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77
난 기차를 타는 걸 좋아한다. 특히 밤에 기차를 타면 불이 켜져 있는 데다가, 창문은 칠흑처럼 깜깜하고, 판매원이 통로를 지나가면서 커피나 샌드위치, 잡지 같은 것을 팔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햄샌드위치와 잡지를 네 권 샀다. 밤 기차를 타고갈 때면, 이따위 잡지에 실린 지겨운 기사들도 그럭저럭 읽을만하다.  ... 평상시 같으면 밤 기차를 타고 가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도 읽을 만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전혀 그러고 싶은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2. 146
아버지는 부자다.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는 자세히 모르겠다. 아버지가 그런 일을 내게 말해 주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난 그 액수가 상당하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아버지는 어떤 회사의 고문 변호사이다. 변호사들이란 돈을 엄청나게 끌어 모으기 마련이다.

3. 153
두 사람이 떠나자, 난 겨우 10달러밖에 기부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샐리 헤이즈와 공연을 보기로 했기 때문에 표를 살 돈은 남아 있어야 했다. 그렇긴 했지만, 여전히 후회되었다. 망할 놈의 돈 같으니라구. 돈이란 언제나 끝에 가서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어버린다.

4. 177
이런저런 생각에 몰두하다가 손을 내밀어 샐리의 손을 잡았다.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농담하는 거 아니야. 한 180달러쯤 저축해 놓은 돈이 있어.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 은행문 여는 대로 돈을 찾아다가, 그 친구한테 가서 차를 빌리는 거야. 농담이 아니고 정말이야. 오두막집 같은 데서 돈이 떨어질때까지 지내다가, 돈이 다 떨어지면, 내가 일자리를 구하는 거지. 그러고는 냇물 같은 게 흐르는 곳에서 사는 거야. 그러다 보면 나중에 결혼 같은 것도 할 수 있을 테지. 겨울이면 내가 장작도 베어오고, 둘이서 그렇게 사는 거야. 정말 끝내주는 생활이 될 거야. 어떻게 생각해? 같이 가자. 네 생각을 말해 봐! 같이 가는 거지?"

5. 204
결국 라디에이터에서 내려와 바에 있는 옷 보관소로 갔다. 가면서 계속 울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계속 울었다. 지독하게 외롭고, 우울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6. 205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뉴욕에서 살았다. 센트럴 파크 공원은 내 손바닥처럼 훤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곳에서 롤러 스케이트나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밤에는 그 조그만 연못을 찾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곳이 어디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공원이 남쪽에 있다는거 말이다. 하지만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많이 취해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계속해서 걸었다. 앞으로 걸어가면 갈수록 주위는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만 같았고, 스산함이 더해졌다.

7. 229
홀든 콜필드가 동생 피비와 대화..
로버트 번스가 쓴 시 '호밀밭은 걸어오는 누군가와 만난다면'을 얘기하며..
내가 되고 싶은건......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8. 247,248.249

선생님은 다시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금 네가 떨어지고 있는 타락은, 일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좀 특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정말 무서운 거라고 할 수 있어. 사람이 타락할 때는 본인이 느끼지도 못할 수도 있고, 자신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거야. 끝도 없이 계속해서 타락하게 되는 거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환경이 줄 수 없는 어떤 것을 찾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네가 그런 경우에 속하는 거지.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속한 환경에서 찾을 수 없다고 그냥 생각해 버리는거야. 그러고는 단념하지. 실제로 찾으려는 노력도 해보지 않고, 그냥 단념해 버리는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니?"

