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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믿을 것인가 - 시대의 지성 김형석 교수가 전하는 올바른 신앙의 길
김형석 지음 / 이와우 / 2016년 4월
평점 :
품절


추천 권유도 9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개인적으로 느꼈던 종교적 갈등과 생활 자세에 대한 의구심 및

해묵었던 나만이 갖고 있던 종교적 의혹을 확실히 제거해 준 작품이었다

 

교회를 다니며 아니 하나님을 믿으며 교회와 교인들이 벌이는 각종 말도 안 되는 행동

말투를 듣고, 보면서 나에게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러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크게 들었고, 진정 그들은 신도들을

하나님 곁으로 모이라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그냥 단순한 헌금 기계로 보는

것인지 정말 힘들었던 시기가 많았다.

그러면서 교회와 신앙생활 속에 마주하게 되는 나만의 대표적 의구심 10가지가 있었다.

  1) 십일조는 꼭 해야 하며 보는 사람도 없는데 조금 적게 내면 안 되는가?

  2) 교회오는 것도 내가 백 번 양보한 것인데 왜 자꾸 교회에서의 봉사를 강요하나?

  3) ‘방언을 못하면 진실한 교인이 아닌가?

  4) 예배는 반드시 내가 다니는 교회에 와서 해야만 하는가?

  5)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죽은 사람들은 정녕 천국에 못 가는가?

  6) 바쁘거나 휴가를 갔을 때 다른 교회나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 안 되나?

  7) 주일, 수요, 금요 철야 예배 등 모든 예배에 참여해야 진정한 교인인가?

  8) 회개하면 하나님이 다 용서해 준다는 데 꼭 지금부터 교회에 다닐 필요가 있는가?

  9) 교회 종사자들도 헌금 횡령, 사기 등으로 개판인데 거기서 뭘 배울게 있겠는가?

10) 진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려움 속에 있는 신도들을 그냥 방치하겠는가?

등과 같이 교회에 처음나오는 사람이나 비교인들이라면 누구나 제기할 수 있는 문제를

나는 이 작품을 통해 완전히 해소했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으며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어떤 명답을 이야기해도 웃기시네라는

답변만이 나올 뿐 절대적으로 명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어쨌든 나는 작품을 통해 각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구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일반인들 즉, 비기독교인들이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거북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생뚱맞게 알지도 만나 보지도 못 한 분에게 드리는 십일조 헌금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 역시 결혼과 동시에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에 모태 신앙에 가까운 와이프와

헌금 문제로 상당한 다툼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에서 우연히 접하게 된 십일조의 이야기가 나를 흔들어 놓았는데

가장 크게 나의 심중을 흔들어 놓은 대목은 바로 구약 신명기 2612말씀이었다.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라는 대목이었다.

이 구절 중에서 가장 크게 와서 닿은 단어는 고아과부였다.

나는 여기서 십일조 헌금이 정말로 어렵고, 힘들고 지친 사람들로 대변되는 고아

과부를 위해 사용하시겠다는 내용을 읽고는 십일조 헌금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나는 교회에 다니며 십일조와는 상관없이 평소에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약간의 도움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잘 살거나 잘 났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다니는 교회에는 정말로 어려운 이웃들이 너무도 많다. 간혹 기도를 드리기 위해

묵상을 하고 있으면 주위에서 들려오는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웃들이 너무도 많았고,

고등부 교사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학생들의 실상을 보면서 어려운 학생들에게 당장

베풀 수 있는 것은 사랑도 인내도 아닌 빵이다라는 생각 속에 조그맣게 실행을 했었던

것이며 그것이 십일조 헌금으로 변모된 것이다.

 

내가 십일조를 한다고 하면 대개의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우리가 십일조를 잘 냈는데 교회 목사나 장로들이 이 돈을 떼어 먹거나 횡령하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럴 수도 있다. 또 그런 일이 쉽게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각종 매스컴을 통해서도 알고 있다. 사람들이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지는

않는 것과 같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십일조를 하는 것이지 목사나

장로를 보고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설령 그들이 내가 낸 헌금을 떼 먹거나 횡령을 했다면 그들의 문제이지 우리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주님 앞에 나가 심판을 받을 때 그 모든 것이 감안되어 그 인간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 앞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는데 뭐가 무서워

헌금을 회피하겠는가. 우리가 우리의 헌금이 제대로 쓰여 지고 있는지만 감시하면 되는

것이지 미주알고주알 따져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를 믿고, 목회자를 믿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입장에서도 마냥 은혜와 축복으로만 물질 우선주의에 빠져 살고 있는 인간에게

뭔가를 보여 주어여 하는데 다시 말해 물질적인 무언가가 있어야 하나님을 믿을 터인데

당장 배고픔 속에 허덕이고 있는 인간들에게 마냥 축복만 이야기해 본들 그런 이야기가

통용이 되겠으며, 배고픈 인간들이 쉽게 하나님을 믿고 따르겠는가?

그러다 보니 인간들에게 당장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헌금을 어렵고 힘든 사람을 위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지상의 통용 화폐인 은혜와 축복이 아닌 물질적인 축복을 조금

내리시는 것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럼 반드시 십일조를 10%를 내야 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10%라는 것은 절대적인 기준율이 아니라고 본다. 이것은 개인적인 능력 범위를 수치적

으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성경에 성의껏내라고 하면 이를 듣는 이들에게 수량적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가 성의가 있는 것인지 굉장한 혼란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획득한 물질을 열 개냈는데 다른 사람은 비슷한 물질 열 한 개

내는 사람보다 성의가 없어 보일 것이요, 어떤 이는 열 두 개를 내서 열 한 개를 내는

사람을 힘들게 할 수 있으니 이 모든 것을 감안해 기준점을 제시한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이런 기준점이 없다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들은 물질 헌납의 시간이 되면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 버릴 것이다.

그런 십일조를 그럼 어떤 방식으로 내야 할까?

식구가 다섯 명인 사람이 몇날 며칠을 굶다 어렵게 일자리를 얻어 그날 양식으로 감자

다섯 알을 구했다고 치자, 감자 한 알로 허기를 채우기도 벅찬데 그 중에 한 알을 교회

십일조로 내라고 한다면 그 사람 눈알은 돌아갈 것이다.

천상의 주님도, 하나님도 중요하지만 내가 당장 배가 고픈데 무슨 헌금이요 십일조인가

말이다. 다섯 알을 다 충분히 나누어 먹고 힘을 내서 다음날 열심히 일을 해서 감자

열 알을 구해와 두 알을 헌금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괜히 배고픈데 감자 한 알 헌금했다가 다음날 힘도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임금으로

감자 네 알만 받으면 어찌 되겠는가?

따라서 십일조의 의미는 교인이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 대한 기준점을 제시한

것이지 반드시 10%를 지키는 것을 절대율로 가져가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매번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이다.

나의 경우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싶다.

?

