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수의 탄생 ㅣ 일공일삼 91
유은실 지음, 서현 그림 / 비룡소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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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운을 상징하는 7월 7일 한 아이가 태어났다. 결혼 15년 만에 얻은 귀한 아이에게 부모는 일수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일등’ 할 때 일(一) ‘수재’ 할 때 수(秀). 이름하여 백일수가 아이의 이름이다. 일수의 부모는 여느 부모처럼 큰 기대를 한다. 아버지는 태몽으로 황금색이 수북이 쌓이는 꿈을 꾸었으니 아이가 커서 돈을 아주 많이 벌겠지, 생각한다.

 

 일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받아쓰기 100점을 받아온다. 정말 수재가 되려나? 하지만 받침 있는 글자가 나오자 일수는 더이상 100점을 받지 못한다. 학교에서 점점 일수의 존재는 희미해진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없다. 선생님의 질문에도 항상 ‘그런 것 같아요’ 란 대답만 할 뿐이다. 그러다 일수는 서예부에 들어간다. 자신의 글씨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선생님 덕분에 일수의 글씨가 학교에 전시된다. 엄마는 일수를 서예학원에 보내지만 재능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일수는 뭐든 중간을 유지하는 아이였다.

 

 중학교, 고등학교, 군대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일수는 어른이 된 스물 다섯살에도 어머니를 도와 문구점 아저씨가 되었다. 그러다 일수가 초등학교에 쓴 서예 액자로 돈을 벌기 시작한다. 초등학생을 대신한 가훈 대필이었다. 서예로 가훈을 써주는 가훈업자가 된 것이다. 가훈을 찾으러 온 초등학생이 일수의 가훈은 뭐냐고 물으면서 일수의 오래 전 고민이 되살아난다.

 

 ‘일수 씨는 거울 앞에 섰어요. 그리고 오래전 받았던 질문을 따라했어요.

 “일수야, 넌 누구니?” “그런 거 말고, 넌 누구니?” “네 쓸모는 누가 정하지?”

 다리가 저릴 때까지, 일수 씨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보았어요. 국민, 시민, 예비군, 어머니의 하나뿐인 아들, 가훈업자, 일석 반점 단골, 문구점 아저씨인 일수 씨는 분명했어요. 하지만 그것이 아닌 일수 씨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죠.’ 117쪽

 

 동화는 아주 재미있고 유쾌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수가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과정은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일수(一秀)라는 이름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사람들의 기대 때문이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지만 나를 찾아가는 일수의 모습은 어른들의 그것과 다르지 같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고민하는 아이들에게 좋을 책이다. 더불어 뒤늦은 사춘기를 겪는 어른이 읽어도 좋을 동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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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알고 있다
대니얼 샤모비츠 지음, 이지윤 옮김, 류충민 감수 / 다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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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생명체는 경이롭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인간은 인간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생활한다. 하지만 그 시선을 조금만 달리하면 세상은 달리 보인다. 어쩌면 식물의 감각에 대한 연구도 이런 사소한 호기심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물론 과학자에겐 우리와 다른 무언가가 있겠지만 말이다. 주디스 콜의 『떡갈나무 바라보기』가 개미, 벌, 꽃, 나무 등 자연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계를 다룬 책이라면 『식물은 알고 있다』는 식물이 주체가 된 책이다. 그러니까 식물은 인식한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땅의 고정된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식물이 어떻게 사물을 보고, 냄새를 맡고, 느끼고, 듣는지에 대해 인간의 그것과 비교하여 쉽게 설명한다. 빛이 있는 쪽으로 혹 그 반대로 식물이 움직인다는 건(이를 굴광성이라고 한다)은 식물을 키워본 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한데 이것이 식물의 시각이라고 한다. 인간이 볼 수 있는 빛과 색과는 다르지만 식물은 생존을 위해 주변의 시각적 환경은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만 식물은 우리가 감지하는 것보다 더 짧고 긴 파장을 감지한다고 한다. 실험을 통해 식물이 어느 부위로 빛을 보는지에 따라 우리는 인공의 빛을 통해 인위적으로 꽃을 피우게 할 수도 있으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빛을 인식하는 것이 시각이라면 냄새를 맡는 후각은 식물의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재미있는 건 식물의 후각에 대해 과학적 증명이 있기 전 고대부터 인간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집트인이 무화과나무 열매 전체를 익히기 위해 몇 개를 칼로 반으로 자르고, 중국인은 배가 익도록 행을 피웠다고 한다. 대부분의 과일에서 방출되는 에틸렌 가스가 과일을 숙성을 돕는 것이다. 즉 다른 과일의 냄새를 맡으므로 익는 현상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또 있다. 동물이 소리를 통해 위험을 감지하는 것처럼 식물은 후각을 보호를 위한 기능이라고 설명한다.

