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해석 - 프로이트 최후의 2년
마크 에드문슨 지음, 송정은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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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표지에 그려진 두 인물 프로이드와 히틀러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두 인물에 대해 잘 모른다. 잘 모르기 때문에 더 궁금했다. 특히 프로이드. 학창시절 심리학을 독심술 정도로 생각할만큼 심리학에 대해 무지했으면서도(지금도 잘 모르지만.) 심리학이란 학문에 너무 관심이 가서 [꿈의 해석]이니, [프로이드 심리학입문] 따위의 책을 사들인 기억이 난다. 어려웠다. 빈약한 나의 이해력 탓에 소화시킬 수 없었다. 아직도 책장 한켠에 꽂혀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히틀러. 내겐 풀리지 않는 매듭과 같은 숙제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히틀러 역시 한 때 나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히틀러라는 이름을 내가 언제 처음으로 알게 됐던가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읽은 미스테리 역사(책 제목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믿거나말거나 식의 괴상한 책이었다.)이야기 모음집에서 히틀러가 사실은 여자였다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궁금한 두 인물이 한꺼번에 그려진 책이라니 너무 궁금했다.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책은 히틀러보다는 프로이드에 관한 책이다. 프로이드의 마지막 생애 2년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옮긴이의 말을 통해 보면 이 책의 원제는 [The Death or Sigmund Freud]. 프로이드의 죽음. 옮긴이는 "그가 죽기 전 2년간의 행적을 좇은 전기에 다름 아니지만, 그 정의만으로는 이 책에 담긴 의미를 정당히 평가할 수 없다."(p293)는 생각에 이 책의 제목을 [광기의 해석]이라고 설정한 듯 하지만, 글쎄.. 책을 다 읽은 나로선 이 책의 제목은 원제 그대로 [프로이드의 죽음]이 더 적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프로이드 생의 마지막 2년. 1938년과 1939년. 물론 세계사의 측면에서 보자면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세계 2차 대전과 유대인 학살. 그 중심에 히틀러가 있었던 것도 맞다. 하지만, 광기의 중심에 히틀러가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지만, 이 책의 제목을 바꿀만큼 히틀러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다루고 있진 않은가..? 오히려 이야기의 대부분은 프로이드가 말년에 어떤 병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어떤 수술을 받았고, 런던으로 망명한 후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가가 아닌가?  "그는 담배를 끊으라는 말을 들을까 봐 한동안 의사들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려고 애"(p127)쓸 만큼 애연가였고, 애완견 륀을 사랑했고, 골동품을 좋아했던 프로이드의 인간적 모습 말이다.  프로이드의 생이 진행되고 있는 시간적 배경으로서 히틀러가 몇 번 언급되고 있을 따름인 것 같은데... 

    히틀러와 나치의 광기에 대해 몇 부분 이야기해보자. "정신분석학회를 차지한 나치는 프로이트의 한 마디 한마디가 거의 다 옳다고 생각했다. 그가 쓴 모든 글들은 근거가 확실한 것이었다. / 중략 / 정신분석학은 유대인에게 한정된 과학이라는 것이다. / 중략 / 유대인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민족, 무의식이 폭력과 성으로 무장된 민족, 유아기로부터 성정체성을 갖기 쉬운 민족으로 여겨진 것도 이 때문이다. "(p56) 그래서였던가. 유대인에 대한 무자비한 만행.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가한 무자비한 폭력이 몇 장면 소개되고 있다. 프로이드의 런던 망명 또한 그 때문이다. 영화 [쉰들러리스트]와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면서 인간에 대한 예의, 인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없이 유대인을 물건 취급하던 나치와 그에 휩쓸린 독일 군중을 보면서 분노했던 기억이 났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런 집단적인 광기를 유발시켰는가. 1차세계대전 패배와 베르사유조약(독일인들은 베르사유의 명령이라고 했다던)에서 막대한 배상금을 떠맡았다는 이유만으론 납득이 안 된다. 프로이드 또한 그러한 생각을 했던가..? "그녀는 프랑스가 베르사유조약에서 독일을 박해한 것이 오늘날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독일이 전재에서 이겼다 해도 히틀러와 나치는 반드시 나타났을 것이며, 사악한 행각을 벌였을 것이다. "(p224) 이 부분에선 그렇다면 프로이드는 나치와 히틀러의 등장을 어떻게 이해했던가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지 않아서 아쉬웠다. 

