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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에서 보낸 1460일 - 사상 최악의 전쟁, 제1차 세계대전의 실상
존 엘리스 지음, 정병선 옮김 / 마티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뭐라고?! 트렌치 코트 까지 마라 트렌치 코트는 소중하다능!
...이 아니라.....
이 책은 1차 세계대전 중 전방의 참호 속에 내몰려 전쟁을 수행하였던 일개 병사들의 일상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는 책입니다. 트렌치코트는 이러한 참호전의 아이템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요즘 사람들이 트렌치코트를 보면서 느끼는 모에낭만과 참호전의 참혹함은 동떨어졌다고 어필하고 싶어서 저자(인지 역자인지)는 저런 부제를 단 것 같군요.
요즘은 그래도 옛날만큼 관심은 덜하지만 진냥은 '극한 상황'이라는 시츄에이션에 상당히 흥미를 느낍니다. 표류하는 난파선, 무인도, 고산준봉에 추락한 비행기, 강제수용소 등등. 그런 상황에 처하면 당한 사람의 인격은 도저히 이전처럼 있을 수 없지요. 때로는 완전히 짐승이 될 때도 있는 한편 성인이 태어나기도 하는 장소.
그런 극한 상황 중의 하나는 단연 전쟁터일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1차 세계대전은.... 포탄이 쾅쾅 터지고 전차가 굴러다니며 전투기가 날아다니는, 어떤 의미 현대전으로서의 전쟁이 자리잡게 된 장소이지요. 그런 곳에서 병사들이 무슨 일을 당했으며 무엇을 느꼈는가 하는 것은, 전쟁을 모르는- 아니, 전쟁을 모르기에 더욱 우리들이 알아야 할 세계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읽을 가치가 있는 이 책. 풍부한 사진과 기록을 활용하여, 당시 참호에서 고통을 견디며 생사를 걸고 있었던 병사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불결하고 끔찍한 참호 속의 환경, 참호족을 비롯한 온갖 질병, 독가스로 인한 고통스러운 죽음, 높으신 분들에게는 무의미한 명령에 불과하지만 병사들 당사자에게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던 전선.
그리고 그런 괴로움 속에서도 소소한 즐거움을 찾으며 어떤 숭고함마저 느껴지는 의지로 하루하루를 보냈던 병사들의 면면도 이채로웠습니다. [빨간머리 앤]의 이야기입니다만, 만약 젬 블라이스가 유럽에서 겪고 있는 일을 알았다면 캐나다의 앤과 그 가족들은 혀를 깨물고 죽느니망정 젬을 전쟁터로 보내진 않았겠지요. 하지만 그걸 알았기 때문일까요- 참호 속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편지에 거의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물론 검열이라는 제도적인 장벽도 버젓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있었다고 해도 먼 곳의 가족들에게 괴로움을 짊어지게 하지 않으려는 병사들의 노력은 애처로울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본국의 사람들에게 참호 안의 '청결하고 유쾌한 생활'을 선전하는 이른바 높으신 분들의 수작이 얼마나 저열한지도 절감하였습니다.
또 참호와 참호, 철조망에 둘러싸여 포탄을 사정없이 때려박는 공간을 사이에 두고도, 살인마나 흡혈귀에 비유하는 적국의 병사들과 대치하고도... 때로는 그들 사이에서 기묘한 인간애가 싹트는 것도 기묘했습니다. 어느 크리스마스에는 축구 경기까지 했다지요. 증오하기 위해서 왔으면서, 죽이기 위해 서로 대치하고 있으면서....
요즘은 군대도 전쟁무기도 첨단화를 달리고 있다지만,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병사들의 생활은 저 시절과 전혀 다를 바 없이 비참할 것입니다. 우선 생사가 내걸릴 뿐더러 적군이 이쪽의 편의를 봐주면서 공격할 리는 없으니까요. 삶과 죽음이 나란히 진창 속에 내버려지는 슬픔.... 그런 슬픔을 끝없이 반복하는 어리석음과 증오와 싸우기 위해서, 우리는 이 책을 곱씹지 않으면 안될지도 모릅니다.
근데 트렌치 코트는 그래도 모에라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