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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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눈사람이 되어 버린 그녀,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한강의 소설을 읽는 겨울, 헤어짐도 따뜻할 수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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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경기문학 3
배수아 지음 / 테오리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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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배수아의 소설에 대해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 소설들이다. 그녀가 추구하는 감각이나 사고가 마냥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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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내리는 걸 알았더라면 조금 더 일찍 일어날 것 그랬네. 혼잣말로 시작하는 하루다. 미세먼지를 날려 줄 비라 반갑기도 하고 생각보다 제법 굵은 빗줄기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자니 괜히 울울해진다. 초대하지 않은 감기는 빨리 나가지 않고 이제라도 독감 예방주사를 맞아야 하나 생각한다. 생각은 늘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다. 감 농사가 풍년이라 지인이 보낸 상자에는 감이 가득하고 거실에 바꿔 달은 커튼은 무거움이 느껴진다. 11월에는 이런 책들이 나를 부른다. 곧 출간 예정인 박준의 두 번째 시집, 나희덕의 시집. 한때는 열심히 사 모으던 시집, 이제는 모으는 일도 줄어들었다. 여하튼 두 시집은 궁금하다. 시집과 함께 구병모와 정세랑의 소설집도 나왔다. 둘 다 매력적인 작가.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집도 마찬가지다. 비 오는 아침에 드는 장필순의 노래,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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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건너가는 중입니다 - 세상 끝에 내몰린 사람들, 독서로 치유하다
앤 기슬슨 지음, 정혜윤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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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들의 고통에 새롭게 민감해지고 스스로의 고통에 더 관대해지도록, 우리에게는 친절과 인내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상기하도록 일깨워주는 계기가 된 까닭이다. 우리는 희망한다. 아니, 안다. 반대편에는 건강함과 좋은 느낌이 있고 혼자서든 아니면 치유법을 기꺼이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과 함께든 어떻게든 이 나쁜 상황의 연속을 뚫고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259~260쪽)

 

 누구나 가족을 잃는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시기가 다를 뿐 헤어짐은 예정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통과 슬픔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슬픔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그것을 온전히 헤아릴 수 있는 타인은 존재할 수 없다. 누군가는 갑자기 예고 없이 가족을 잃는다. 대부분은 사고로 인한 것이다. 대책을 간구할 여유도 없이 허망하게 가족을 잃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떠올리는 사건이 있다. 마지막 인사를 전할 순간도 허락되지 않은 이별. 앤 기슬슨의 『슬픔을 건너가는 중입니다』을 읽으면서 그들이 건너가고 있을 슬픔을 나는 알 수 없겠구나 생각했다. 이 책은 ‘세상 끝에 내몰린 사람들, 독서로 치유하다’란 부제를 달았지만 실상은 저자인 앤 기슬슨의 내밀한 고통과 상처, 그리고 그것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담겼다고 할 수 있다.

 

 앤 기슬슨의 삶엔 쌍둥이 여동생들의 자살이라는 치유될 수 없는 슬픔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로의 슬픔을 알아보는 남편 브래드를 만난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새로운 시련은 그녀를 강타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온몸으로 마주한 것이다. 도시 전체가 카트리나의 폭격을 맞은 뉴올리언스는 그녀의 삶의 터전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 그럼에도 삶은 이어지고 아이를 키우고 일상을 영위하면서 괜찮아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무기력한 자신을 발견했고 삶의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된다. 지인이 독서클럽을 제안했고 앤 기슬슨과 남편은 사람들을 초대했다. 저마다의 고통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 모여 ‘실존적 위기에 빠진 사람들의 독서클럽’이 시작되었다. 2011년 1월부터 한 달에 한 권의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과정은 보통의 독서모임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책이라는 것이 상처를 치유하는 치료제가 될 것인가? 내 경우를 말하자면 도움이 된다고 답할 수 있다. 앤 기슬슨의 『슬픔을 건너가는 중입니다』이 명확한 답을 제시한다고는 할 수 없다. 1년 동안 독서클럽은 진행되었다. 한 권의 책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제시하고 소중한 문장을 읽고 나누며 자신의 일상과 공유하는 과정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앤 기슬슨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독서클럽이 진행되는 과정에 암 투병을 하던 아버지를 잃었고 상실은 더욱 커져만 갔다. 책에는 그녀에게 애증의 대상인 가족에 대한 주로 등장한다. 어린 시절 서로를 의지하며 다른 형제들과는 어울리지 못했던 쌍둥이 여동생들에 대한 이야기, 그녀들의 자살이 불러온 슬픔의 무게로 가득하다. 너무 무겁고 어두워서 독서클럽을 통해 슬픔의 본질에서 어떻게 이겨나갈 수 있을지 방법을 기대했던 독자에겐 아쉬울 수 있다.

