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vs. 알렉스 우즈
개빈 익스텐스 지음, 진영인 옮김 / 책세상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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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눈을 뜨니 세상이 나를 주목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스타가 된 것처럼 우쭐하기보다는 어리둥절할 것이다. 어디를 가든 알아보는 사람들과 질문이 이어진다면 피곤하다. 그러니 열 살 어린 나이에 우주에서 날아온 운선에 머리를 맞은 우리의 주인공 알렉스는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2주 동안 혼수상태였다가 깨어난 세상, 알렉스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예전의 자신과 다른 삶을 살아간다.

 

 소설은 운석을 맞은 아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온다. 확률적으로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는 게 우리 삶이라는 걸 알려주듯 말이다. 알렉스는 한동안 집에서 생활한다. 운석을 맞은 충격으로 간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간헐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러나 알렉스는 몸이 주는 신호를 감지하고 점차 잘 견디게 된다. 알렉스는 운석 때문인지 공부를 열심히 한다. 특히, 과학, 우주를 좋아한다. 문제는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한다. 엄마에게는 차마 말하지 못할 고통이다. 그러다 아이들을 피해 어느 헛간으로 피하는데, 그곳에서 소중한 인연 피터슨 씨를 만난다.

 

 ‘카오스에서 질서를 찾는 것은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질서 아래 숨은 카오스를 찾을 수도 있다. 질서니 카오스니 이런 개념들은 불안정하다. 옷을 바꿔 입고 장난치는 쌍둥이와도 같다. 질서와 카오스는 자주 섞이고 겹친다. 시작과 끝이 그렇듯이. 세상일은 겉보기보다 복잡하기도 하고 단순하기도 하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진다.’ 111쪽

 

 월남전에 참전했고 아내가 죽은 후 애완견 커트와 지내는 피터슨은 주변 사람들과 교류가 적다. 이웃들에게는 괴팍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알렉스와는 점점 가까워진다. ‘커트 보거네트’를 좋아해 개 이름까지 커트라 지은 피터슨을 통해 그의 소설과 만난다. 그러다 애완견 커트가 갑자기 죽게 되고 혼자 남은 피터슨의 강이 악화된다. 급기야 불치병 진단을 받는다. 알렉스는 커트 보거네트를 읽는 독서 모임을 만들어 피터슨이 사람들과 교류하게 도와준다. 

 

 피터슨은 다가오는 죽음을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하려 한다. 그러니까 자살을 시도한다. 알렉스가 발견하고 고비를 넘겼지만 피터슨은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 열여덟 알렉스는 그런 피터슨의 마음을 이해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돕는다. 그리고 중대한 계획을 함께 실행한다. 스위스로 자살여행을 떠난다. 피터슨의 선택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죽음과 맞닿는 여행, 둘은 행복하다.

 

 ‘입자들은 튀어나오면서 존재하는 동시에 순간의 작은 파편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너무 빨라서 그것들의 존재를 기록할 만큼 예민한 도구는 발명되지 않았다. 사라진 다음에나 그 존재를 짐작할 수 있을 뿐.(…) 나는 깨달았다. 인생의 문제란 ‘별난’ 입자와 닮았다는 것을. 우주의 크기와 규모에 비하면 다른 모든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작고 금방 지나가는 사건일 뿐이다. 우주의 규모로 보면, 별조차 눈을 깜박이는 시간보다 훨씬 더 빨리 지나간다.’ 429쪽

 

 알렉스와 피터슨의 사귐을 통해 삶과 죽음, 우정에 대해 생각한다. 우연이 운명으로 이어지는 뜨겁고 따뜻한 이야기. 책에 등장하는 물리학 용어나, 우주에 대한 이론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거대한 우주 공간에서 펼쳐지는 삶의 향연은 아름답다. 때로 치열하게 망가지고 때로 폭발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책을 통해 만나는 커트 보거네트의 소설에 대한 부분도 매우 흥미롭다. 이 책을 읽고 커트 보거네트의 소설을 읽는 이가 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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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 싶었던 책은 루이스 어드리크의 『그림자 밟기』였다.  최지월의 『상실의 시간들』에 밀려 다음으로 미뤄진다. 받아든 책을 펼쳐 만난 문장들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두 번째로 펼쳐진 곳이다.