"빌헬름 스테켈이라는 정신분석 학자가 쓴 글이다. 여기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어.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일단 그 빈슨 선생과 그 비슷한 선생들 과목에서 합격을 하고 나면, 그런 지식들에 진정으로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될 거다. 물론 네가 원하고,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경우에만 말이지만. 먼저 인간들의 행위에 대해 놀라고, 당황하고, 좌절한 인간이 네가 첫번째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거야. 그런 점에서 보면 넌 혼자가 아닌 거지. 그걸 깨닫게 되면 넌 흥분하게 될 거고, 자극받게 될 거야. 현재 네가 겪고 있는 것처럼, 윤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민했던 사람은 수없이 많아. 다행히 몇몇 사람들은 기록을 남기기도 했지.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거야."
...
<< JS에게 모해짐이 해주고 싶은 말 >>
"교육받고 학식이 높은 사람만이 세상에 가치있는 공헌을 한다는 건 아니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교육을 받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 재능과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면, 불행히도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그냥 재능 있고, 창조력이 있는 사람보다는 훨씬 가치 있는 기록을 남기기 쉽다는 거지. 불행히도 이런 사람들은 많지 않아. 이들은 보다 분명하게 의견을 이야기하고, 자신들의 생각을 끝까지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 거기에 가장 중요한 건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학식이 없는 사상가들보다 겸손하다는 걸 들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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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
사상적인 면에서는 보수적인 귀족주의와 급진적 변혁사상이 공존하고 있었는데, 이 같은 불균형이 오히려 격렬한 토론을 불러일으켜 천재적인 사상가와 예술가들을 키워낼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지그문트프로이트, 아돌프 로스, 구스타프 말러,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등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석학들, 예술가들과 함께 19세기 말 빈에서 활동했다.

2. 74
우리를 내려다보는 여인, 건강의 여신이라기보다 에로틱한 복수의 여신처럼 보이는 히게이아가 있다. 우뚝 서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 때문일까. 여신이 그림속에서 거대하게 솟아오르는 느낌이다. 그녀를 히게이아로 보는 징표는 뱀과 접시(컵)이다. 원래 히게이아는 뱀인데 여성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그녀는 뱀에게 접시에 담긴 물을 먹이고 있는데, 이것은 레테의 강물이다. 그런데 레테의 강은 죽은 자가 죽음의 세계로 들어서기 전에 마시는 물, 망각의 강물이 아니던가.

3. 81
오스트리아는 미술보다는 음악이 더 유명한 나라이다. 특히 빈은 슈베르트, 왈츠의 왕자 요한 슈트라우스, 말러 등이 활동했던 도시이다. 클림트는 이런 환경 아래서 음악을 소재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4. 110
1918년 2월 6일 클림트가 사망했을 때, 실레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스케치로 남겼고, 잡시 '새벽'에 "구스타프 클림트,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예술가였고, 보기 드문 심오함을 갖춘 사람이었으며, 그의 작품은 신성한 전당과도 같다"는 글로 그를 추모했다.

5. 184,187
해바라기는 그 모양이 태양을 닮아서 태양의 꽃 혹은 황금꽃으로 불리며 해를 따라 도는 꽃으로 여겨졌다. 태양의 신 아폴론을 연모했지만, 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처녀의 화신이라는 전설도 그래서 생겼을 것이다.
...
클림트의 <해바라기>는 태양의 신 아폴론을 연모했던 처녀보다는 아폴론의 구혼을 거절하고 피해 다니다 월계수로 변한 다프네에 가깝다. 초상화 속 여인들은 마치 화초나 나무처럼 그렸던 클림트이니 해바라기를 여인처럼 그려놓았다한들 이상할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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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경영/한국수필) ♣CEO 안철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
⊙ 유명한 저자의 경영,IT,성공에 대한 생각들
⊙ 저자같이 믿음직한 CEO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한다면,
내가 저자처럼 성실한 직장인이 된다면, 참 이상적이겠다
⊙ 조금은 뻔한 이야기일수 있지만 그래도 읽고나면 괜히 마음이 깨끗해지는 느낌

12. (비평/한국수필)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
⊙ 사람의 마음을 끄는 언어를 구사하는 평론가
⊙ 이 저자가 시나 소설을 쓰면 참 멋들어질듯
⊙ 나는 행여 비평을 읽더라도 읽은 책에 대한 것만 읽는데
대부분 읽지 않은 한국소설의 평론이라 공감 안가는 부분 많음
⊙ 일하기 위해 책을 읽는것. 행복할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음

13. (일본/프랑스소설) ♣두려움과 떨림♣ ★★★★☆
⊙ 일본회사에서 주인공 아멜리가 겪는 일들
⊙ 회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실수투성이 아멜리는 분명 약자인데 어쩐지 당당하다
⊙ 아멜리 노통의 이 소설에는 뭔가 통쾌한 유머가 있다

