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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대서사시 게세르 칸
유원수 옮김 / 사계절 / 2007년 5월
평점 :
[게세르 칸]은 몽골의 서사시입니다. 처음에는 티벳에서 전래하였다가 광활한 몽골땅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승되면서 몽골의 향취를 듬뿍 머금게 되었다던가요. 몽골 국립중앙도서관에서 17세기 목판으로 소장하고 있는 이런 마이너한 물건을 번역 출간해주신 옮긴이와 출판사에게 건배(.....)
처음에는 티벳 사람들, 이어 몽골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온 이 작품에는 두 나라의 독특한 정서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우선 그 뿌리를 라마교에 두고 있지요. 서사시의 시작은 석가모니 부처가 코르모스타 텡그리(제석천)에게 텡그리의 아들 중 하나를 사바에 내려보내 칸의 자리에 올라 중생을 구제하도록 부탁하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코르모스타 텡그리의 세 아들 중 첫째와 둘째는 '명색이 텡그리의 아들인데 내려갔다 아차해서 칸이 못 되면 개쪽 ㄴㄴ'하고 빼고, 셋째 아들이 그 대임을 맡아 사바에 내려와 게세르 칸이 됩니다.
신화란 것은 예로부터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세계관, 그들이 나름대로 생각했던 자연의 순리 등을 표현합니다. 제가 신화를 잔뜩 읽으면서 또 한 가지 즐기는 것은, 신화나 전설, 민담은 그것이 만들어진 시기에 사람들이 아름답고 좋다고 느꼈던 것(소위 말하는.. 모에?!), 더럽고 나쁘다고 느꼈던 것들을 비추어준다는 것입니다. 셋째 아들이 하강하면서 코르모스타 텡그리에게 요구했던 보배들은 이 서사시가 쓰여질 무렵 몽골인들이 무엇을 귀중하게 여겼는지 가르쳐줍니다. 터키석 오늬가 붙은 화살, 각궁, 순수한 무쇠칼, 황금 올가미와.... 무엇보다도 영험한 말.
만약 요즘 한국에서 서사시가 쓰여진다면 I7CPU컴퓨터와 23인치 LCD모니터나 샤넬 향수, 구찌 지갑, 디오르 핸드백 같은 것이 등장하겠죠? ...그런 서사시 안 써.
게세르 칸의 캐릭터도 재미있습니다. 우선 처음에 파파인 코르모스타 텡그리가 가라고 할 때 제꺽 가기는커녕 이런저런 소리를 늘어놓다가 온갖 보물과 잘난 형과 여신인 세 누이 등의 빽을 달라고 조릅니다. 그리고 '이거 잘하고 돌아오면 아버지 후계자는 나 ㅋㅋ' ...어이, 어이!
지상에 태어난 게세르 칸은 처음에는 무서운 용모와 바보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어 사바의 부모에게서 구박을 받습니다. 그러나 되로 주면 말로 받아치는 우리의 게세르(...) 신통력을 가지고 부모를 놀려대거나 이복형제와 그 어머니를 관광태우는 일은 예사도 아닙니다(......) 다행이랄지 숙부 초통이 게세르와 그 부모가 꼴보기 싫어 온갖 구박을 일삼자, 게세르의 화살도 그에게로 돌아갑니다만.
코흘리개 조로라는 이름으로 성장한 게세르 칸은 최고의 미녀로 자신과 결혼할 남자에게 무수한 시험을 내리는 로그모 고와에게 눈독을 들입니다. 로그모 고와와 초통은 신통력을 써서 척척 시험을 통과하는 조로를 이런저런 구실로 떨궈내려고 하지만, 떨궈진다고 떨어질 게세르가 아닙지요(....) 게세르가 거룩한 본모습을 드러내자 로그모 고와도 납득하고 결혼하지만, 게세르가 사방세계를 평정하러 다니는 동안 나쁜 마음을 먹습니다. 초통과 더불어 거의 최종보스 레벨. 하지만 게세르를 배신때리고 뒤치기한 두 사람에게 게세르가 내린 형벌은..
로그모에게는 '한 팔 한 다리를 부러뜨려 팔순의 양치기 노인에게 아내로 줌'
숙부 초통에게는 '영험한 조류말이 아홉 번 삼켰다 아홉 번 싸게(...) 함'
이밖에도 시방 세계의 열 가지 해악을 근절시킨 자비롭고 거룩하며 어지신 게세르 카간께서는 열 가지 해악을 근절시킨 만큼이나 저지른 일도 많습니다.
.....사바의 중생들을 구제하러 오신 분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전 도저히 제임스 롤프 씨의 표현을 빌지 않을 수 없군요.
마귀같은 새끼....
...이런 게세르를 어지간해서 말릴 인물은 없지만, 다행히 영험한 조류말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보석은 여자의 꾸미개이고 좋은 말은 남자의 꾸미개'라고 부를 정도로 말을 사랑하는 몽골의 서사시답게 활약이 굉장하지요. 게세르가 빌빌거릴 때 게세르를 격려하고, 바보짓을 하면 따끔하게 일침을 넣기도 합니다. 그래도 자기 숙부를 아홉 번 먹으라고 하는데 싫다고 말은 해보지 그랬어....(말이 말을 어떻게 하냐고 말씀하시겠지만, 영험한 조류말은 말을 합니다! 영험하니까요!)
어쨌든 이야기로서도 충분히 재미있고, 몽골문학의 풍부한 표현을 잘 살려주신 옮긴이 덕분에 저의 마이너한 몽골 덕심이 풍요로워진 작품이었습니다. 자 여러분도 마이너의 길로!(안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