나는 그래도 먹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보다 어렵고 힘들고 지친 사람들이 내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오늘날 내가 이만큼 살 수 있었던 것은 나의 굉장한 노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나를 이렇게 살게 해 준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무엇은 무엇인가?

부모님, 형제, 친구, 친척...무수히 많다. 하지만 그것은 정답일수도 있지만 오답일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러기에 나는 항시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한다. 아주 정확히 하려고 노력한다.

어떤 때는 십일조 하는 날을 기다리고도 있다. 남들이 들으면 미친놈이라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그렇다.

내가 십일조를 낸다는 것은 내게 직장이나 직업 등을 통해 나와 나의 가족의 삶을 영위

할 수 있는 ()’를 창출할 수 있는 뭔가에 종사하고 있다는 뜻이요, 살아 있다는

증거요,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이를 짜증내면서 하는가.

혹자는 이야기할 것이다. 반드시 교회에 해야 하는 것인가라고 말이다.

교회가 싫고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의심된다면 사회에 그만큼 기부를 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니 십일조는 꼭 하시기 바랍니다.

 

방언에 관한 것도 그렇다.

솔직히 기도를 하는 도중에 옆에서 신실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사람들이 방언을 하면

무섭다. 그냥 무섭다. 그 방언이라는 것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이야기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신뢰성이 전혀 없다. 하나님과의 소통이라면 방언을 하는 사람이 전부

비슷하거나 유사해야 하는데 전혀 통일성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볼 때는 기도하는

이들이 생각나는대로 이야기하면서 방언 즉,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라

생각되어 진다.

교회를 20여년 다닌 나도 아직 그 방언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방언을 믿을 수

없고 방언이 안 된다고 주눅이 들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교육부가 제시한 의무 교육을 다 했다고 모두가 영어를 외국인처럼 이야기할 수 없듯이

어떤 사람은 방언에 능통할 것이요 어떤 사람은 은혜를 많이 받아 봉사와 섬김을 잘 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전도를 잘하듯이 개인별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능통한 방언만이

신실한 신자라는 등식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여간 교회와 신자 그리고 종교 생활에 관련된 하고픈 말과 주장하고 싶은 이야기가

엄청 많지만 여기서 줄이고자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종교생활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밝은 영향을 주려는

한 요소로 작용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면 개인

스스로가 진실한 교인이라면 몸과 마음을 다하여 행동을 잘하여야 할 것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이런 종교관과 생활 철학을 가지고 오늘도 교회에 간다.

내가 교회와 지역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실행에 옮기고 있다.

예로서 회사에서는 신문을 많이 보고 폐지로 엄청난 양의 폐휴지가 나온다.

나는 주말마다 이를 모아 교회에서 불우이웃돕기용 폐지 수거함에 내고는 한다.

그럴 때마다 십일조 헌금에 버금가는 기쁨을 느끼고는 하는데 이런 것 하나하나가 모일

때 나만의 종교관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참고로 위에서 언급한 내가 언급한 종교생활을 하면서 마주하게 된 의구심 10가지에

대한 해결책이 알고 싶다면 이 작품을 구매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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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는 신의 선물 - 위대한 바보학자의 위대한 바보예찬
무라카미 카즈오 지음, 이진주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추천권유도 8

- 그럼 영재(英才)들은 신의 저주(詛呪)인가? -

 

한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글을 쓴 시기는 2010년 겨울 밤에 이었습니다) 

매년 이맘때면 반복되는 생각으로 참 아쉬움이 많았던 또 거기에 비례한 기쁨도 많았던

한 해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만 아무래도 기쁨의 순간을 헤아리는 숫자보다 아쉬움과

서글픔으로 접혀지는 손가락의 숫자가 많은 것은 아마도 내가 욕심이 많아서인가 봅니다.

내년에는 그 어떤 숫자에도 일희일비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보겠다는 다짐을 해 보지만

그게 쉽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인생 사는 데 너무 영악하게 살지 말고 우직스런 마음과 자세로 살아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생의 목적지까지 길에 자가용 같은 것을 타고 오로지 목표만

바라보고 달리지 말고, 목표까지 가는 과정을 즐기기 위해서도 가끔은 기차도 타고,

마차도 타면서 목표 길에 펼쳐지는 경관도 감상하고 느끼면서 달려갈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주장이 맞는 이야기이지만 요즘같은 세상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우리 말도 떼지 못한 아이들의 혀를 수술해서 원어민 발음이 될 수 있도록 자녀들에게

수술을 강요하고, 입시철만 되면 대 강당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입시 설명회,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개발 시대를 살아 온 부모들 손에 자란 아이들이 작품의

제목처럼 자신의 삶을 바보처럼 살아가려고 하겠습니까?

 

작품은 골백번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정말로 현실에서 적용이 가능한

이야기일까를 수 없이 반복해서 고뇌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영재(英才)는 신의 저주(詛呪)라는 이야기입니까?

솔직히 무엇이 맞는지 반평생을 살아 온 나는 정확히 '이것이 맞는 이야기'라고 주장할

만한 이론도 경험도 없으나 분명한 것은 무엇을 하든지 항시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사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이런 측면에서 작품이 이야기하고 있는 여러 내용이 있으나 나의 관점에서 이를 재

분석해 요약을 해 보면

 

첫째,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실패가 훗날 본인에게 성공의 밑거름 혹은 진짜

실패로 다가온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고

둘째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소유한 자만이 자신의 정신 건강은 물론 미래까지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으며

셋째는 끊임없는 지식 탐구에 대한 열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누구나 다 아는 [스티브 잡스]를 예로 들면서,

자신이 설립한 회사에서 퇴출당했으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처지를 역 발상으로 받아

들여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기회라고 퇴출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자는 마음을 갖게 되면서 오늘날 애플의 신화를 이끌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실패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달라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좋은 유전자를 활성화시키는 가장 좋은 자극은 밝은 마음이다.

'마음의 활동은 유전자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부연해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어느 날 모 토크 쇼를 보니 사회자가 간만에 출연한 유명한 가수(게스트)에게

"가수는 노래 제목 따라 간다"는 말을 했는데 저는 정말로 공감을 했고 솔직히 그리 밝은

노래를 선호하지 않는 나로서는 전율을 했었습니다. 그 이후 저도 가급적 노래방이라는

곳을 가면 밝고 희망에 찬 노래를 부르려 무지 노력을 하는데 아는 노래가 별로 없어서

참으로 고약할 따름이지만 항시 의식적으로 밝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려 노력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좋은 유전자를 활성화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지식 탐구의 열정에 대해서는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 괴테의 명언

"인간에게는 모르는 것이 약이 되고 아는 것이 독이 될 때가 있다"라는 문구를 인용하면서,

모르기 때문에 '알고 싶다'는 지()의 욕구에 대해 강조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식을 넓히고 능력을 키워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라며 만족감과 안도감을 느끼는 것은 곧 지()의 활동을 정지

한다는 것을 뜻하며, 이는 결국 가능성의 후퇴와 축소로 이어질 뿐임을 강조하고

있다.(151)

, 모르는 것은 아는 것에 대한 최대의 동기부여가 될 수 있으며, 자신의 능력을 키워

나가기 위한 최적의 디딤돌이 되어 줄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작품을 통해 얻은 결론은

어떤 역경 속에서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을 하고 이를 지식 탐구의

열정으로 이끌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라는 궤변 아닌 궤변적 결론을 도출해 내고

싶습니다.