   프로이드의 말년의 생애에 대한 궁금증을 채우기엔 괜찮은 책이었다. 하지만, 책 제목을 보면서 기대했던(?나의 오해였던가?) 히틀러와 프로이드의 드라마틱한 인생과 대립점을 찾을 수는 없는 책이었다. 이 또한 나의 독해력 부족에서 오는 상실감일까..기대가 너무 커서였을까. 내 기대에는 조금 덜 차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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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풍경 - 정약용 시 선집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10
정약용 지음, 최지녀 편역 / 돌베개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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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이다. 시는 어렵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내 마음에 자리잡은 걸까?

[송알송알 사리잎에 은구슬 /  조롱조롱 거미줄에 옥구슬 / 대롱대롱 풀잎마다 총총 / ....]. 동시를 읽으며 머리 속에다 동시 속의 풍경을 그려볼 줄도 알았고, 동시에다 곡을 붙인 동요가 좋아서 줄곧 흥얼거리기도 했던 어리 시절이 있었건만. 동시 수준을 벗어난 시(詩)를 배우면서부터가 아니었을까? 시에 사용된 각종 수사법에 대한 "설명", 시인은 지금 이 대목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라고 "설명되어지는" 시를 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글을 읽고 나서 내가 생각했던 느낌과 "설명되어진" 시의 느낌이 너무나 달라서 "시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는 벽을 두껍게 쌓아왔던 모양이다. 

   한 편의 시도 아니고 시"집"이어서 더 겁이 났다. 겁이 나서 조금조금씩 읽고, 읽은 걸 소화시키려고 애쓰다 보니 책 읽기가 더뎠다. 사실 다른 사람의 시집이었다면 시도조차 안 해봤을테다. 다산 정약용의 시라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 정일근 시인의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라는 시를 읽어주셨던 분이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다산이 쓴 시는 아니었지만, 그 시와 시를 읽어주셨던 그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마냥 머리 속에 각인되어 쉽게 잊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집을 읽는 사이엔 조선시대 여류시인이라 할 난설헌 허초희에 관한 소설도 한 권 읽었다. 소설에 나온 난설헌의 시와 다산의 시를 비교해 볼 수 있어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그리하여 고등학생 이상이면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작품에 간단한 해설을 붙이기도 하는 등,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는 우리고전100선의 간행사를 읽으면서 제발 어렵지 않길 바랬다. 다행히도 "시는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약간은 허물 수 있었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번역된 말투가 어렵지 않아서 편했다. 이 책에선 90편 정도의 다산의 시를 [세상을 향한 뜻 / 오징어와 해오라기 / 백성이 아프니 나도 아프네 / 하늘 끝에 홀로 앉아 / 달빛이 내 마음을 비추네 / 아내와 아들을 그리며 ]라는 몇 가지 주제로 분류해서 싣고 있다. 

   다산이라면 으레 국사 시간에 배웠던 애민시, 사회시가 먼저 떠올랐다.  역시나 국사시간에 배웠던 "애절양"이란 제목의 시도 "스스로 거세한 사내를 슬퍼함"이라고 쉽게 번역되어 있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오랜 유배생활에서 오는 적막함 같은 게 그의 시 곳곳에서 느껴졌다. 내가 이 시집에서 가장 관심있게 읽었던 부분은 [아내와 아이들을 그리며]란 주제로 분류된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다. 실학을 집대성했다는, 거중기를 이용해 화성을 쌓았다는, 오랜 유배생활을 했고,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는 그의 사회적인 모습은 귀동냥을 통해서도 익숙하지만, 다산의 가정에서의 모습은 어떠했을까가 궁금했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워 않노라 / 그리워 않노라 슬픈 꿈속의 그 얼굴"(p209)로 나타나는 아내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애틋했다. 부러웠다. 그의 아내가.. 그리고

  생김새는 내 자식 같은데 / 수염이 나서 딴사람 갵애. / 집에서 보낸 편지를 갖고 오긴 했지만 / 틀림없는 진짜인지 의심스러워. (p210)라는 "8년 만에 아들을 만나"라는 시를 보며 웃었다. 웃다가 생각해보니 시에 붙은 해설처럼 "이내 슬퍼서 마음이 아파"왔다. 8년만에 아들을 만난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생각하니...

  사회시, 애민시를 생각하면 안타깝고, 속이 아리는 시들이 많은데, 113쪽에 실린 그의 "보리타작"이라는 시는 슬픔과 고통이 아니라 풍요로운 즐겁고 흥겨운 백성들의 모습을 보게 된 것 같아 좋았다.

