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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러졌지만 파괴되진 않았어 - 아버지폭력에 맞선 스물넷 여성의 내밀하고 치밀한 지적 통찰
김가을 지음 / 천년의상상 / 2022년 3월
평점 :

-----그저 그런 책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버지 폭력이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 발버둥을 친 모습들, 버텨내고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 오랜 시간 폭력 속에 버틴 것에 대한 후회하는 내용들을 읽으면서 평범하지 않은 어릴 적 내 기억들이 떠올랐다. 잘 이겨내고 커주었다는 다독임을 주고 싶기도 하면서 나는 잘 이겨낸게 맞는건지 생각하게 되었다.
스스로가 그 어두운 시간들 속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무엇이 문제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책을 읽었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나 역시 끝없는 어둠으로 내몰릴 때 책을 읽으며 현실에서 벗어나 책의 세계에 빠져듦으로 점차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기에 공감도 많이 되었다.
작가는 읽은 책 중에서 희망을 준 문장들, 당시의 감정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써둔 일기장의 글들을 적은 것도 좋았다. 나는 그 동안의 일기와 책의 기록을 다시 읽었을 때 그 때의 기억들이 우습기도 하고 누가 볼까 버렸는데.. 이렇게 후회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에 이렇게 다른 생각을 가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채 말이다. 지금이라도 일기나 필사한 기록들, 모든 나의 이야기, 글들을 모아두고 싶다. 지금은 부끄러운 글들이라도 훗날 어떤 소재로. 어떤 형태로든 살아날 수 있을 테니까.
손에 잡는 순간부터 책을 덮을 때까지 쉼없이 그 자리에서 다 읽었다. 순식간에 읽혀졌지만 읽으면서 너무 무거웠고 이렇게 쓰기까지 결심한 것도 용기를 낸 것에 응원해주고 싶었다.
책을 읽으면서 무슨 일을 해도 안되고 나만 너무 힘든 것 같은 때 책을 읽으면서 우울과 절망에 빠진 나를 구하려고 노력했고 어둠에 빠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던 그 때를 생각나게 했다. 비록 암흑같았었지만 그냥 묻어두고 모른척하지 않고 지금이라도 내가 알아주고 잘 버텼다고 알아주는 시간이 된 것 같아 좋았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들. 상처받은 시간들을 치유받기 위해 애쓰는 모습들은. 책을 읽으면서 같은 어둠인 사람들에게는 이겨낼 수 있음의 희망을. 지금 행복한 시간인 사람들에게는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추천합니다.
폭력은 어떤 형태로든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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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시작된 폭력은 우리 삶 가장자리부터 스며들어오더니 곧 우리 일상이 됐다. 아빠는 우리가 맞을 짓을 해서 때리는 거라고 자기 행동을 언제나 합리화 했다. ‘맞을 짓’의 정확한 기준 같은 건 없었다. 같은 행동을 해도 어떤 때는 맞았고 어떤 때는 맞지 않았다. 나는 하늘을 향해 우리가 안전한 곳에서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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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충분히 힘든데 힘들다는 사실을 증명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이상했다. 사람들에게 내가 겪은 폭력을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때 느꼈던 고통, 아픔, 슬픔이 이상하게 금세 사라졌다. 전달하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전달할 수 없었다. 내 기억과 감정이 진실한 것과 그 진심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건 다른 일이라고 체념하며 기도했다.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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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냐는 친구 질문에 나는 <해리포터>에서 마법사 주인에게 평생 봉사하며 사는 집요정 같은 사람이었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주인이 자기 옷을 선물해야 자유로워진다.
“<해리포터>에 집요정 나오잖아. 우리 엄마가 꼭 그 집요정 같았어.”
“응, 알지. 도비도 있고.”
“그 영화 보면 주인이 못되게 굴고 무시하고 때리기까지 하는데 주인이라고 따르는 집요정들 엄청 많아.”