 

나는 작품 제목이 던져 주는 의미에 대해 재 해석을 해 보고 싶습니다.

작품의 저자가 머리가 나쁘고 능력이 약간 뒤쳐지는 것으로 본인 스스로 평가하고 있지만

속된 말로 정말 그렇게 머리가 바쁜데 어떻게 유학을 두 번이나 다녀오고, 박사가 되고,

대학 교수가 될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해 본다.

결국 능력 있고, 뛰어난 머리를 소유한 자들이 내뱉는 한가로운 복에 겨운 타령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어느 마을에 정말 머리가 나쁜 바보와 똑똑하지는 않으나 평범하지만 약삭 빠른 청년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항시 바보는 약삭 빠른 친구에게 늘 당하고만 살았지만 바보는

자신이 당하고 사는 줄 모르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주변 사람들이 바보에게 왜 그렇게 매일 당하고만 사냐는 이야기를

한 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하게 되자 비로소 바보는 자신이 정말로 모자라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 날 이후 바보는 절치부심 노력 끝에 약삭 빠른 친구와 같은 수준이 되었다.

약삭 빠른 친구는 오로지 자신의 발전 보다는 바보 친구를 어떻게 하면 더 골려 먹고

이용해 먹을 것인가에만 몰두해 더 이상의 인간적인 발전은 없었지만 바보 청년은 더욱

발전하여 평범을 뛰어 넘어 우월한 청년이 되었던 것이다.

바보 청년은 자신이 과거, 바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 왔던 시절을 되돌아

보면서 자신이 바보였음을 깨닫지 못하고 살았다면 지금 자기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잠기게 되면서 이렇게 평범한 인간이 되게 만들어 준 밑바탕에는 바보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것은 신의 축복임을 깨달았다

뭐 이런 이야기가 아닐까?

이 이야기는 제목에 맞추어 내가 지어낸 이야기이다.

바보는 바보일 뿐이다.

그것이 어찌 신의 '축복'이고 '선물'이 될 수 있겠는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바보가 신의

선물이면 '영재'는 신의 '폭탄' 혹은 '저주'인가?

다시 이야기하지만 바보는 바보일 뿐이다’.

 

모든 인간들은 자기 분야 및 삶에 있어서 스스로 '바보'임을 자각하고 항시 바보 수준에서

벗어나기 위해 위에서 언급한 3가지의 방안을 갖고 부단히 노력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정한 "신의 선물"을 받게 된다는 것을 강조한 작품으로 나는 이해하고 해석하고 싶은데,

너무 앞서 나갔나?

  

   작품으로 얻는 문구들

 

- 과학이란 논리의 세계와 감성의 세계가 맞물려 진보해 왔다.

 

- 행운을 잡기 위해서는 평상시의 노력과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노력도 하지 않는데 

   행운이 찾아오는 일 또한 결코 없다.

 

- 우연에 의한 생각지도 못한 성과를 '세렌디피티'라고 부르는데, 세렌디피티를 부르기

   위한 부르기 위한 노력은 실패가 나쁜 게 아니라 실패로부터 배우지 않는 게 나쁜 .

 

- 대단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배움을 추구했으며 거드름도 피우지 않고 자신의 지식과

   지위를 뽐내는 법도 없었다.

 

- 불가능한 일이라도 일단 그 일을 '하자'고 마음 먹었으면 더 이상 고민하지 말고 뒤돌아

   보지도 말고 앞만 보며 달려라.

 

- 과학과 종교는 과학적이냐 종교적이냐 혹은 논리적이냐 직감적이냐는 접근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생명과 세계의 진리의 핵심에 다가가려고 하는 점에서는 똑같다.

 

- 종교를 배척한 과학은 다리가 불편한 사람과 같으며, 과학을 배척한 종교는 눈이

   안 보이는 사람과 같다.(아인슈타인)

 

- 미약한 걸음이라도 어쨌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 가까운 사람들과 음식을 먹고 마시면서 정보를 주고받는 것을

   Eat & Drink커뮤니케이션 이라고 한다.

 

- 사소한 일을 큰 성과로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다.

- 라틴어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자)는 말이 있는데 

   이는 인간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깃들어 있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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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영성으로 - 2017 신판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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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9

 

작품을 읽으며 나의 기독교 입문 계기를 다시 한 번 뒤돌아 보게 만든 작품이다.

내가 기독계에 입문하게 된 동기를 굳이 들라면 아마도 나의 '아내'와 시인이신 '윤동주

선생'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첫 번째 이유인 '아내'와 관련되어서는 거의 모태 신앙 수준의 종교 생활을 해 오던 나는

아내와 결혼하면서 교회를 나가게 되었는데,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결혼 초 대개 종교에 대한 상반된 의견을 지닌 남녀가 만나 화합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결혼을 한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우리 부부도 그런 과정을 역시 겪었다. 아내의 소망은 나와 손잡고 교회에 다니는 게

최고의 소망이었으나 나는 절을 다니시는 어머님의 종교관과 내가 평소에 막연히 가지고

있던 반 기독교적인 정서로 인해 교회에 다니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었다.

한 여인과 같이 산다는 게 뭔지, 아내라는 여인이 뭔지 간곡한 아내의 부탁으로 또 아내의

()를 살려 주기 위해 그녀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 주고자 - 죽은 자의 소원도 들어

준다는 데 -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출석하게 되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윤동주 시인때문이라고 이유를 든 것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나름

심오한 가치관에 의한 것이다. 세세한 이야기를 하자면 길고도 긴 이야기로 개인적인 질문

을 해 오면 답을 하고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우리 교회나 개신교 지도자 분들이 나의 주장을 들으시면 분노하실 수 있겠으나 나는

종교인 - 개신교 - 으로서 중요한 것은 교회에 다니느냐, 안 다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상의 소유자이다.

그것 보다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또 하나님을 믿고 주 예수를 찬양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평소 삶 속에 예수적 삶의 요소를 얼마나 녹여서 실천하고 살고 있느냐가 더 중요

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이 뭐 저래, 목사가 뭐 저래, 전도사가 어째 저래 등등

교회에 다니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을 외치면서도 교회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듣고, 보며 살고 있는가?

따라서 교회에 다니고 안 다니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예수적 삶을 평소 자신의 생활

속에서 얼마나 실천하며 살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예수적 삶을 추구하다 보면 우선은 주변과의 소통도 원활해지면서 나아가서는 저절로

절대자와의 소통의 문도 열린다는 게 나의 평소 생각이다.

평소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생적으로 무서운 외모와 말투를 구사하는 나의 평소

행동을 유심히 살피다가 내가 교회를 다니는 신자라고 하면 크게 놀라서 묻는다.