  독해력도 상상력도 부족한 내겐 산문보다 시가 훨씬 어렵다. 하지만 다산의 시를 읽다보니 시(詩)도 읽을만한 것임을. 그 속에도 인간의 희노애락이 담겨져 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가 처음으로 시도한 시 읽기였기에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종종 꺼내 읽어보아야겠고, 다른 시인과 시도 많이 접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우선은 책을 덮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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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 나는 시인이다
윤지강 지음 / 예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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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한 권 읽었다. 마음 한켠이 아릿하다.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나는 역사소설을 좋아한다. 소설을 통해 "옛날"을 보게 되는 게 좋다. 지금과는 다른 시간 속에 있는 그들을 만나는 게 좋다. 한동안 책읽기가 재미없어서 새로운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게 겁이 났다. 또 재미없는 책을 만나면 어떡하나..? 걱정이 앞서 책읽기를 쉬어볼까 생각했었다.  망설이다 선택했는데, 잘 읽었다 싶다. "잘 썼다"거나 "못 썼다"거나 객관적인 평을 내릴 수 있을만한 위치에 있는 내가 아니다. 내 취향엔 썩 맞는 작가와 글을 만나게 되었으니 "괜찮은 소설"이었다고 주변에 말을 해 줄 수는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고나서 책 읽기에 흥미를 읽어버린 게 아니구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허난설헌. "허균의 누이였다. 일찍 죽었다. 시(詩)를  썼다." 내가 알고 있던 허난설헌은 이 정도... 이 소설은 허난설헌의 삶에 관한 것이다. 역사적 지식이 짧다보니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실제 그녀의 삶의 모습인지 구분해내기가 힘들다. 글쓴이가 참 섬세한 사람인 모양이다. 그가 들려주는 허초희(난설헌은 그녀가 결혼 후에 지은 호라고 한다.)의 삶이 너무나 비극적이어서, 이야기를 읽는 내내, 마치 내 이야기를 읽는 듯 가슴 한 켠이 먹먹했다. 책을 읽기 전엔 붉은 색 책 표지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으면서는 그 붉은 색이 가슴 한켠을 아릿하고 먹먹하게 만들었다. 

   조선 시대(뿐만 아니라 최근까지도..)에 "여자"로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삼종지도라 했던가? 어려서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지아비를, 늙어서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여자의 삶. 그 여자의 주체적인 삶의 모습은 어디에서 찾아야한다는 말인가..? 사내들보다 더 뛰어난 문재(文才)가 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감춰야했던 허초희.

  "오호라! 사내로 태어날 몸이 여자로 태어났구나! 음양이 뒤바뀌었으니 이를 어찌하랴!" - 중 략 -   "으흐흐! 재능과 미를 모두 지녀 초희라지? 천지신명은 공평한 것이니라. 부귀와 영화를 모두 지녔으나 벼루와 붓이 그를 깨트려버릴 것임을 절대 잊지 말아라!"(p22) 는 무녀의 예언 그대로의 삶을 살았던 그녀. 아직도 그렇다. 남녀가 평등한 것 같지만, 여자니깐 이러해야 하고, 남자니깐 저러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 같은 것은 떨쳐내기가 힘들다. 조선시대에는 더 했겠지..?