14. (인사/한국수필) ♣내 일을 향해 쏴라!♣ ★★★☆☆
⊙ 취업준비생들에게 입사를 위한 조언을 주는 책
⊙ 아는 내용들이지만 기본적인 내용이 될만한

15. (직장/한국수필) ♣공주를 키워주는 회사는 없다♣ ★★★☆☆ 
정리중

 

 

 

 

16. (미술/뉴욕수필) ♣뉴요커♣ ★★★★☆
⊙ 뉴욕에 살고 있는 화가의 생활, 그림 이야기
⊙ 뉴욕이 사무치게 그리워서, 가본적 없는 그 곳이 자꾸 눈에 밟혀서,
이 책으로 살짝 그리움 달래 보았는데 괜찮은 방법이다

17. (독서/일본수필) ♣소년의 눈물♣ ★★★★☆
⊙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독서, 성장과정에 대한 글
⊙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애틋한 느낌을 받게 된다
재일조선인으로 자랐다는 그의 성장과정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책의 표지에 그려진 소년과 닮은것 같다
⊙ 어쩐지 포근한 책

18. (미술/한국수필) ♣클림트, 황금빛 유혹♣ ★★★★★
⊙ 화사하고 신비한 클림트의 그림은 정말 매혹적이므로 별 다섯개
⊙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키스>로 클림트를 알게 되었는데
클림트의 그림 속에 담긴 내가 모르는 해석들이 흥겹다

19. (문학/미국소설)♣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 ★★★☆☆
⊙ 매사 불만투성이의 퇴학후 며칠간의 이야기
⊙ 주인공 홀든 콜필드

20. (SF / 미국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 ★★★★★
⊙ 경이로운 책
⊙ 숨 안쉬고 읽게 되는 책
⊙ 똑똑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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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2-26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 13, 18 저두 읽었어요. 호밀밭의 파수꾼은 다른 판본으루요. 제가 읽은 책을 읽으시다니 반가워서요...

진진 2005-02-26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왓..3권이나 겹치다니..반가워서요..ㅋㅋ..20번도 참 잼있어요..흥미진진하고..
 

 

 

 

 

1. (유머/한국소설) ♣대통령과 기생충♣ ★★★☆☆
⊙ 지은이 서민씨는 진짜 의사로 기생충을 연구하고 있음
⊙ 기생충을 주제로 한 유머러스한 소설
⊙ 읽는내내 찜찜하지만 기생충과 인간의 원초적임에 킥킥댐

2. (기획/한국경영) ♣기획천재가 된 홍대리♣ ★★★★☆
⊙ 회사에서 기획팀에 있는 홍대리가 겪는 일들
⊙ 페이지수가 많지 않아 설렁설렁 읽게 되지만
설렁을 가장한 글에 핵심을 콕콕 담아, 탐스런 먹이를 던져줌
⊙ 간혹 보이는 그림들이 깜찍해, 미소를 머금게 함

3. (독서/한국수필) ♣탐서주의자의 책♣ ★★★★☆
⊙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솔깃할만한 책에 대한 책
⊙ 좋은 인용글이 많아 밑줄긋는 재미가 있음

4. (유머/독일소설)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
⊙ 맘껏 웃어보려 샀는데 독일식 유머는 아직 어색해서 킥킥거리지 못함
⊙ 허나 인기 많고 평도 좋은 책

5. (성장/한국수필) ♣청춘의 문장들♣ ★★★★☆
⊙ 유명한 저자가 자신의 청춘시절의 생각들을 꺼내 쓴 글
⊙ 문장 하나하나가 부드럽고 곱다
⊙ 썰렁한 유머 귀엽게 보여짐..

