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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풍경 - 정약용 시 선집 ㅣ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10
정약용 지음, 최지녀 편역 / 돌베개 / 2008년 1월
평점 :
시집이다. 시는 어렵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내 마음에 자리잡은 걸까?
[송알송알 사리잎에 은구슬 / 조롱조롱 거미줄에 옥구슬 / 대롱대롱 풀잎마다 총총 / ....]. 동시를 읽으며 머리 속에다 동시 속의 풍경을 그려볼 줄도 알았고, 동시에다 곡을 붙인 동요가 좋아서 줄곧 흥얼거리기도 했던 어리 시절이 있었건만. 동시 수준을 벗어난 시(詩)를 배우면서부터가 아니었을까? 시에 사용된 각종 수사법에 대한 "설명", 시인은 지금 이 대목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라고 "설명되어지는" 시를 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글을 읽고 나서 내가 생각했던 느낌과 "설명되어진" 시의 느낌이 너무나 달라서 "시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는 벽을 두껍게 쌓아왔던 모양이다.
한 편의 시도 아니고 시"집"이어서 더 겁이 났다. 겁이 나서 조금조금씩 읽고, 읽은 걸 소화시키려고 애쓰다 보니 책 읽기가 더뎠다. 사실 다른 사람의 시집이었다면 시도조차 안 해봤을테다. 다산 정약용의 시라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 정일근 시인의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라는 시를 읽어주셨던 분이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다산이 쓴 시는 아니었지만, 그 시와 시를 읽어주셨던 그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마냥 머리 속에 각인되어 쉽게 잊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집을 읽는 사이엔 조선시대 여류시인이라 할 난설헌 허초희에 관한 소설도 한 권 읽었다. 소설에 나온 난설헌의 시와 다산의 시를 비교해 볼 수 있어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그리하여 고등학생 이상이면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작품에 간단한 해설을 붙이기도 하는 등,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는 우리고전100선의 간행사를 읽으면서 제발 어렵지 않길 바랬다. 다행히도 "시는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약간은 허물 수 있었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번역된 말투가 어렵지 않아서 편했다. 이 책에선 90편 정도의 다산의 시를 [세상을 향한 뜻 / 오징어와 해오라기 / 백성이 아프니 나도 아프네 / 하늘 끝에 홀로 앉아 / 달빛이 내 마음을 비추네 / 아내와 아들을 그리며 ]라는 몇 가지 주제로 분류해서 싣고 있다.
다산이라면 으레 국사 시간에 배웠던 애민시, 사회시가 먼저 떠올랐다. 역시나 국사시간에 배웠던 "애절양"이란 제목의 시도 "스스로 거세한 사내를 슬퍼함"이라고 쉽게 번역되어 있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오랜 유배생활에서 오는 적막함 같은 게 그의 시 곳곳에서 느껴졌다. 내가 이 시집에서 가장 관심있게 읽었던 부분은 [아내와 아이들을 그리며]란 주제로 분류된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다. 실학을 집대성했다는, 거중기를 이용해 화성을 쌓았다는, 오랜 유배생활을 했고,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는 그의 사회적인 모습은 귀동냥을 통해서도 익숙하지만, 다산의 가정에서의 모습은 어떠했을까가 궁금했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워 않노라 / 그리워 않노라 슬픈 꿈속의 그 얼굴"(p209)로 나타나는 아내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애틋했다. 부러웠다. 그의 아내가.. 그리고
생김새는 내 자식 같은데 / 수염이 나서 딴사람 갵애. / 집에서 보낸 편지를 갖고 오긴 했지만 / 틀림없는 진짜인지 의심스러워. (p210)라는 "8년 만에 아들을 만나"라는 시를 보며 웃었다. 웃다가 생각해보니 시에 붙은 해설처럼 "이내 슬퍼서 마음이 아파"왔다. 8년만에 아들을 만난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생각하니...
사회시, 애민시를 생각하면 안타깝고, 속이 아리는 시들이 많은데, 113쪽에 실린 그의 "보리타작"이라는 시는 슬픔과 고통이 아니라 풍요로운 즐겁고 흥겨운 백성들의 모습을 보게 된 것 같아 좋았다.
독해력도 상상력도 부족한 내겐 산문보다 시가 훨씬 어렵다. 하지만 다산의 시를 읽다보니 시(詩)도 읽을만한 것임을. 그 속에도 인간의 희노애락이 담겨져 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가 처음으로 시도한 시 읽기였기에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종종 꺼내 읽어보아야겠고, 다른 시인과 시도 많이 접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우선은 책을 덮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