허용을 놓고 사회적 논의가 활발하던 시절이 있었다. 생명과 운명. 신의뜻과 생의 의미를 고민했던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생산성이 떨어지는 노인의 숫자는 점점 많아졌다. 그들을 고치고 살리고 보호하는 일에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데 사회적 합의는 쉽게 이루어졌다. 존엄사는 허용됐다. 그리고 권유됐고 지금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존엄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 이기적이고 눈치 없는 사람이 된다. 삶이 선물이라면 버릴 권리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존엄사의 주요 논리였다. P301

 


 

 

#자유인 #정용준 #창작과비평 #클럽창작과비평 #2023여름 #클러버 #창비 #스위치 #계간 #스위치클럽 #스위치쓰기클럽 #스위치클럽필라멘트 #문학미션

안락사가 허용됐을 때 노인들은 안도했다. 고통의 저주와 치욕이 형벌에서 벗어나 존엄을 지키고 진정한 안락에 이를 수 있다 믿으며 박수쳤고 환영했다. 하지만 몰랐다. 허용이 곧 강제가 되리라는 것을. 모든 사람은 만 85세가 되면 마지막 6개월은 국립요양센터에 입소해야 한다. 센터에서는 삶의 끝을 목격할 수 있다. 광대한 밤이 시작되고 사막 같은 날들이 펼쳐진다. - P294

한때는 존엄사 허용을 놓고 사회적 논의가 활발하던 시절이 있었다. 생명과 운명. 신의뜻과 생의 의미를 고민했던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생산성이 떨어지는 노인의 숫자는 점점 많아졌다. 그들을 고치고 살리고 보호하는 일에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데 사회적 합의는 쉽게 이루어졌다. 존엄사는 허용됐다. 그리고 권유됐고 지금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존엄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 이기적이고 눈치 없는 사람이 된다. 삶이 선물이라면 버릴 권리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존엄사의 주요 논리였다.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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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문학동네 시인선 192
김상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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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문학동네 뭉친(회원)이면 받을 수 있는

'6월의 생일 시時 한편'

북클럽 문학동네 가입을 하면 소소한 감동을 받을 수 있는데요. 그 중 하나가 생일에 시 한편을 받아본다는 거예요. 문학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입하는 북클럽인만큼 선물도 '문학적인 마음'을 담아 한 편의 시時를 선물해줍니다.

6월 생일 시집은 문학동네시인선 192번.

김상혁 시인님의 네번째 시집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예요.

삶이 초래하는 불안과 이별에도 결코 굽히지 않는 위로이자, 사람에 대한 사랑을 쓴 이 시집은 사람의 내면이 가진 다양한 무늬를 있는 그대로 그려냅니다.


 

시집에 수록된 「노크」를 이미지카드로 받았는데요. 늘 읽어도 어려운 시집이지만 이번 시 「노크」는 별 것 없는 일상을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는 나에게 "그래, 그럴 수 있지" 하고 손 내밀어준 뭉클님의 마음이 전달된 것 같아 단어 뜻처럼 제 마음도 뭉클했어요. 아래 뭉클님의 글을 잠시 남겨봅니다.


‘사람 싫어’ 같은 말은 비밀처럼 목 아래 삼키고, 반대로 ‘사람 좋아’ 라는 말은 뻔한 거짓말 같아서 쉬이 뱉지 못합니다. 복잡다단한 세상을 바쁘게 살아내며 부딪히는 사람들, 뉴스가 전해주는 여러 의미로 놀라운 소식들을 접하다보면 마음 속 온기가 스르르 꺼져가는 기분이 들어요.

그럴 때, 다정한 한 사람, 사랑하는 한 존재가 “그래, 그럴 수 있지” “나도 사실 세상 사람이 싫어” 나긋한 한 마디를 전하며, 우울한 마음이 큰일이 되지 않도록 안아주고. 연이어 제가 좋아할 법한 이름들을 읊고, 반려동물과의 산책을 준비하는 식으로, 여전히 제가 무언갈 사랑할 수 있도록 애를 써준다면 말이죠. 그런 ‘다정’이 곁에 있다면 그렇게 또 살아갈 수 있겠다, 하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다정한 사람이 되줄 순 없을까, 가늠해보기도 하고요.

땀에 젖은 손바닥 대신 한 편의 시를 전하며, 살며시 노크하는 마음으로 김은정 님께 안부를 건네보아요.


- 북클럽문학동네 뭉클님의 편지

 

            「노크」

                        - 김상혁

사람 정말 싫다. 내가 이런 말 하면 나의 다정한 사람은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름들 몇 개나 들려주거나

그래, 그럴수 있지, 하고 손잡아준다.

시험에 든다는 말, 교회에서 자주 듣는 말,

가령 싫고 징그러운 것들 커다란 광주리 안에 하염없이 쏟아놓고

그 속 어딘가에 내가 미치는 물건 몇 개 숨겨두는 신의 기호 嗜好 같은 것.

세상 정말 싫다. 이런 말을 하면 나의 다정한 사람은 아까부터

우리만 쳐다보는 강아지에게 가슴줄 걸고 산책을 준비한다.

그리고 줄곧 나를 참아주었다.

얼마큼 사랑해? 하늘땅만큼, 바다와 우주,

우주에 우주를 더한 것만큼······가본 적 없는 곳에 상상도 못한 곳을

덧붙이다보면 감정이 농담 같다.

손잡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보도 모퉁이 돌 때마다

수많은 발이 달린, 우글거리는 마음을 몇 개 밟으면서 걷는 중이었다.

나의 다정한 사람의 손바닥이 땀에 젖어 잠시 놓았다.

사실 나도 세상 사람이 싫어, 가늘어진 사랑의 손가락들이

주머니에 담겨 똑똑 눈물 흘리고 있다.

 

#북클럽문학동네 #생일 #생일시레터 #우리둘에게큰일은일어나지않는다 #김상혁 #시인 #시집 #문학동네시인선192번 #뭉클편지


사람 정말 싫다. 내가 이런 말 하면 나의 다정한 사람은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름들 몇 개나 들려주거나
그래, 그럴수 있지, 하고 손잡아준다.
「노크」
- 김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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