 

 

 

 

6. (출판/한국수필) ♣편집자 분투기♣ ★★★★☆
⊙ 편집자 정은숙님이 오랫동안의 일적 경험을 정리해 쓴 글
⊙ 유명한 편집자답게 깔끔하고 이성적으로 엮은 책
⊙ 인용글의 구분이 모호함(어디가 저자글인지 어디가 인용글인지)

7. (독서/미국동화) ♣도서관♣ ★★★★☆ 
⊙ 책을 사랑하는 한 여자아이에 대한 동화

8. (사랑/영국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 남녀의 사랑이 시작되어 끝나기까지 남자의 세세한 감정변화를 그려낸 사랑에 관한 책
⊙ 일반적인 사랑에 관해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는 마법같은 책
⊙ 문단마다 번호를 매기는 특이한 형식(긴 음식을 먹기좋게 한입크기로 잘라주는것 같아 좋다)

9. (가족/미국소설) ♣달의궁전♣ ★★★★☆
⊙ 한 청년의 젊은 시절과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
⊙ 책의 두께를 보고 순간 '헉' 했는데, 어느새 마지막 장을 펼쳐 들고 있었다
⊙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을 읽었다'라기보다는 '이 책에 빨려 들어갔다'라는 표현이 맞을것 같다
⊙ 후반부에 스르르 열리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들
⊙ 마르코 스탠리 포그(M.S.), 키티 우, 토머스 에핑, 솔로몬 바버

10. (독서/일본수필)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 일본에서 유명한 저자의 '책'에 대한 이야기
⊙ 이 저자 책을 참 좋아하고 끝도 없이 읽는구나
⊙ 저자의 실제 서가인 '고양이빌딩'에 한번 가보고 싶다
⊙ 그 곳에서는 진짜 책냄새가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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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강석경 외 지음 / 열화당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일흔한 명의 이야기가 있다. 나는 처음에 몇 편 몇 편 자꾸 끊어 읽으며 다른 책처럼 단숨에 읽지를 못하였다. 얼마나 재미나는지, 내 귀에 대고 소곤소곤 가려운 곳을 얼마나 잘도 긁어대는지 당장이라도 책 속에 빨려 들어갈것 같았다. 그럼에도 자꾸 방에서 기어나와 다른 일을 하고, 또 방으로 기어들어가 펼쳐보기를 반복하였다. 이 책은 너무 단단했다. 평범한 내 귀에도 익숙한 저자들이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종이 한두장에 넣었으니 얼마나 고심하고 썼을까. 하얗게 새벽이 밝아오는 가운데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왜’라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고, 뒤에서 덥썩 귀신이라도 나올것 같은 거뭇한 밤에 스탠드불 하나 켜두고 커피를 들이켰을 것이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설가가 되고 나서도 처음으로, 일기장에 그렇게 썼다. '나는 작가 공지영이다. 그래서 고맙다, 지영아'라고."

소설가 공지영이 쓴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초등학교 일기장에서 굉장히 잘 어울릴만한 저 문구가 얼마나 치열한 글쓰기 후에나 다다를수 있는 높다란 경지인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내가 만약 '나는 작가 모해짐이다. 그래서 고맙다, 해짐아'라고 일기장에 써놓고는 코골며 흠냐흠냐 자고 있다면. 몰래 일기장을 훔쳐보던 나의 어머니 쿠쿡하고 끄응 웃으시고는 살포시 일기장을 내려놓으셨을 것이다. 내가 하면 비웃음, 진짜 작가가 하면 인정. 뭐 이런거. 그래서 저 문장은 부럽고도 드높고도 아름다운 것일지 모른다.


그런 ‘작가’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인생 마지막에 가서도 마무리짓지 못할 '문학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읊었다면 그 글 하나로도 내 정신을 쏙 빼놓을 카페인 한 컵일진대, 몇십개라면 내가 ‘냠냠’하고 한번에 후다닥 해치울만한 책은 아닌 것이다.


설이어서 알라딘도 쉰다기에 더불어 내 책구매욕까지 쉴리는 만무했기에 사야할 책목록을 정해서 세종문고로 갔다. 처음에는 뒷짐을 지고 유유히 그곳을 거닐며 ‘오호! 이런 책도?’ ‘오호라, 이 책 참’ ‘어허 무슨 책이 이리 두꺼워’라며 거드름을 피워댔고. 신간의 표지들을 보며 책을 홀짝홀짝 들춰보는 것도 지루해질 무렵. 그러니까 서점에 들어선지 20분, 30분이 지나도 내 목록중의 단 한권도 보이지 않게 되자 콧등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냥 눈에 보이는 책 중 흥미로운 것을 사면 되지 않느냐 하겠지만 그건 아니었단 말이다. 솔직히 사고 싶은 책이 아-주 많았기에 서점에 가기에 앞서 나는 일단 사고 싶은 책을 죽 적었다. 그리고 온라인과 오프라인 서점의 차액을 계산했다. 마지막으로 그나마 차액이 적은 목록 중에서 몇권을 골라간 것이기에(손해를 최소화하려는 무서운 본능). 참도 치열하게, 사실 퍽도 할일 없어, 나름대로 머리 굴린 노력을 없었던 것으로 돌릴수는 없었다.