 

 ‘식물에게 있어 살리실산은 식물의 면역체계를 강력하게 만드는 ‘방어 호르몬’ 이다. 식물은 박테리아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았을 때 살리실산을 생성한다. 살리실산은 식물 체내에서 녹아 세균에 감염된 부위에서 정확하게 퍼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잎맥을 통해 식물의 나머지 부위에 신호를 퍼뜨려 세균이 아직 공격하지 않은 부위에 위험을 알린다.’ (63쪽)

 

 촉각에 대해서는 미모사나, 파리지옥풀을 통해 쉽게 인식할 수 있다. 잎사귀를 건드리기만 하면 재빨리 닫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위험을 감지하고 생존을 위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식물은 촉각을 느끼지만 통증은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이 느끼는 촉각과 통증은 저마다 그 크기가 다르지만 식물은 뇌가 없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것이다.

 

 청각에 대해서 우리는 식물이 음악에 반응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명확한 실험 데이터는 없다고 한다. 저자는 식물은 움직일 수 없기에 바람 소리와 나뭇가지 소리에 대한 반응이 무의미한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서식지를 정복하고 확장하니 식물은 대단한 존재다.

 

 책은 식물의 자기수용감각과 기억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인간의 전정기관의 역할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눈을 감고 코를 만지고 던진 야구공을 받는 행위가 식물에게도 있을까? 식물이 위아래를 구분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원래 뿌리는 아래를 향하고 싹은 하늘을 향하는 게 아니라 모든 게 중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식물이 위아래를 구분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18~19세기에 걸쳐 놀라울 정도로 진전을 보였다. 처음으로 뒤아멜은 모종들이 뿌리는 아래로, 싹은 위로 자라도록 스스로 성장 방향을 되잡는다는 것을 밝혀냈고, 다음으로 나이트는 위아래 성장의 이유가 중력임을 입증했다. 그다음 다윈 부자는 뿌리 끝에 중력을 감지하는 기작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134쪽)

 

 식물이 기억을 한다고? 맞다, 기억한다. 식물의 떡잎에 상처를 가했을 때 그것을 기억해 그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더 많이 자란다는 것이다. 또한 추운 겨울의 기후를 경험해야 개화하는 밀은 따뜻한 겨울이 지나서는 개화하지 않는다. 이 밀의 기억을 이용해 냉장고에 넣었다 심었더니 싹이 낳다고 한다.

 

 정말 신선하고 흥미로운 책이다. 다윈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자들의 끊임없는 실험과 연구 결과가 아니었다면 밝혀내지 못 했을 식물의 감각이다. 계절마다 같은 자리에서 꽃을 피워내는 게 자신의 모든 감각을 이용한 결과라니, 봄이 되면 제일 먼저 꽃을 피울 목련을 보면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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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 일에서든, 사랑에서든, 인간관계에서든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관계 심리학 ㅣ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1
배르벨 바르데츠키 지음, 두행숙 옮김 / 걷는나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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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의도와 상관없이 나의 행동과 말이 상대방을 아프게 만든다. 그로 인해 관계는 엉망이 된다. 이전의 좋은 감정은 사라지고 만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상처받는 나는 나만 생각한다. 상처는 점점 커지고 깊어진다. 어떻게든 빨리 상처를 치유할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상처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띠귀 맞은 영혼>으로 만난 배르벨 바르데츠키의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는 그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나의 옛 상처까지 치유해 줄 수는 없다. 우리의 감정을 책임져야 할 사람은 우리 자신이지 다른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 자신은 물론 상대방을 이해하고 노력해야 한다.’ 83쪽

