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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해냄 / 2008년 2월
평점 :
오랜만에 접한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이다. 예전에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소설을 통해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국내 작가들의 작품조차 많이 접해보지 않은 터라 몇몇 고전을 제외한 외국작가의 작품으론 그의 작품이 내겐 처음이었던 것 같다. 따옴표도 문단구분도 없이 줄줄이 나오는 그 글을 읽으며 처음에 적응이 안 되서 "뭔 말이야..?" 하면서도 소재가 너무 독특해서, 그의 글 쓰는 방식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다 보니 별 무리 없이 읽었던 기억이 난다. 얼마전엔 [눈뜬 자들의 도시]라는 작품도 나왔다던데, 아직 읽어보진 못했던 차에 이 책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를 먼저 읽게 되었다. 독특하다. 그리고 신선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사람 주제 씨. 그는 중앙호적등기소에서 일하는 사무보조원. "각자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처리해야 할 임무가 있고, 최소한의 일만을 상관에게 넘겨 주면 된다. 말하자면 사무 보조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시도 쉴틈없이 일해야 하고, 일반 직원들은 가끔 올라오는 일들을 처리하고, 부소장들은 정말 드물게 업무에 눈을 돌리며, 소장은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는"(p9) 관료화된 행정 기구의 말단에서 일하고 있는 별 존재감 없는 공무원. 나이는 오십을 바라보고 있고 중앙호적등기소에서 25여년간을 일해왔으며, 결혼을 한 적도 없고, 지금은 등기소 옆의 작은 관사에서 홀로 생활하는 사람이다.
주제 씨 이외에 이 소설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에게도 "이름"이 없다. 소장, 부소장, 정식 직원, 사무 보조원. 혹은 3층 집 여자, 1층에 사는 할머니 혹은 세탁소 주인, 교장 선생님, "모르는 그 여자" 혹은 "미지의 그 여자"가 있을 뿐.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타이틀은 독자들로 하여금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게 한다. 왜 이 소설 속 인물들은 이름이 없을까? 작가는 현대사회의 익명성과 대중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하긴.. 내 생활을 둘러봐도 내 이름이 중요하게 언급될 만한 일들이 없다. 은행에 가면 "몇 번 손님 몇 번 창구로 오세요"이고, 주차를 잘 못 해뒀을 땐 "0000번 차주님 안내실로 와 주세요"고 학교 다닐 때 담임선생님 외에는 "40번 읽어봐." 였었다. 은행에 가면 나는 내가 부여받은 작은 쪽지 속의 번호가 됐고, 주차장에선 0000번 차의 차주가 되었고, 학교에선 "40번"이었다. 이름 없는 그들 그리고 나.
등기소에 일하는 사무보조원 주제 씨에게도, 다른 직원들에게도 등기 서류 속의 개개인은 중요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등기소는 단지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고, 그런 것에만 관심이 있으니까요. 우리가 결혼을 하든, 이혼을 하든, 홀몸이 되든, 등기소에선 그런 것엔 관심도 없어요. 그런 일들 가운데서 우리가 행복하든 그렇지 않든, 행복과 불행은 마치 유명인들과 같은 거예요, 인기가 왔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그보다 더 끔찍한 사실은, 등기소에선 우리가 누군지조차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죠,"(p207)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주제씨가 가진 요상한(?) 취미는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널리 알려진 국내 유명인들의 기사"(p18)들을 수집하여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 유명인들의 정확한 정보 - 예를 들자면, 부모가 누구인지, 그의 세례에 참석한 대부는 누구인지, 정확한 출생지는 어디인지 - 등을 알아내기 위해 그의 관사에서 중앙호적등기소의 사무실로 통하는 "금지된 문"(p21)을 열게 된다. 등기소에서 몰래 찾아낸 유명인사들의 서류에 딸려온 한 평범한 여자의 서류. 거기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주제 씨는 "그 미지의 여자"를 조사한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그녀의 주소를 찾아가고, 이미 오래전에 이사 갔다는 말을 하는 그 여자의 이웃 할머니에게서 그녀에 대한 다소의 정보를 알아내고. 그녀가 다녔다는 학교에 몰래 침입하여 그녀의 기록부를 찾아내고. 그녀가 다녔던 학교에서 수학교사로 있었다는 사실도 알아내고 이혼을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론 그녀가 얼마전에(그의 이상한 조사가 시작되고 난 얼마 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까지.
왜 주제씨는 그녀의 행적을 알아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일까...? 유명하지도 않은 그저 평범했던 한 여자의 삶의 행적을 찾아내느라 심한 독감으로 앓아누울만큼, 20여년간 한번도 그런 적이 없던 그가 일주일치의 병가를 내게 될 만큼 중요했을까..? 그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 존재에 관한 문제였을까...? 엉뚱하게도 몇 해전에 들었던 뉴스가 생각난다. 부모와 떨어져서 다른 도시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한 대학생이 자취방에서 숨진지 몇 개월만에 발견됐다는 뉴스. 사인은 영양실조. 그가 세들어 살던 집의 주인은 몇 달치 세금과 방세를 받았기에 세입자에 대해 "간섭할" 일이 없었다고. 그의 학교 선후배들은 그가 휴학계를 낸 터라 그런 줄 알았다고. 부모는 바빠서 연락을 못 하겠거니 생각하고 지내왔었다고. 그 뉴스를 들으면서 얼마나 섬찟했던가. 개별화된 현대인의 삶과 그 속에서 겪는 소외감에 몸서리쳐졌다.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이야기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내 마음대로 추측해본다.
주제 씨의 끊임없는 독백(혹은 천장과의 대화), 마침표와 쉼표 외에는 어떤 문장부호도 사용되지 않는 작가의 글 쓰는 방식은 아직 적응이 잘 안 된다. 그래서 두 사람의 대화를 읽을 때면 헷갈리는 부분이 종종 있다. 누구의 말인지..(내 이해력의 부족 때문인가 보다.)
참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하는 책이다. 내 멋대로의 해석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에 대해, 개별화된 인간 개개인에 대해 가장 많은 생각을 했다. 몇 해 지나 이 책을 꼭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결심을 해 본다. 사람에 대해 좀 더 많은 경험을 하게 된 나는 이 책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 것인가가 궁금해지기 때문에.. 그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진다. 욕심내서 찾아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