 

"형씨도 교회를 다녀요?",

 

", 전에는 고등부 교사도 했었는데요"

 

대화가 이즈음 되면 상대의 표정이 변하면서 말투도 변한다.

 

"외모와는 전혀 다르신 분이네요. 다정 다감하고 마음이 여리시네요"

 

등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종교 이야기도 나올 수 있고 그러다 교회 이야기로

연결이 되고 그러면서 미약하지만 전도라는 것도 하게 된다. 그런 관계로 맺어진 사람은

이전보다 더 끈끈한 관계가 된다.

 

교회에 다니며 나는 여러 종류의 사람을 보아 왔는데,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기 전에 자신의 요구 사항을 빨리 해결해 달라는 이야기(기도)

먼저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되는 데 이것은 큰 문제라고 본다.

우리의 절대자인 하나님이 무슨 큰 채무를 진 사람처럼 이거 해 달라 저것을 이루게 해

달라는 등 끊임없는 요구를 하고 있는데 이런 기도의 행태는 진정한 교인이라면 시급히

고쳐져야 할 자세가 아닌가 생각한다.

작품에서 교수님은 자신의 딸을 낫게만 해 주면’, ‘손자의 병이 낫게만 해 준다면나머지

여생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 인질 협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대가를

바라는 식의 기원은 그리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이렇게 감히 말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최소한 나는 그런 내용의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언젠가 독서일기에도 언급했었지만 나는 사원시절 회사에서 무주택 사원들에게 분양

해 주는 사원 아파트만을 바라보고 임신으로 만삭이 된 아내와 희망에 찬 나날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입주자 명단 발표 며칠 전 회사 규정이 갑자기 바뀌어 당연 입주자로

생각하고 있던 내가 등 외로 밀려난 적이 있었다. 입주자 발표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그 날이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속상함과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대낮부터 술을 먹고 널 부러져 사글세 방 귀퉁이에서

자고 있었는데 어스름한 저녁에 인근 교회의 청년들이 가가호호 방문해 예수님의 탄생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는데, 우리 집 차례가 되어 사글세 방문 앞에서 이들이 노래를

불렀다잠이 달아난 나는 문을 활짝 열고 청년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우리 집사람이 그렇게 열심히 다니며 기도를 했건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또 집 사람에게

해 준 게 뭐냐고, 시끄러우니 다른데 가서 노래를 부르라

 

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쫒아 버린 적이 있었다.

-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주님이 열성 신도인 집 사람에게 내린 복이 바로 남편인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참 골 때리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교회 청년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지금 생각해 봐도

어처구니가 없는 그런 행동이었다. 그 때 일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위와 같은 사건을 비롯해 여러 소소한 사건이 내게 겹치고 또 겹쳐서 일어나 상당히 힘든

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 목사님의 설교 중에

 

"우리가 하나님이 안 준 것만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가 받은 것을 한 번 세어 보세요 아마

주님께서 안 주신 것보다 여러분께 주신 것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나는 그 말씀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고 더 이상 주님께 무엇을 구원하는 보챔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자신있게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기준으로

하나님이 주신 게 많은지 안 주신 게 많은지를 세어 보기를 권하는 바입니다.

단연코 이야기하는 데 주신 게 더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후 나는 내가 먼저 간구하는 내용의 기도는 가급적 자제를 하고 있다.

나도 사람인지라 왜 복을 받고 싶지 않겠으며 또 왜 금전적으로나, 육체적인 쾌적함을 싫어

하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원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추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 이상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고 절대자의 가르침 속에서 평소 생활을 잘하면 그게 바로 ''이고

'행복'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을 주실 분은 '아직 너의 차례가 아니다' 혹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데, 복을 달라고 열심히 간구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차라리 그 기도 시간에 다른 내용을 기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

해 본다

 

교회에 다니며 아직까지도 신앙심이 신실하지를 못해 나는 신실한 신자의 증표처럼 여겨

지는 '방언'이나 '영적 체험'도 뚜렷이 경험해 보지를 못해 신앙심의 깊이를 갖고 이야기할

소재가 별로 없다. 기도 시간이나 구역 모임이라는 데 나가서 다른 신도들이 기도를 하는

것을 보거나 들어보면 거의 신이 강림한 수준으로 기도들을 하고 있으니 아무리 기도

시간이 길어야 대략 5분을 넘기지 못하는 나의 기도빨은 언제나 초라해 진다.

그러다 보니 구역 모임에 나가는 것 자체가 항시 곤욕이요 난처함의 연속이었다.

그런 나의 기도빨이 발휘 된 적이 있었다.

이것은 누가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믿어 달라고 생 떼를 부리지 않겠다.

지금 생각해 봐도 신기할 따름이지만 증명할 수 없기에 나 혼자 생각만 한다.

아마 '삼풍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였을 것이다.

 

사고가 난 후 긴 시간 동안 생존자 소식이 없어 전 국민이 애를 태우던 어느 날 밤으로

기억되는데, 나는 조용히 작은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신실한 신앙심이 그리 크지 않은

나이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를 않는데 갑자기 '삼풍 백화점' 희생자와 매몰된 사람을

위한 기도를 하고 싶은 마음이 폭포수처럼 일어나는 것이었다.

나는 읽던 책을 덮고 눈물, 콧물을 쏟으며 기도를 불같이 한 적이 있었다.

- 나도 당시에 왜 그랬는지를 지금도 알 수가 없다 - 우리 가족이나 친척 중에 삼풍 백화점

사건과 관계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나의 그런 불같은 기도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음날 생존자가 처음으로 한 명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것 말고도 여러 건의 기도빨 사례가 있는데, 누가 증거를 대라고 하면

증거할 수 없으니 답답하지만 뭐 그리 억울하지도 않다. 이런 저런 체험을 통해 내가 내린

결론은 분명히 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런 저런 이유와 또 사례를 통한 신의 존재를 믿게 되면서 교회의 둘도 없는

신자 - 그러나 열성 신도는 아니다. 교회나 일부 신도가 잘못하는 모습이나 판단을 할

경우 핏대를 세우며 지적을 하기 때문이다 -가 되었으며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 반드시

주일을 지키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우선은 집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시작한 일인데 이제는 이렇게 되었다.

유태인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사랑하는 아내를 울리지 마라. 하나님께서 아내의 눈물방울 숫자를 세고 계신다"

 

나는 세상에서 이 말이 제일 무섭다. 그래서 더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품 속에서 그 분이 언급하신 말씀 중 가슴에 와 닿는 문구를 살펴 보면

 

[종교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세속에 얽매인 끈에서 벗어나 영혼을 해방

시키려는 욕망인 것만은 분명하다. 어차피 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정말 튼튼하고

영원한 끈에 끌려 다니고 싶다.]