 

 ‘엄마는 세 번의 출산을 모두 집에서 했다. 세 번 다, 아버지는 근무하느라 집을 비웠다. 옆집 아주머니가 도와주긴 했다지만, 엄마는 소희 언니를 낳을 때 호되게 고생했기 때문에 내 출산 예정일에 맞춰선 시댁에 연락했다. 친할머니가 왔는데, 나는 예정일에 나오지 않았다. 보름쯤 해산을 기다리던 할머니는 급한 일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고 시골로 돌아갔다. 나는 고 사이에 태어났다. 열네 시간에 걸친 지독한 난산이었다. 내가 태어난 뒤에 할머니가 다시 왔지만, 이제 몸도 풀었으니 일해도 되겠다면서 밥을 차려내라, 국이 맛이 없다, 집이 더럽다, 애 꼴이 저게 뭐냐 하는 등등의 잔소리와 훈수로 엄마 가슴에 평생 잊지 못할 한을 남겼다.’ (80쪽)

 

 내 어머니를 생각한다. 엄마는 다섯 번 출산을 했다. 마지막 남동생의 출산엔 내가 있었다. 뜨거운 물을 끓이는 등 분주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할머니는 아들 손주라 좋아했다. 하지만 그 귀한 손주를 낳은 엄마에겐 어떤 말도 건네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소설처럼 아버지는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두 달이 지났다. 아버지 방은 사라졌다. 동생이 새로운 장판을 깔고 벽을 도배했다. 방 어느 벽엔 구름무늬가 있는 벽지가 있었다. 그리고 동생이 들어왔다. 아버지가 잠들었던 방에서 동생이 잠을 잔다.

 

 밤새 쏟아지던 장맛비가 사라진 시각, 나는 제습기를 돌린다. 창을 닫고 선풍기를 켜고 제습기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이런 문장을 옮긴다. 단편집 『뱀』으로 만난 윤보인의 장편소설 『밤의 고아』가 들려주는 문장들.  ‘문을 열면 계단이 보인다. 계단을 내려간다. 서른한 개의 계단, 아니 서른세 개의 계단, 계단 끝에는 지하실이 있다. 지하실 옆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다. 그 안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사람들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9쪽)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어딘가를 향해 걸을 것이다. 정해진 곳을 향하거나 알지 못하는 낯선 곳을 찾아 나설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딘가에 멈춰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이광호의 산문집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속 문장처럼 말이다.

 

 ‘절대로 닿을 수 없을 만큼 누군가와 떨어져 있다면, 죽음처럼 건너갈 수 없는 곳에 누군가가 있다면, 너는 다른 시간 속에 있는 것이다. 아득한 거리는 아득한 시간이다.’ (37쪽)

 

 나와 아버지의 거리, 나와 엄마의 거리는 아득한 그것이다. 때로 아득해서 꿈속을 헤맨다. 때로 아득해서 멍으로 채워진 시간을 보낸다. 부재를 인정하고 부재를 소멸해야 하는 일이 남은 것일까?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커진다. 엄마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다른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아빠가 아닌 아버지.

 

 

 

 

 

 

 

 

 

 

 

 

 

 

 

 

 

 

 

 

 

 

 내게는 이해인 수녀의 책이 아닌 백지혜의 책인 『밭의 노래』가 나왔다. 백지혜의 책이 처음이라면 『꽃이 핀다』와 함께 만나면 더 좋을 것이다. 끝이 보이는 장마, 그 뒤를 이어 달려올 더위를 날려줄 책으로 『유괴』를 고른다. 초복, 여름이라는 삶에 지친 당신에게 윤희상의 시집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에 수록된 이 시를 건넨다.

 

 

  버드나무로부터의 편지 - 윤희상

 

 

 이른 아침부터 언덕을 거닐며 안으로부터

 울컥 차오르는 마음을 읽고 있다

 그리움이거나

 미움이거나

 목마름이거나 그럴 테지만, 뜨겁다

 이내 바람이 불어 부러지는 것은 나뭇가지이지만,

 아픈 것은 마음이다

 이제 다치지 않는 바람이 되고 싶다

 날마다 그런 마음을 드리운 그림자를 물 위로 띄워보지만,

 아무도 건져서 읽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바람에게로 간다

 이미, 풀어내린 긴 나뭇가지의 잎사귀들이

 바람 속으로 먼저 들어서고 있다

 언덕에서 바람에게 몸과 마음을 다 맡기도 있다

 벌써 바람과 함께 놀고 있다

 

 -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6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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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희돌이 2014-07-22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꽃이 핀다]의 그림작가였군요. 이해인의 글에 그린 사람이...어쩐지 푸근하고 낯이 익는 그림이다 했어요^^
아이 어릴때 사놓곤 그림이 너무 예뻐 자주 들여다보곤 했는데...
[그림자밟기] 읽으려고 하고 있는데, 선뜻 손이 안가네요.
가슴아픈 가정사를 읽으면 우울해지려고 해서...

자목련 2014-07-23 10:11   좋아요 0 | URL
남희돌이 님도 <꽃이 핀다>를 곁에 두셨군요. 저도 종종 들여다보는 책이에요.
이번 그림책엔 이해인 수녀님의 글이 있어 한층 더 풍성할 듯해요.