 

 독서클럽을 통해 읽은 책에 대한 감정을 말하는 과정에서 가슴 밑바닥에 깔려있던 이야기를 토해낼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혼자는 도저히 꺼낼 수 없는 것들을 같이 거들어주는 것이다. 우리가 대화에 힘을 얻는 말이다. 어쩌면 책은 하나의 도구이자 방편이며 중요한 건 곁에 있는 사람은 아닐까 싶다. 가족들이 쌍둥이 여동생들의 언급하지 못하고 지내온 시간을 조금 알 것도 같다. 하지만 결국엔 그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누게 된다. 우리 가족도 그랬다. 너무 일찍 돌아가신 엄마를 제외하고 최근에 떠난 아버지와 큰언니에 대한 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못했다. 그것이 마치 큰 잘못인 듯 말이다. 그러나 상실과 슬픔은 숨기고 감추어야 할 게 아니다. 앤 기슬슨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쌍둥이 동생들을 “죽은 네 이모”,“죽은 내 동생들”이라 말했다. 어떻게 죽었는지 사실대로 말하지도 못했다. 힘들다는 이유로, 슬픔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래서 이런 고백은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과 대화를 하던 중에 나도 모르게 쌍둥이를 “너희들이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내 동생들”이라고 불렀다. 그 표현이 우리 모두를 편안하게 해준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쌍둥이를 다른 표현으로 부르는 것만으로도 지나치게 그들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서 우리 모두가 해방되었고, 그들이 살았던 삶과 그들에게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삶의 모습들이 스르륵 풀려나왔다. 그들은 절대 우리 아이들에게 생생하게 와닿지 않을 것이고 우리에게도 조금씩 희미해져가고 있지만, 가끔씩 나는 한동안 보지 않았던 그들의 사진을 볼 것이다. 카메라를 의식하는 웃음보다 그들이 살아가는 실제 모습을 더 잘 포착한 어색한 표정이나 몸동작 같은 것들을. 그러면서 나는 불시에 그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릴 것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살았고 사랑받았다. (344쪽)

 

 독서클럽에서 다룬 책과 앤 기슬슨이 언급한 책 가운데 내가 소장한 책도 있었다. 아직 읽지 못한 책이라는 게 다행인지도 모른다. 존 치버의 『존 치버의 편지』대신 존 치버의 『존 치버의 일기』가 있지만 그래도 괜찮을 듯하다. 거기다 타데우쉬 보로프스키의 『신사 숙녀 여러분, 가스실로』를 읽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책이 주는 위로, 책을 둘러싼 이들의 공기가 우리를 때로는 숨 쉬게 한다. 내가 느낀 것과 이 책에서 전하려는 게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 책과 사람이 존재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여전히 슬픔을 건너가는 중이겠지만 외로운 그 길을 함께 하는 이가 있다면 조금은 편안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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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언니는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결정하고 수술이 끝날 때까지 가족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수술이 다 끝난 후에야 연락을 했다. 그것도 퇴원을 바로 앞두고 말이다. 퇴원 후 집에 왔을 때에도 암이란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큰언니가 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화학요법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나는 큰언니가 치료를 받는 동안 곁에서 식사를 책임지고 간병 아닌 간병을 했다. 항상 큰언니의 돌봄을 받아왔던 내가 큰언니의 보호자가 된 것이다. 큰언니의 유품은 온전히 정리가 되지 않았다. 정리를 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故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를 읽는 일은 어렵고도 힘든 일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 읽을 수 있는 분량인데도 그랬다. 메모 하나하나를 따라 읽는다는 건 김진영의 마지막을 향해 나가는 것이라는 걸 알기에. 그가 베란다에서 듣는 피아노 소리, 바라보는 바깥의 풍경, 소란스러운 삶의 움직임, 가만히 벤치에 앉아 마음을 다스렸을 시간, 내리는 비를 보면서 든 생각. 그 모든 것이 요란하지 않았고 단정했고 명확했다. 살 만큼 살았다는 건 어떤 것일까. 살 만큼이란 시간은 얼마를 의미하는 것일까. 언제부턴가 내게 죽음은 저 멀리 있는 불확실한 명제가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를 또렷하게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을 지켜보고 경험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생의 유한함을 인정하는데 조금 평안해졌기 때문이다. 언제 내게 도래할지 모르는 그 마지막에 대해 종종 생각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 바람인 것이다.