 

비유가 꼭 적절하다고 보여지지는 않으나 성직자의 비리나 부패를 무신론자들이 공격할

때마다 내가 답을 잘 찾지 못함에 단서를 주신 문구는

 

[부패한 교회, 성직자가 있다고 해서 교회를 가지 말라는 것은 병원 의사가 오진하여

사람이 죽었으니 병이 나도 병원가지 말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나도 열심히 다니지만 오늘날 교회는 정말 많은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가장 큰 문제는 나부터도 그런 마음이 있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목적에 맞게 쓰려고 하는 불경한 것이

너무나 많다. 그 중에 한 명이 본인이다.]

 

정말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지막으로 작품을 읽으며 나는 교수님께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말이 생각났다.

주제넘은 이야기일지는 몰라도 최근 개신교가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고, '헤르만 헤세'라는 석학도 교회의 '이기주의적 성향'에 대한 자기반성을 요구한 적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교회의 첨탑이 높아질수록 인간들의 죄상은 더욱 더 흉악해지고 교회의 크기가 대형화될수

록 몰지각한 인간들은 더 늘어나고 있는 이런 현실 속에서 이 시대의 지도자로서 우리

교회와 교인들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종교와 종교인으로서의 방향에 대한 말씀을 끊임없이

던져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다.

개신교의 발전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지적하고 반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어야 하는데

우리 겨회는 환경적으로 쓴 소리를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닌 것으로 알고 있고 또 쓴 소리

하는 것을 본 적도 없다. 이것은 개신교의 발전을 위해서도 그리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

생각한다.

 

또한 작품에서 언급하셨던 내용 중

 

"부패한 교회, 성직자가 있다고 해서 교회를 가지 말라는 것은 병원 의사가 오진하여

사람이 죽었으니 앞으로 병이 나도 병원가지 말라는 말과 같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교회를 부정하며 가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까지 모두 안고 갈 수 있도록

기독인이라면 모두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교수님의 고견을 말씀해 주실 것을

진정으로 건의를 드려 본다.

 

교수님의 작품을 통해 수 년째 교회를 다니고는 있으나 항시 초심자와도 같은 어수룩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같은 미약한 영성의 소유자에게 진정한 깨달음을 느끼게 해

주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지성인으로서의 말의 향연

- ‘기도는 고공비행을 위한 비상(飛翔)입니다.

 

- 죽음보다 강한 것이 창조의 욕망이다.

 

- 메멘토(memento)는 라틴어로 '기억하다', '생각하다'라는 뜻이고 모리(mori)는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메멘토 모리'라는 부르짖음은 '죽음을 생각하라'로 이는

   무신론자들이 외칠 때 하는 말이다.

 

- 상상력이란 사물을 부풀리는 것이 아니라 해부하고 쪼개는 행위이다.

   존재의 그 딱딱한 껍질 안에 잠재해 있는 시간과 공간의 이미지를 끄집어 내는 것.

  

- '사랑'은 말로, 몸짓으로, 나타나지만 ''은 조용히 지열처럼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맨 밑바닥에서 타오릅니다.

 

- 비만은 건강이 아니라 정신의 문제이다.

 

- 의문은 지성을 낳지만 믿음은 영성을 낳습니다.

 

- 리더가 누군가를 이끌어 가려면 감동을 주아야 합니다. 영혼을 일깨워서 눈물이

   솟아나게 해야 합니다. 눈물이 흘러야 영혼에 무지개가 생깁니다.

 

- 문화(文化)라 문치교화(文治敎化)의 준말로서 지도력을 가지려면 반드시 문화를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 예술가가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물귀신처럼 남을 자기 대신 어둠의 심연 속으로

   끌어 들이는 힘은 있지만 그 곳에서 나와 구제의 높은 곳을 향해 나갈 수 있게 하는

   힘은 없다.

 

- 절망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영성을 얻을 수 없다. 자기파괴라는 극적인 경험이

   없이는 영성을 갖기 힘들다.

 

- 영성의 세계는 이해하거나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절망을 계기로 영성의

   세계로 던져 넣어지는 것이다.

 

- 가족의 사랑과 공경이 지상에서 가장 숭고하고 값어치 있는 일이었기에 하나님은

   그것을 초월하는 마지막 고개의 시험을 과하게 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한국인이 기독교를 비판할 때 가장 많이 지적되는 부분이 바로 가족주의적 시각에서 본 

   예수님의 행적들이다.

 

- 혈육의 낡은 가정관을 사랑과 믿음,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으로 확장하고 승화한 것이

   예수님의 가정관이었고 기독교의 가족관이다.

 

- 땅에서 사는 나는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율법을 통해서 비로소 하늘의 아버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 빛은 하나인데도 분광작용에 의해서 제가끔 달리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도 문화에

   따라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 회교문화권에서는 돼지고기만이 아니라 개도 금기의 대상이라고 한다.

   이는 마호메트가 동굴에 숨어 있을 때 개가 짖어 잡힌 적이 있어 악마의 사자라고 생각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음치를 놀릴 때 "개처럼 노래한다"라는 속담이

   있다.

 

- 인간이 풀 수 있는 영역에 대해서 하나님은 늘 침묵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풀어야 한다. ,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하나님께 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노력해야 한다.

 

-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신의 생각에 하나님이 맞춰지지 않으면

   하나님 믿지 않고 하나님이 틀렸다고 불평을 한다.

 

- 인생이란 15분 늦게 들어간 영화관(로맹 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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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타이밍 - 당신을 들어 쓰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준비 과정
오스 힐먼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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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10

 

해당 작품부터 연속으로 몇 권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크리스천으로서 내 종교적 사고의

깊이를 더하고, 기독인으로서의 소양을 더 하고자 매년 이런 작품을 읽어 왔기 때문에

올해도 읽는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만이라도 나의 종교적 관점과 주님의 위대한 사랑을 전파해

오늘도 두 팔 벌리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한 없이 어린 양들을 기다리고 계실 그 분께 감히

인도하고자 하는 마음과 또 주님의 참 사랑을 전하려 글을 작성하는 것이니 본인의 종교와

종교관이 다르다고 하여 굳이 본 글을 외면하지 마시고 평소에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는

놈인지를, 이 놈이 생긴 것과는 달리 왜 이런 글을 기록하고 있는지 또 주장하며 외치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글의 내용과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이 읽으시는 분과 비슷하다고 생각이 되시면

언제 한 번 저와 함께 교회에 출석해서 주님을 영접합시다.

 

결론적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 전에 종교에 관한 나의 관점은 이렇다.