콧등에 땀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나는 보물섬에서 보물찾기를 그만 포기하고 점원 몇명에게 내 목록을 하나씩 보여줬다. 신간인데도 어디 깊숙이 박혀 있어 단번에 찾지 못하는 책, 구간인데도 한번에 꺼내오는 책, 제목이 길어 말하기 민망했던 책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이 책은 없다고 했다. 핫. 아니 이런 대형서점에 이제 갓 나온 따끈한 신간이 없어? 뜨악해질 수밖에 없었고. 차분하고도 교양 있는(?) 나지만 “정말요? 정말 없어요? 이상하네.”라며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저기... 노란 표지 있잖아요. 노란 표지인데. 신간인데 없을리가요.” 나는 이 책과 아무런 친분관계도 없는데 왠지 모를 아쉬움에 자꾸 중얼거렸다. 그 점원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고민을 하더니 몇백권의 책이 꽂힌 책장 제일 아래 천사같은 하얀 문을 열더니 뭔가를 꺼내준다. 노-란. 얇은 비닐까지 씌워져 있다. 처음이다. 이런 느낌. 하. --; 아니아니. 참 힘겨운 책찾기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노란 보물을 찾기 위한 여정이 아니었나 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해본다. 누가 보면 내가 무슨 책에 목숨건 사람 같겠지만 사실 내가 읽은 책이 있어? 가진 책이 많아? 다 그 목록을 적은 종이쪼가리에 ‘직’하고 샀다는 빨간줄을 긋기 위함이었으리라. ^^V 결국 오프라인 서점은 참으로 비싸서, 할인되었을 것을 감안하면 책 4권에 내 돈 1만원은 거뜬히 먹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돈이면 책을 또 한권 살수 있었는데’ 라며 가슴을 딱한번 쓸어내려야 했다.


그리하여 일흔한 명의 문학하는 이유, 즉 존재의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가까스로 듣게 되었다. 어느 책보다 진솔하고 애절하다. 붉은 영혼들이 제각각의 색깔로 어우러져 한껏 넘실댄다.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고민하고 쓴 글이라 한자도 버릴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어여쁜 사연과 값진 이야기로 치장하여 그들끼리 한껏 춤사위를 벌이며 나에게 손짓한다. ‘이리로 와. 여기엔 하늘처럼 무한한, 바다처럼 깊은 세상이 있어. 이리와봐. 이리와.’ 그 춤이 어찌나 매혹적인지 나는 어느새 몸을 살짝살짝 흔들어보며 그곳에 다가서는데 '퍽'하고 단단한 유리문에 코부터 박고서 아프기만 하다. 그 곳은 ‘작가’들의 세상인 것이다. 오랜 습작의 고통 끝에 비로소 별빛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그들이 참 부럽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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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2-25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립금을 휩쓰시는 모해짐님, 아니 어쩌려고 또 이런 멋진 리뷰를 썼단 말인가요? 이달의 우수작으론 양에 안찬단 말입니까.............

진진 2005-02-25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아니 어쩌려고 또 이런 기분좋은 댓글을 썼단 말인가요? 유일한 댓글자론 양에 안찬단 말입니까..............

로드무비 2005-03-01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저런 류의 글 모아놓은 것을 읽으면 현기증이 나던데요?
문학, 목매달아도 죽을 나무니 어쩌구 해쌓으면서.....
그런데 이 책은 빌려서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모해짐님의 리뷰 덕분에......^^

진진 2005-03-02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기증 납니다. 글이 다들 진해서..저는 한번에 읽지 못하겠던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