    밖으로만 나도는 남편. 어려서 죽은 아들. 유산. 그리고 위로는 제사를 받들고 아래로는 후손을 이어나가는 것을 여자의 지상 최대 임무로 알고 있는 그녀의 시어머니. 시어머니로부터 받는 끊임없는 구박. 미치지 않고 못 배길 상황일 것 같다. 그녀의 삶이 27년이라는 짧은 것이었음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더 살아서 무엇하리...? 사랑했던 그 사람 황연과의 맺을 수 없었던 사랑은 저승에서 결실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집은 장간리에 있어 / 장간리 길을 오가고는 했어요. / 꽃가지 꺾어들고 님께 물었죠. / 꽃이 더 예쁜가요? 내가 더 예쁜가요? "(p68 허난설헌의 [長干行] 중). 그곳에선 황연도 그녀의 연시에 자유로이 대답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저자의 글쓰는 방식이 내 마음엔 쏙 들었다. 허초희와 허봉의 불행했던 삶. 그리고 그 불행한 삶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던 당시의 사회상에 대해 섬세하고 수려한 문장력으로 펼쳐낸 이야기가 내겐 너무 마음에 들었다. 아울러 허초희의 멋진 시(詩)를 함께 접하게 된 좋은 기회였다. 허난설헌과 허균에 대해서는 좀 더 관심을 두고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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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4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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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세종대왕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었다. 지난 해부터 무슨 붐이라도 되는 마냥 세종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들렸다. 대선 때문인가.. tv에선 사극이 범람했고, 서점가엔 리더쉽에 관한 이야기가 넘쳐났던 것 같다. 그런 바람이 내게까지 불었음인지 지난 6개월 사이에 읽은 세종에 관한 책이 이 책까지 세 권. 어느 책이 더 좋았다고 서열을 매기기엔 내 역량이 부족하고, 각각의 책이 가지는 장단점이 있어보인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 과정이 한편의 드라마 같고, 그가 이룬 업적은 아무리 칭송해도 모자랄 것 같아서인지 세종대왕에 관한 책은 "이미 알고 있는 그것"이라도, 별 지루함없이 재미있게 읽었다. 책마다 세종을 보는 관점이나, 저자가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는 다른 듯 하지만 워낙 매력적인 인물이니깐, 어느 쪽으로 뜯어보아도 단점 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이 보이는 인물 세종을 읽는 재미가 있다.. 이 책을 내가 앞서 읽었던 두 권의 세종대왕에 관한 책과 비교해본다는 양적인 면에선 1위다.  이 책에 내 나름의 제목을 다시 붙여보자면 [all about 세종]이랄까..? 세종대왕에 관한 거의 모든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앞서의 두 책에 비해 어린 시절의 이야기나 재위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비교적 소략한 편. 그의 치세에 있었던 사건들과 세종의 주변 인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이 책의 중점을 이룬다. 책의 구성은 크게 3부로 나뉜다. [1부 조선왕조의 주춧돌을 마련한 세종의 삶과 정치] / [2부 세종실록 요략] / [3부 황금시대를 일군 세종의 인재들] (머리말에서 글쓴이가 밝힌 것처럼 책의 일부분은 이미 [세종대왕과 그의 인재들]이란 제목으로 먼저 출판이 된 부분이라 그런지 전체적인 이야기에서 약간의 중복이 있었던 점은 약간 아쉬웠다. )

   1부 1장 왕자충녕에서는 어쩔 수 없는 대립구도. "바른 생활 사나이" 충녕과 엽색행각에 말썽을 일삼는 세자 양녕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양녕은 충녕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었다. 양녕은 자유주의자이자 쾌락주의자인 반면, 충녕은 원론주의자이자 도덕주의자였다."(p34) 양녕이 세자로 있던 때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늘 생각하지만 한 부모 아래 태어난 둘이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다.

  이 책이 다른 세종 관련책들과 가지는 가장 큰 차이점이자 장점은 [2부 세종실록 요략]이 아닌가 싶다. 세종의 즉위년에서부터 세종32년 세종이 사망할 때까지의 실록부분에서 중요한 부분을 간추려서 실고 있는 점 말이다. 2부는 당시의 사회상과 세종의 구체적인 행적을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실록에서 발췌한 부분과 글쓴이의 의견이 구분되지 않고 뒤섞여 있는 점이 아쉬웠다. 실록에 실려 있는 부분과 글쓴이의 설명`의견이 구분되어 실려 있었더라면 좀 더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

  앞서 읽었던 두 권의 책에서도 그랬지만, 세종에 관한 책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은 역시나 세종 시대의 인재들에 관한 이야기. 이책에서도 세종 뿐만 아니라 주변의 인물들에 대해서 상당한 분량의 지면을 통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세종의 치세가 훌륭했던 것은 세종 혼자만의 노력의 결과는 아니었을테다. 그의 시대가 아직까지도 칭송받을 수 있는 이유는 세종 개인의 훌륭함 뿐만 아니라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여 잘 활용했던 그의 인재를 보는 눈 덕분이 아니었을까..? 이 책에서는 부차적인 존재로서의 세종의 인재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당당한 면모를 지닌 한 사람으로써의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은 세종 시대 조각맞추기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황희 정승.  태종과 황희, 세종의 돈독한 관계를 읽는 내내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모든 이에게 너그러웠던 황희의 인간적인 면모, 비록 뇌물 청탁 등 추한(?) 면모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너무 보기 좋았다.