성경책이 순 엉터리고 거짓말투성이며 허구로 꽉 찬 이야기로 되어 있다면, 몇 천 년을

온전히 전해져 내려 올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만약 그러하다면 성경에 기록된 거짓말과 허구에 찬 행동을 전파하고 나아가서 그 말에

의존해 속된 말로 밥을 빌어먹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목회자들 전부는 벌써 '사기꾼'으로

낙인 찍혀서 철창에 갇혀 있어야 됨이 마땅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목회자나 말씀을 증거하는 사역자들이 성경책을 이용해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쳤다는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성경책에 기록된 내용은 일단 거짓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하기 때문에 몇 천 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성경책을 들고 거기에 적혀져 있는 말씀을

증거하고 이를 적극 전파하려는 사람들 또한 있는 게 아니겠는가. 더 직설적으로 이야기해

성경책에 최소한으로 '인간의 도리를 져 버리는 행동을 하라'는 이야기가 없기에 일단은

나쁜 책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든, 관심이 없는 사람이든 간에 성경책에서 증거하고,

외치고 있는 예수 재림과 죄 사함에 대해 관련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면서까지 왜 증거

하고 또 이를 결사적으로 전도하려는지 일단은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정상적인 생각이라

보는데 나의 억지일까?.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집에서 기르는 집 개도 이유없이 짖어 대면 개 주인은 무슨

일이 있어 저렇게 짖어 대는지 확인하고 내다보지 않는가. 그렇다면 수 천 년에 걸쳐 셀

수 없이 많은 인간들이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려 가면서 저리도 외치고 있는데 한 번쯤

관심을 가져 보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해당 작품은 성경의 "욥기"에 해당되는 부분에 대한 저자 자신의 개인적 성찰에 관한

것으로 삶이 힘들고, 지치신 분들이라면 성경책의 "욥기"를 먼저 읽고 본 작품을 읽으면

더욱 더 가슴에 와 닿는 작품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성경에 보면, [요셉]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 인물은 누가 뭐래도 성경적으로 고난의

아이콘 그 자체인 인물이다.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 전횡을 일삼다 구치소에 들어가 있을 때도, 나꼼수의 김 모씨라는

작금의 시대 '소 영웅'께서도 자신이 과거에 한 발언으로 절치부심 집에서 칩거하며

반성한다고 폼 잡으며 꺼내 든 성경책의 대목이 바로 [요셉]이라는 인물의 고난을 그린

"욥기"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 지난 정권 시대에 각종 게이트의 주역이라고 평가 받았던 최 모씨는 검찰에 붙들려 들어

갈 때 예외적으로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라는 책을 들고 들어간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 인물을 빼 놓고는 권력에 빌붙어 지랄하다 붙들려 가거나 문제가 되는 인물들이

반성을 한다고 폼을 잡으면 왜 꼭 성경책을 펼쳐 드는지 참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불경책을 들고 갔거나 불경의 어느 대목을 읽었다는 인간을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그렇게 잡혀 들어가는 인간들은 자신이 받는 고통을 마치 성경 속의 한 인물로

승화시켜 승리하리라는 희망을 기대했었는지는 모르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 참

잘못 찾지 않았나 생각된다 -

 

그렇다면 성경 속의 [요셉]이라는 인물에게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무엇을, 왜 어떤 측면

에서 받아 들여야 할 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요셉]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배고픔과 목마름 그리고 사탄의 시험과 훼방을 당한 후 '공적 사역'

시작할 수 있었다. 다시 이야기해서 편안한 삶을 영위하다 어느 날 큰 깨달음을 얻어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런 '공적 사역''인류를 구원하시는 활동'에 임하지 않았다

는 이야기이다.

[요셉]은 형제들로부터 구덩이에 내던져지고 심지어 노예로 팔려 가기까지 한다.

노예가 된 [요셉]은 여주인으로부터 갖은 유혹과 학대 그리고 무고 등으로 인해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인간으로서 받을 수 있는 온갖 역경과 어려움을 받았음에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이를 극복하고 멋지게 승리자가 된다.

[요셉]에게 전개된 각종 역경과 고난(버림과 배신의 시련, 유혹의 시련, 인내의 시련 ,

성공의 시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큰 족적을 남긴 지도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역경의 도가니' 속으로 인도한 어떤 증거를 말씀하시기 위해 내린 고난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명제가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은 독생자 목숨까지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우리 인간을 그토록 사랑하셨으면서도

이율 배반적으로 '사탄'에게 인간을 내 던지셨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인간을 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걸 맞는 사람으로 재 창조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다.

 

그럼 나는 어찌하여 이 시점에 이런 작품을 읽고 이런 소회를 쓰게 되었는가를 이야기 해

보면, 어느 귀화 외국인이 신문 칼럼에

 

"내가 한국에 귀화한지 20여 년이 되었지만 한 번도 위기가 아닌 시기가 없었으며 이제는

그런 이야기를 듣지 않고 새해를 맞이하면 더 이상한 기분이 들 것 같다.“

 

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연륜이 그리 길지 않은 내가 객관적으로 우리 사회를 들여다 보아도 그 외국인이

이야기한 것처럼 위기인 것 같은 느낌이 확실히 든다. 왜일까? 아마도 삶이 그만큼 팍팍해

져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시기에 본 작품을 선정했다는 것은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나도 고통을 당한 [요셉]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살아오는 과정에서 기억될만한 큰 고통

- 당사자의 고통은 타인의 고통과 역경의 크기에 관계없이 자신의 고통이 이 세상에서

제일 큰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 일 것이다 - 을 경험한 적이 수 없이 많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런 순간을 돌이켜 보면 절대로 우리 주님은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가 이길 수

없을 만큼의 크기로 고난을 주어 힘들게 하지는 않으셨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과 역경'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쉽게 외면 혹은 회피

할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그런 험난한 시기에 봉착하면 대개의 인간들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돌파하려는 '독불

장군파'와 절대자에게 의지해 고비를 넘기려는 '순종파'로 구분된다.

그러나 어느 파가 되었던지 간에 역경을 잘 극복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축복이 될 수

있겠으나,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지 못했을 때에 발생하는 문제에서 두 파는 극명한

차이점을 드러낸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 '독불 장군파'의 경우는 득의만만하게 문제점에 대들어다가 철저히 깨지면 스스로의

인생을 포기하거나, 자학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반면, '순종파' - 내가 속한 파 - 는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는 데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순종파'의 든든한 후원군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오늘 안 도와 주시면 나중에라도

반드시 도와 주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안 된다고 해도 낙담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 자신 앞에 펼쳐지는 각종 역경과 고난에 대해 그리 걱정을 하지

않는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많겠지만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을 것이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몸 속에 있는 장기(臟器)가 있다. 심장, , 대장, 소장 등등등 그러나 이

중에서 우리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기관이 몇 개나 되는지 한 번 헤아려 보자

아니 그 소유자인 우리가 맘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부어 있는 ''더러 작아지라 하면 작아지는가, ''에 공기를 더 넣으라고 하면 말대로

되어지는가?

우리가 우리 몸의 주인이면서도 우리 몸 속에 있는 장기를 우리 마음대로 조정하지 못하는

게 바로 우리 인간인 것이다.

나를 비롯한 그런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에는 분명 한계와 문제가 있을 것이다.