 

 물론 아무리 훌륭한 상담가와 의사를 만나더라도 내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모든 감정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책을 통해 만나는 사례들은 어느 특정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서 자라는 상처, 슬픔, 자괴감, 분노인 것이다. 어떤 이는 더 많이 사랑받고 싶을 뿐인데 그 마음을 몰라주는 연인에게 상처를 받고, 어떤 이는 헤어졌거나 이미 죽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한다.

 

 때로는 상처의 원인이 전부 상대방(가족, 친구, 연인, 동료, 상사)에게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관계는 상호적이므로 나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무엇이 나를 힘들게 했는지 상대가 모를 수도 있으니 표현해야 한다. 사랑하는이라고 해서 내 마음의 우물의 깊이를 알 수 있는 이는 없으니까.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저마다 가슴속에 아직 성장하지 못한 아이가 있다. 잊었다고 믿었던 어린 시절의 아픈 감정이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힘들더라도 그 상처와 마주해야 한다고 말이다. 힘겨웠던 순간을 꺼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안다. 하지만 평생 그것과 함께 살면서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상처가 끔찍할수록 꽁꽁 감추는 일은 위험하다. 억눌린 상처가 인생 전체를 파괴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설사 고통을 다시 겪게 되더라도 한 번은 상처와 마주해야 한다. 유배된 상처가 저절로 낫는 일은 없다.’ 148쪽

 

 다양한 사람들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언제나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럴 때마다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는 확신은 자존감에서 온다. 그러니 누구보다 나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 더불어 상처를 인정하고 어리석은 복수를 꿈꾸거나 마음의 문을 닫지 말아야 한다.

 

 ‘자존감을 바로 세운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과 숨기고 싶은 단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다른 사람보다 잘할 수 있는 것, 적어도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뒤떨어지지 않는 점에 자부심을 갖는 것이다. 그렇게 장단점이 모두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나’ 를 받아들이고, 열등감을 극복하면서 원하는 이상을 추구할 때 자존감은 강화된다.’ (231, 232쪽)

 

 사소한 말 한마디에 자주 속상하고 화를 어느 시절의 나를 돌아본다. 지금은 어떤 상황, 어떤 상처에도 의연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배르벨 바르데츠키의 책으 통해 많은 도움을 받은 건 맞다. 그래서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다. 상처로 너덜너덜해진 마음과 관계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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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폐허의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절망의 팡세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챕터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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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을 때마다 절망과 고통에 부딪히는 시대다. 하여 많은 이들이 환멸의 삶을 살고 있다. 길을 잃을 양처럼 목자를 찾는다. 불안과 허무로 채워진 삶의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인문학과 철학을 향한 급증된 관심을 보면 그곳에 무언가 해답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고백하자면 에밀 시오랑의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어쩌다 읽게 된 책이다. 그러니 나는 에밀 시오랑의 철학이나 사상에 대해 알지 못한다. 때문에 그의 사색에 더 쉽게 흡수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상에 쫓기는 듯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사유를 선물하는 책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무한 긍정이나 행복에 대해 말하는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죽음, 고통, 허무, 슬픔, 우울로 가득하다. 그것이 모두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고통에 대해 생각하고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에밀 시오랑은 ‘유’가 아닌 ‘무’ 를 통해 존재를 말하는 듯하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던 시절, 살아내기 위해 살았던 시절에는 죽음을 두려워했을까? 이런 구절을 마주하면서 죽음은 삶의 동의어구나 생각한다.