 맹사성의 소탈한 성격과 청백리로서의 모습 또한 보는 이로 하여금 너무나 흐뭇한.. 요즘에도 이런 정치인이 있을까..? 그의 "공당문답"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다. 하늘이 낸 문재(文才)라는 변계량의 개인적인 면모는 요즘 같은 시대라면 인터넷 가쉽란을 장식하기에 충분했을 것 같다. 그들 이외에도 국방, 학문, 과학 등의 분야로 세분하여 다루어지는 세종 시대의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설명을 통해 개개인의 정치적인 면모 뿐만 아니라 가정사와 각종 일화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훌륭한"이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인물 세종. 그리고 다양한 인물들이 그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세종시대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일까.. 그를 다룬 책에까지 우호적이 되고 만다. 어렵지 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세종에 관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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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침묵
질베르 시누에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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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기에 흥미를 잃은 건지, 내가 요즘 보고 있는 책들이 책에 대한 흥미를 읽게 만드는 건지 판단하기 어렵다. 이 책도 그렇다. 읽고 나서 "유치하다. 황당하다."는  단어가 먼저 튀어나와버렸다. 너무 뻔하다 싶은 이야기 혹은 유치한(?이라고 표현하기엔 스스로가 너무 거만하게 느껴지지만...마땅한 대체어를 찾지 못하겠다.) 상황 설정에 책 읽는 재미가 줄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상황이 너무 동화적이라거나 "믿거나말거나"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한 사람은 나 뿐일까...? 

   그렇지 않다면 읽기 전에 책에 대한 나의 기대가 너무 컸던 모양인가보다. "신의 침묵"이라는 그럴 듯한 제목.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자극적인 소재. 그리고 그 용의자가 다름아닌 예수, 마호메트, 모세라니... 이러한 상황 설정을 두고 누가 흥미를 가지지 않겠는가? 추리 소설 작가인 클라리사 그레이 부인. 그녀가 소설로 쓴 끔찍한 상황이, 똑같이 그녀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녀의 집에 나타난 낯선 사내의 죽음. 그러나 시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책을 읽다보면 알게 되지만 그는 천사였다. 그 남자뿐 아니라 천국의 천사들이 살해당하고 있단다. 하지만 누가 천사를 살해한단 말이지...? 범인을 추적해내는 과정을 담은 범죄추리소설이다. 추리소설을 많이 읽어보진 못했지만, 감히 추리소설의 재미에 대해 한마디 하자면 "범인인 듯한 바로 그 사람"이 범인이 아니라, 추리의 대상에서 재쳐둔 의외의 인물이 범인이었음이 밝혀질 때의 놀라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추리소설을 읽다보면 철저히 독자를 기만한 작가에게  속았다는 기분도 들고, 내가 눈여겨보지 않은 상황을 설정하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들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것까지 생기곤 했었다. 하지만 이 소설엔 그런 재미가 별로 없다. 이야기의 진행이 어느 정도 눈에 보이고 나서는 범인이겠지 싶었던 바로 그가 역시 범인이었다. 물론 이 소설에선 "그"가 좀 특별한 인물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점은 독특하긴 했다. 하지만.. 좀더 냉정하게 얘기한다면... "우와! 재미있다.!"가 아니라 "그래서 뭐...?" 하는 반발심이 먼저 일어나버렸다.

    이 책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건 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와 관련된 몇몇 오류를 바로 잡고자 함인가? 아님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함께 하기 마련이라는 이야기인가..?  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천사 살해 사건의 해결을 위해, 천사가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해 사건해결의 단서를 던져주고, 컴퓨터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마호메트와 예수, 모세와 대화할 수 있다는 설정.. 내 이해력이 부족한 건지, 이 소설을 읽으면서는 "어느 부분에서 웃어야 할지 모르는 코미디극을 보는 것과 같이" 어색하고 마음이 불편했다. 이 책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특정 종교에 대한 반발심 따위는 아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이 내가 믿는 종교의 교리 혹은 성경의 내용과 다르다고 해서 흥분할 필요는 없다."는 역자의 말은 내게는 무효였다. 하지만, 만약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것과 같은 신의 모습이라면 종교에 의지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조롱받은 듯한 기분이 들테다.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나와 맞지 않는 책을 읽는다는 건,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의 일방적인 이야기를 몇 시간이고 들어야하는 것과 같은 답답함 때문에 어렵다. 어려웠다. "그럼 네가 써봐!!"라는 공격이 들어온다면 나는 꼬리를 내릴 수 밖에 없다. 나의 짧은 서평은, 열심히 작품을 썼고, 이미 "프랑스 추리 문학대상"이라는 상까지 받은 작품과 작가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늘어놓은 편견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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