이런 모든 문제를 '독불 장군파'는 스스로 해결하려 발버둥 치는 반면, '순종파'는 우리의

절대자께서는 다 알아서 헤아려 주신다는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사유를 들어 이야기를 하려는 이유는 나 역시 힘든 상황을

헤치고 살아왔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지만, 가만히 내가 지나 온 세월을 반추해 보면,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이든 공통 분모가 있는데 이는

 

[주님은 내가 이겨낼 수 있는 고통 만큼만의 역경을 주셔 왔다]

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현재 처한 어려움을 웃으며 대응하고 있다는 점을 알려

주고 싶어서 작품을 읽고 이렇게 독후감을 쓰고 있는 것이다.

 

비록 현재의 나는 성경 속의 [요셉]과도 같은 높은 지체와 부귀를 그 분께서 예비해

놓으시지는 않았을지라도 분명한 것은 어려움 속의 오늘 보다는 더 나은 내일을 반드시

준비해 놓으셨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결코 좌절하거나 희망을 꺽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 분이 내게 그러한 것을 예비해 놓으시지 않으셨다면 현재의 고통보다 더 크게

다가 왔을 과거의 고통 속에서 이미 나를 벌써 용도 폐기하셨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과거 한 때의 고난으로 인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나를 잡아 일으켜 세운 것은 주님이셨고, 주님은

결코 내가 감내하기 어려운 고난을 절대 주지 않으신다는 나만의 최면이었다.

그 결과 오늘 이 자리에서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고난과 역경이 오더라도 위에서 언급한 나만의 최면을 통해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내가 소망했던 목표에 약간 더디 도착하는 것은 있을 수

있을지언정 말이다.

역경과 고통을 당하는 순간의 [요셉]은 주님이 예비해 놓으신 크나 큰 선물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감내했고 이겨내 종국에는 그 분께서 예비해 두셨던 큰

선물을 받았다. 나 역시 그런 날이 내게 반드시 올 것을 믿으며 오늘의 고통과 역경을

웃음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그런 날이 오면 오늘 여기에 쓰고 있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웃음과 기쁨 그리고 희망으로

반추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는 여러 사람들에게 절대자의 존재를 '증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타이밍'이라는 작품은 신자, 비신자 모두가 한 번쯤은 꼭 읽어

봄직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을 읽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도가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도 없을 것이고, [요셉]의 고난사를 통해 우리 인간에게 주시려던 메시지가 잘

전달되어 주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한다.

      

작품 속에서 던져 주는 말씀들

 

- 놀라운 미래를 위해 우리를 단련시키고자 하나님이 그 역경을 선용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하나님은 우리를 목적지로 이끌 정확한 계획안을 갖고 계시는데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매달리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

 

- 하나님이 우리를 다듬으실 때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자아 중심적인 생각을 제거하는

   일이시다.

 

- 진정한 믿음이란 상상하기 힘든 일마저 하나님이 이루시리라 믿는 믿음이다.

   그가 원하시는 것은 오직 우리의 헌신된 마음이다.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새롭게 고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허용해야 한다.

 

- 우리 삶에 어떤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 필요가 있다.

 

- 예수님은 세상적인 이득을 추구하느라고 삶을 허비하는 자를 우상 숭배자와 동일하게

   보셨다.

 

- [할레 의식]은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이 표시였다.

   이는 예전 것들을 벗어 버림을 뜻한다.

 

- 종종 하나님은 어떤 사역을 맡기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고는 우리의 노력을 좌절시킨다.

 

-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 사과를 하든지, 하지 않던지 상관치 말라.

   정말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가운데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는 것이다.

   그들을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  

 

- 우리가 인생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까닭은 그분의 약속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 광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드바아르]로 이는 '말하다'는 뜻인 [다바아르]에서 온

   온 말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광야로 부르신 까닭은 당신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 특별한 장소다. 성경은 광야가 영감과 고결의 장소 곧 강력하고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라고 했다.

 

- 배고프게 지내는 법을 알기보다는 풍족하게 지내는 법을 알기가 더 어렵다.

 

- 히브리어에서 [요셉]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늘리실 것이다'' 혹은 '하나님이 더 하신다

   는 뜻.

 

- 인내는 역경의 시기에 우리의 성품을 다듬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다.

 

- 겸손이란 자신을 낮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덜 생각하라는 것이다.

- 성공 시험을 통과하는 비결

   1) 성공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라 

   2) 찬사 처리법을 배우라  

   3) 겸손하게 살라 

   4) 겸손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라.

   5) 하나님이 당신을 구원하셨고 또 당신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기억하라

 

- 하나님의 약속의 빛을 받기 전에 우리는 먼저 어둠을 통과해야 한다

 

- 역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그리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그 분을 온전히

   의지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는 신앙 학교이다.

 

- 하나님은 우리의 즐거움 속에서 속삭이시고 우리의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지만 우리의

   고통 속에서는 외치신다. 그것은 귀먹은 세상을 일깨우는 그 분의 메가폰이다.

 

-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역경을 허용하시는 것은 그 분의 뜻에 순종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 사탄은 삶 속 깊숙이 뿌리 내린 기만적인 심적 경향, 거짓된 개념들 그리고 죄악된

   습관과 파괴적인 관행들 속에 숨어 있다

 

- [야곱]이란 '탈취자', '기만자 또는 조정자를 뜻하는 데 이들 모두는 그의 통제적인

   성격을 시사한다

 

-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은 당신이 아직 모르는 어떤 것을 알아내시기 위함이

   아니다. 그가 우리를 시험하시는 까닭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과 그 분의 사랑과

   능력과 신실하심에 대해 알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 실패는 상처를 준다. 실패했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이

   성공을 제조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원재료들 가운데 하나 일 뿐이다.

 

* 종교적인 심령을 가진 사람들은 완고하고 교리적이며 죄의식과 두려움에 이끌리고,

   변화와 새 개념들을 거부하교, 거만하고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너 보다는

   거룩하다'식으로 대하며 화를 잘 내고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기 싫어하며 관계보다는

   규정에 더욱 초점을 맞추려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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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려 본 슬픔 믿음의 글들 208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권유도 9

 

슬픔이 우리를 짓누를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기독교인이거나 종교와 상관없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본 질문을 보면 참으로 원론적이고

도 원초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나만의 독선과 아집의 세상에 빠져 잘난 척 하고 살다가 겨우 주님을 영접해 살기 시작한지

십 수년이 안되어 종교적 신념이 아직은 초보적 수준에 머물러 있는 나를 비롯한

대개의 신자들은 자신이 힘들고, 지치고, 피곤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특히 삶이 또

세상이 자신을 버렸다고 느낄 때 서두에 언급한 질문을 절대자이신 주님께 던져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 온 답은 아마도 '묵묵부답'이었을 것이며 그런 상황을 당하고 나면 꼭 한다는

소리가 '신은 없다'거나, '신은 나를 버렸다' 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절대자를 믿어 온

스스로나 절대자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경멸의 눈초리로 비난 혹은 조소를 보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이 이 작품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품은 자기 삶에서 가장 충격적인 슬픔으로 인해 감정적으로 마비되는 상태를 파악하고자

하는, 그리하여 종국에는 그러한 마비상태를 일어서고자 하는 '한 사람'의 주의 깊은 시도

를 적나라하게 펼쳐 놓은 기록이라고 작품 해설서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나는 이 점에 절대적으로 공감을 표시하는 바이다.