 

 ‘삶의 구조 자체에 죽음이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의 구성 속에 없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죽음을 없음 없이 생각할 수 없다. 삶을 삶의 부정이라는 원칙 없이 생각할 수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곧 없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음은 ‘없음’ 이 결국 삶을 누르고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없음을 향하는 도정을 현재화한다.’ (「죽음에 대한 소고 」중에서, 45쪽)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나의 삶을 생각하니 말이다. 아니, 슬픔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우리는 여지없이 죽음을 생각하며 살고 있다. 다만 그것을 누가 알아차릴까 두려울 뿐이다. 하지만 슬픔의 얼굴은 표가 난다. 점점 깊어지고 넓어지는 슬픔에 표정은 잠식당하고 만다. 그리하여 결국엔 슬픔의 주제를 잃어버리고 에밀 시오랑의 말처럼 슬픔은 신비로 교체된다. 아무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는 슬픔이라니...  

 

 ‘깊은 슬픔으로 충격을 받은 사람의 얼굴에서는 너무도 많은 외로움과 체념을 읽을 수 있어, 슬픔에 찬 얼굴은 곧 죽음이 밖으로 드러난 형상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슬픔은 신비로 향하게 된다. 그 신비는 너무도 깊어 슬픔을 수수께끼로 남긴다. 만일 신비의 등급을 매긴다면 슬픔은 무한하고 끝없는 신비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슬픔에 대하여 」중에서, 73쪽)

 

 어제와 다르지 않는 오늘을 살면서 우리는 때로 수많은 어제를 그리워한다. 그때는 좋았는데, 그때가 행복했는데,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제에 속한 삶이 아니라 오늘을 느껴야 한다고 에밀 시오랑은 말한다. 그가 말하는 순간은 오늘인 것이다. 현재를 기억하고 현재의 나를 사랑하는 말이다. 쉬운 말처럼 보이지만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의 상처가 남긴 환부를 지켜보며 살기 때문이다. 그는 이별했던 순간, 무시당했던 순간, 부끄러웠던 순간을 현재의 순간으로 채울 수 있어야만 충만해질 수 있다는 걸 각인시켜 준다.

 

 ‘영원한 현재는 실존이다. 영원한 현재를 경험하면서 실존은 자명해지고 확실해진다. 순간의 연속에서 떨어져 나온 현재는 없음을 벗어나 존재를 생산한다. 순간의 기쁨 그리고 사물의 온전한 있음이 주는 매력에만 관심을 쏟는 사람, 순간 속에 살 수 있고, 현재를 빈틈없이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순간 속의 절대」중에서, 155쪽)

 

 모든 구절에 밑줄을 긋고 싶다. 아마도 이 책을 만나는 모든 이가 그럴 것이다. 주제마다 우울과 허무가 산재해 있지만 분명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왜 나만 불행할까, 왜 나만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절망하는 이에게 나의 심연과 마주하게 만든다. 산다는 건, 그 자체가 고행이다.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지만 내가 느끼는 고통은 세상의 전부가 당연하다. 그럼에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감당해야 할 고통의 몫이 줄어든다. 안다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 에밀 시오랑은 그것을 아는 사람이다.

 

 ‘고통이 아무리 크더라도, 외로움이 아무리 깊더라도, 세상과 나 사이의 거리는 세상을 더 감동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객관적 의미나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목표를 찾을 수 없지만, 존재의 다양한 형태들은 내게 언제나 슬픔과 희열의 원천이다. 한 송이 꽃의 아름다움이 우주의 궁극적 목적을 충분히 보상해주듯, 청명한 하늘에 떠 있는 작은 구름 조각이 나의 우울한 염세주의를 즐겁게 해주는 순간들을 경험했었다. 내면에 깊이 빠진 사람들은 지극히 미미한 자연의 광경에서도 상징적 의미를 발견한다.’ (「고통의 저주스러운 원칙」중에서, 198쪽)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는 제목처럼 곧 해가 뜬다는 명징한 사실을 잊고 살면 우리는 어둠 속에서만 살아갈 것이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어둠이 길어질수록 마주할 빛은 크고 눈부시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만 고통과 절망의 삶에 지배당하는 게 아니라 삶을 지배하고 이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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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 - 애니메이션과 인문학, 삶을 상상하는 방법을 제안하다
정지우 지음 / 이경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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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다. 어린 시절 놓치지 않고 보았던 <들장미 소녀 캔디>나 <빨강머린 앤>로 대표되는 만화들을 본 기억이 전부다. 그러니 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은 내게 당황스러운 주제다. 애니메이션의 거장이라 불리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미래소년 코난>에 열광했지만 그 후로는 OST를 들을 뿐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제대로 본 일본 소문으로 들어 본 <진격의 거인>에 왜 십대들이 열광하는지 알지 못한다. 일본 만화란 점에서 더욱 관심을 갖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가장 최근에 <늑대아이>를 보았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 시대를 보는 통로로 만화를 선택했다. 『애니메이션에 빠진 인문학 』은 다소 어렵고 딱딱하다고 여기는 인문학과 애니메이션의 만남으로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저자는 1990년대 이후 급격하게 개인화된 사회를 현대로 규정한다. 과거에는 국가와 사회를 위한 삶이 주를 이루었지만 근대, 즉 현대화의 사회는 가족이나 개인처럼 소규모의 사회를 위해 집단화된다는 거다. 이러한 현상을 <그렌라간>과 <원피스>를 통해 분명하게 설명한다.