 

 2017년 7월부터 2018년 8월까지 234개의 짧은 글은 삶의 순간에 충실한 태도였고 의지였다. 분명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했을 텐데, 그 어떤 징후도 찾을 수 없고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슬픔이 몰려왔다. 큰언니가 남긴 글도 그랬다. 두려운 감정은 없었고 담담하게 마지막 정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전했고 우리는 대부분 그것을 따르려 노력했다. 어쩌면 나는 김진영의 글을 읽으면서 여전히 그리운 큰언니를 마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3년이란 시간은 길 수도 있고 짧은 수도 있다. 애도의 시간의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조금 세게, 조금 약하게 그 강도를 오르내릴 뿐이다. 문득 한 문장, 혹은 두 문장, 그리고 조금 더 길어진 글을 쓰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증이 커졌다. 그러다 이내 사라졌다. 나는 알 수 없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알 수 없고 그것을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글에 담긴 감정을 헤아리려 애쓰지 않았다. 편안했을 거라 단단했을 거라 짐작한다.

 

 비 오는 날 세상은 깊은 사색에 젖는다. 그럴 때 나는 세상이 사랑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가득하다는 걸 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는지도 안다. (75. 92쪽)

 

 나는 나를 꼭 안아준다. 괜찮아, 괜찮아…… (122. 145쪽)

 

 어떤 시간은 아주 천천히 오고 어떤 시간은 너무 빨리 온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이어지는 의사와의 면담, 가족과 지인들의 연락. 그 모든 것이 특정한 시간에 다 도착했을 것이다. 김진영은 그 안에서 흔들리지 않고 삶의 균형을 잡은 것 같다. 그런 평정심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는 치료를 하는 과정에서도 칼럼을 연재하고 책을 읽고 철학자의 시선을 놓지 않았다. 롤랑 바르트, 마르셀 프루스트, 니체, 그들을 언급하며 사유하는 시간을 잊지 않았다. 읽다 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가끔씩 펼쳐보는『애도 일기』와 나는 조금 더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 『아침의 피아노』도 그러할 것이다.

 

 모든 것이 꿈같다. 그런데 현실이다. 현실이란 깨지 않는 꿈인 걸까. 그 사이에 지금 나는 있다. (24. 34쪽)

 때와 시간은 네가 알 바 아니다. 무엇이 기다리는지, 무엇이 다가오는지 아무도 모른다. 모든 것은 열려 있다. 그 열림 앞에서 네가 할 일은 단 하나, 사랑하는 일이다. (105. 125쪽)


 내가 사랑했던 것들. 그 모든 것들을 여전히 나는 사랑하고 있다. 이전보다 더 많이 더 많이 …… 이것만이 사실이다. (203. 243쪽)

 

 삶은 유한하고 불안하다. 하지만 그것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삶을 지속할 수 없다. 죽음에 대해 깊은 사유의 시간도 필요하지만 그것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묻는다. 생의 마지막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무엇에 감사하고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까. 김진영의 말처럼 그것은 사랑일 것이다. 큰언니의 마지막, 우리도 그러했다. 수많은 말들이 떠다녔지만 선택된 말은 사랑이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은 사랑에 포위됐다. 사랑한다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진부하고 평범한 말, 우리가 만든 거룩하고 고귀한 말. 아픔이 있고 위로가 필요한 곳에 사랑을 전하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조용한 손길에 담긴 사랑.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말고 잡고 있어야 하는 사랑.

 

 우리에겐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생, 사랑했으니 후회 없는 생을 살라고 그는 말하는 듯하다.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과 이별하는 일은 너무도 고통스럽다. 그러나 사랑을 기억하고 살아간다면 조금씩 회복될 것이다. 김진영의 바람처럼 이 책은 그 사랑을 기억하고 어루만지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분명한 일이다. 삶을 사랑하는 일, 다양한 형태로 다가오는 사랑, 그 모든 걸 껴앉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것이 애도의 시작이며 끝은 아닐까.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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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3 06: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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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5 11: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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