 

작품 속에서 나오고 있는 결론적인 이야기이지만 결국 우리가 불완전한 탓에 '사랑'이라는

혜택을 누리는 대신 그 대가로 사탄이 주는 고통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을

작품이 이야기해 주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싶다.

작품 여러 곳에 우리 스스로를 돌아 보게 하는 문구가 여럿 나온다.

 

- 행복할 때는 행복에 겨워서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너무 행복해서

   그분이 우리를 주장하시는 게 간섭으로 여겨지기조차 하는 그 때, 우리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그 분께 감사와 찬양을 돌린다면 두 팔 벌려 환영을 받을 것이다.

 

- 만약 하나님이 '사랑의 대용품'이었다면 우리는 그분에 대한 모든 흥미를 잃어 버려야

   옳다

 

- 내게 종교적 진리에 대해 말해 주면 기쁘게 경청하겠다. 종교적 의미에 대해 말해 주면

   순종하여 듣겠다. 그러나 종교적 위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당신은 모른다'

   나는 의심할 것이다.'

 

- 과거는 과거이며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고, 시간 그 자체가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이며,

   천국이란 '이전 것은 지나가 버린'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고뇌의 깊이가 남다른 분의 짧은 이야기이지만 그 어느 작품집보다 신앙적, 심리적 성찰의

깊이가 있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래의 단락은 내가 작품을 읽으며 가장 가슴에

와 닿았던 단락으로 모두 음미했으면 해서 여기에 옮겨 보았다..

[왜 사람들은 모든 괴로움이 죽음과 더불어 사라진다고 확신하는 걸까? 기독교 세계에서

  도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그리고 동방에서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녀(작품 저자의 부인)가 안식한다고 어떻게 확신한단 말인가?

  다른 것은 제쳐 두더라도, 남은 사람을 이토록 괴롭게 하는 이별이 떠나는 사람에게는

  왜 고통스럽지 않단 말인가?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 품 안에 있기 때문이다'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하나님 품 안에 있었으며 나는 하나님의 손이 그녀에게 어떤 일을

  하셨는지 봐 오지 않았던가. 우리가 육신을 벗고 나면 하나님이 갑자기 더 다정하게 대해

  주시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왜인가?

  하나님의 선하심이 일관성 없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다가 말다가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선하지 않거나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이승의 삶에서 그

  분은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보다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것보다 더한 고통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가 말이다. 만약 일관성 있게 고통을 주시고자 한다면, 죽은 후에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고통을 주실 수 있으리라. 어떤 때는 '주여 주를 용서하소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때는 그렇게 말하는 것조차 힘들다. 그러나 우리의 믿는 바가

  진실이라면, 하나님은 그렇게하지 않으셨다.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셨던가]

                                                                                                                  (50~51)

 

작품을 읽으며 나 역시 우리들에게 부지 불식간에 다가 올 수 있는 '슬픔'에 대한 생각을

잠시나마 짧게 해 보았다. 작품의 결론처럼 죽음으로 인해 찾아온 '슬픔'이란 어떤 행위의

종결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 사계절의 변화처럼 '우리 생의 한 과정'이라는 작가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사계절이 순환하듯 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헤어짐이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사랑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 게 인생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죽음으로 인해 다가 오는 이별을 인생의 끝으로만 여기지 말고 인생의

한 과정 자체로 이해하고 그 속에서 제일 아름다운 결론을 내릴 수 있게 오늘을 감사하며

충실히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약하기 그지 없는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 오늘을 열심히 사는 것이 순리이고 살면서

주님께 의지한다면 그러한 삶의 모습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한없는 사랑, 한없는 관심을

보이시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작품을 읽고 나름대로 내린 작품의 결론이다.

 

오늘 아침 출근 길에 우연히 듣게 된 찬송가 310장이 지친 몸으로 하루를 열기 위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직장으로 나서는 나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1.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 해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2.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 해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3. 왜 내게 성령주셔서 내 마음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 해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4. 주 언제 강림 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 곳도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 해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작품의 서평을 덮으려는 순간 우연히 마주한 어느 신문의 칼럼에서 읽은 글인데 작품의

주제와 너무도 맞아 떨어져 여기에 옮겨 본다.

 

"우리가 여행을 가서 찍은 사진과 직접 가서 마주하는 실제 모습은 크게 다르다.

 사진은 '관점'을 가지고 봤고, 직접 가서 목격하는 것은 '광경'을 봤기 때문이다.

 ‘광경이 눈에 보이는 현상 그 자체를 말한다면, ‘관점은 그 광경을 어떤 입장과 의미를

 가지고 해석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왜 똑 같은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불평하는데 어떤 사람은 감사와 기쁨이 넘칠까요.

 전자는 광경을 봤기 때문이고, 후자는 그 광경을 관점의 눈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지점에서 바라 보느냐에 따라, 그리고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광경이 달라

 보입니다.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광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광경을 해석하는 관점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과거의 광경에 붙잡혀서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불행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광경을 경험하고도 해석, 즉 관점이 다르니까 그래도 행복했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 끌려가 고생하다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요셉은 식량을

 구하러 온 자기 형제들을 보고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45:7)

 

라고 고백합니다.

왜 오늘 요셉의 신앙이 아름답습니까. 그는 보통 사람들처럼 형제들 앞에 이렇게 고백

했어야 합니다.

"형님들이 나를 시기 질투해서 팔아 버려 고생하다 이 곳 애굽까지 끌려왔습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저도 안 찾으시고 뭐 하셨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광경이나 환경을 탓하지 않고 그 아픔을 영광의 면류관으로 바꾸는 믿음의 관점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처한 광경을 믿음으로 해석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 역시 두려움과 괴로움 속에 살아간 날이 더 많겠지만, 그가 다시 목에 힘을 주어

하나님이 먼저 나를 이 곳으로 보냈다고 고백할 수 있는 비결은, 자신의 광경을 믿음의

관점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현재 당하고 있는 광경을 보면 억울하고 섭섭하고 두려워

집니다. 그런데 믿음의 관점으로 보았기에 도리어 '용서''감사'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흔히 고난은 변장된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저절로 축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 때문에 평생 상처를 끌어 안고 살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을 만났을 때, 광경을 믿음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눈을 갖는 것입니다.

그 고난으로 인해 성장하게 될 것을 보는 눈이 있으면 조금은 그 아픔을 기쁨으로 넘겨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믿음의 관점으로 살기에, 고난 중에도 인내할 수 있으며, 고난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봅니다. 믿음의 관점이 없을 때에는 나의 실패와 무능력함 때문에

괴로워했지만, 이제는 믿음의 관점으로 나의 실패도, 나의 약함도 간증하게 하시고, 선교의

도구로 삼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 오산 하늘 땅 교회 이재학 목사님 칼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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