 

 <원피스>는 내용을 몰라도 제목으로 더 친근한 만화다. 해적왕이 되고자 하는 루피, 최고의 검사를 꿈꾸는 조로, 닥터 히루루크의 우정과 모험을 통해 개인의 행복을 위한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생각한다. 현재까지 끊임없는 사랑을 받는 이유를 생각하면 우리 현실이 얼마나 행복과는 먼 거리에 속해있는지 알 수 있다.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은 늘 보다 순수하고, 보다 초월해 있고, 보다 자기만의 신념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 애니메이션에는 분명 우리가 감동할 만한 요소가 있고, 우리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인간 정서의 핵심적인 부분이 있고, 인간 삶을 통째로 규정지을 수 있는 강한 언어와 감동이 존재한다.’ (76쪽)

 

 <강철의 연금술사>를 통해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우애를, <충사>에서는 현실이 아닌 다른 삶을 꿈꾸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벌레는 다루는 인간이라는 제목의 우루시바라 유키의 <충사>는 무척 독특하게 다가온다. 벌레들은 세계 곳곳에 살고 있지만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존재다. 주인공 강코는 그 존재를 느끼고 그들의 세계를 인식한다. 그것을 만화에서는 벌레로 명했을 뿐이다. 두 세계에 속한 강코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현실적 사회와 자기만의 삶을 살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렇다면, 현재 가장 인기를 끈 <진격의 거인>에서는 무엇을 봐야 할까? 만화는 인간을 먹는 거인으로부터 안전을 지키기 위해 성벽 안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주인공 에렌은 거인과 싸우는 병사로 인류를 구원하는 상징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에린은 성벽 바깥의 세상이 궁금하다. 에렌의 행동을 통해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이 사회의 이익이 될 수 있음을 확인시키며 더불어 혼자가 아닌 함께 사는 삶을 말한다.

 

 ‘인간은 ‘마음으로 연계’ 되어 있다. 인간은 타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순간 ‘인간’ 의 존재 의미도 끝이 난다.’ (124쪽)

 

 저자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묻는 듯하다. 만화 속 인물들의 용기, 사랑, 열정을 통해 행복을 꿈꾸는 인간 본연의 형상을 말이다. 점점 개인화라는 이름으로 단절되는 세상에 필요한 내면을 충족시킨 아름다운 상상의 결정체가 바로 만화라는 것이다. 우리가 잊고 있던, 잃어버리고 살아온 우정, 꿈, 신념을 찾아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게 인문학인지도 모른다.

 

 ‘삶의 추구란, 바로 우리의 가능성에 열려 있는 것이며, 꿈을 잊지 않는 것이고, 매일 마주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는 것이며, 이 순간의 소중함으로부터 내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191쪽)

 

 아쉬운 건 저자가 소개한 애니메이션 작품이 모두 일본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건 우리나라의 애니메이션이 아직 활발하지 않다는 거다. 다음에는 우리 사회와 문화를 반영하는 우리나라 작품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는 즐거운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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