“맞아. 어떤 집요정은 주인이 옷까지 주면서 해고하려고 하니까, 그러지 말라고 여기서 일하고 싶다고 애원하잖아.”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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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엄마에게 한 번도 좋은 딸이 되어본 적이 없다. 왜 아빠의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지 못했냐고, 아빠를 떠나지 않았냐고 원망만 했다. 아빠한테는 맞서는 말을 할 용기 하나 없으면서 엄마는 훨씬 쉬운 상대니까 그런 말을 쏟아냈다. 아무 힘도 없는 엄마를 붙들고 날선 말을 내뱉은 적도 있다. P43
??온기는 짧았고 온기를 느낀 짧은 기억은 길고 긴 냉기 속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힘없는 마음이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가. 나는 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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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가호위. 여우가 호랑이 위세를 빌려 호기를 부린다는 뜻을 가진 사자성어다. 삼남매 중 장녀는 나는 자연스럽게 아빠가 없는 곳에서 아빠 자리를 대신했다. 어린 나는 아빠가 없을 때 종종 동생들을 때렸다. 아빠는 자기나 엄마가 없을 때는 내가 대장이니까 동생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했고 그 말은 내 폭력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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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빠의 폭력이 체화된 것도 모르고 동생들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폭력으로 해결하려고 들었다. 폭력의 굴레를 돌고 돌았다. 이 악순환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또 얼마나 촘촘하게 얽혀 있는지 웬만한 선한 마음이 이 악순환 속에 들어와서 끊어보려고 해도 다 튕겨져 나갔다.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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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미덕을 가르치는 이유는 사실 사람 마음에 자연스럽게 피어나기 쉬운 것이 미덕보다 악덕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상세계를 찾는 이유는 현실세계가 지옥 같아서가 아닐까, 선하고 도덕적이며 강직한 사람을 보고 놀라며 반기는 이유는 사실 현실에서 그런 사람이 매우 드물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내가 살고 싶은 세상 사이 거리가 너무도 멀었다. 나도 이상적인 세상에 살 수 있기를 바랐다.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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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지 않고 있어도 언제든 맞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을 살기는 했다. 매일매일 전쟁을 대비하는 사람처럼 불안했다. 삶의 중심에서 나는 자꾸 밀려나고 아빠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우리는 폭력 앞에서 스스로 삶을 이끌어갈 주체성을 상실한 채 무기력해져만 갔다.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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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야 할 일처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니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일처럼 아무도 모르는 것도 이상했다. 손에서 놓쳐버린 풍선이 멀리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며 슬퍼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은 채 곧바로 땅을 보고 걷는 껍데기만 남은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죄책감과 화가 날 때면 일기에 그 생각을 풀어 썼다.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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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글은 내가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는 만큼의 시간을 충분히 준다. 강압적이지도 않고 느슨하지도 않게 나 스스로가 생각해서 답을 찾도록 돕는다. 그래서 나는 언어로 인식하는 세계가 좋다. 읽는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답이 나오는 건 아니다. 현실은 글의 세계보다 아주 무서운 곳이니까. 그래도 글이 보여주는 세계를 모르는 것보다는 훨씬 좋다.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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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우리 집처럼,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잘 보이지 않는 곳. 눈에 보이는 세계에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달았다.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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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기록하기 전까지는 내게 이런 질문들만 던지고 있었다. 잊고 싶다고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잊고 싶지 않다고 해서 잊히지 않는 것이 아닌 종류의 일이 있다. 어떤 일은 사람 마음에 남아 오랫동안 그 사람을 붙잡는데 잊지도 잊지 않지도 못한 그 중간 상태에서 나는 오랜 시간 머물렀던 것 같다. 내 안의 어린아이, 상처받은 기억을 지금 여기까지 질질 끌고 왔다.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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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기록하기 전까지는 내게 이런 질문들만 던지고 있었다. 잊고 싶다고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잊고 싶지 않다고 해서 잊히지 않는 것이 아닌 종류의 일이 있다. 어떤 일은 사람 마음에 남아 오랫동안 그 사람을 붙잡는데 잊지도 잊지 않지도 못한 그 중간 상태에서 나는 오랜 시간 머물렀던 것 같다. 내 안의 어린아이, 상처받은 기억을 지금 여기까지 질질 끌고 왔다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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