[그림자 밝기]는 지금 오는 중인데, 저도 언제 읽게 될 지 모르겠어요.

비가 오는 수요일, 평온하게 보내세요^^
 

 

 한 권의 책이 운명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거창하게 운명이라고 표현했지만 사랑을 주고 싶은 책이라는 말이 맞겠다. 정호승의 산문집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가 한 시간 전에 도착했다. 동아일보에 연재된 글이라고 하는데 나는 칼럼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에 처음 만나는 글이다. 아무 곳이나 펼쳐 읽었는데도 참 좋다. ‘좋다’란 말속에  따뜻함, 포옹, 기운, 안부, 토닥임, 친구 같은 뜻이 담겼다. 뭐라고 표현하면 정확할까? 아니다, 정확하지 않아도 좋겠다.

 

꽃은 왜 아름다울까. 그것은 겨울이라는 고통을 견뎌냈기 때문이다. 오늘의 청년 세대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라면 지금은 묵묵히 고통을 견뎌내야 할 때다. 나이 든 중년 세대의 인생은 짧지만 젊은 청년 세대의 인생은 길다. 인생은 일회적인 것이지만 수능이나 입사 시험은 일회적인 게 아니다. 수능이나 입사 시험에 실패했다고 해서 인생 전체를 실패한 것은 아니다.’ (127쪽)

 

 ‘사람이든 나무든 직선보다 곡선의 삶의 자세나 형태가 더 아름답다. 새들은 곧은 직선의 나무보다 굽은 곡선의 나무에 더 많이 날아와 앉는다. 함박눈도 곧은 나뭇가지보다 굽은 나뭇가지에 더 많이 쌓인다. 그들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만들어져, 굽은 나무의 그늘에 더 많은 사람이 찾아와 편이 쉰다. 사람도 직선의 사람보다 곡선의 사람의 품 안에 더 많이 안긴다.’ (201쪽)

  

 내게는 이렇게 정확하지 않아도 좋은, 설명하지 않아도 좋은, 그리 믿고 있는 인연이 있다. 단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이들이다. 오직 글로만, 때로는 목소리로, 문자로 만난 이들이다. 그러니 얼마나 신비롭고 신기한 일인가. 이 책을 나누고 싶은 이가 떠올랐다. 정호승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E 님,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 즈음이 생일이다. 방금 주문을 했다. 나는 괜히 설렌다. 내가 책을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기분이 좋아진다. 책이라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내 마음이 그곳에 제대로 도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인생은 어느 순간에 가장 아름다워지는가.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어 고독한 성찰의 세계에 머물 때 가장 아름다워진다. 박항률의 그림 속에 앉아 자연과 하나가 될 때 나는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순간을 살게 된다. 그의 그림을 많은 이들이 좋아하고 또한 내가 사랑하는 까닭은 바로 그림 속의 인물과 내가 하나 됨으로써 아름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 속 인물과 하나가 되어 한순간이나마 영원히 낙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254쪽)

 ​화가 박항률의 그림 때문에 더 좋다. 해야 할 일들이 거미줄처럼 펼쳐졌지만 가만히 그림을 바라보고 매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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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눈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6
미쓰다 신조 지음, 이연승 옮김 / 레드박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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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기 좋은 계절은 따로 없다. 그러나 추리, 스릴러는 여름에 읽어야 한다. 더위를 날려 줄 서늘한 기운을 담은 책 말이다. 인형 귀신을 연상시키는 표지로 시선을 끄는  미쓰다 신조의 첫 호러 단편집 『붉은 눈』이야말로 여름에 읽어야 제격인 소설이다. 단편 8편과 네 편의 짧은 괴담 기담이 실렸다.

 

 무서운 이야기에 대한 반응은 중간에 멈추거나 공포를 견디며 끝까지 듣는 두 가지다. 『붉은 눈』은 무섭지만 멈출 수가 없다.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지 매우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는 작가가 이야기를 이끄는 실력 때문인데 특히 이 소설집에서는 화자로 등장하는 작가가 실제로 근무했던 잡지사나 사진집을 언급하여 더욱 호기심을 키운다. 

 

긴 머리카락에 살결이 희고 예쁜 아이였는데 특히 양쪽 눈동자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째서인지 처음에는 알차채지 못했지만 유심히 보니 오른쪽 눈보다 왼쪽 눈의 홍채가 색이 진하더군요. 그런 짝짝이 눈으로 저를 응시할 때면 뭐랄까, 쾌감과 전율을 동시에 맛보는 듯한 기분이…….’ (「붉은 눈」, 11쪽)

 ​

 표제작 「붉은 눈」은 유년 시절 전학 온 소녀 마도 다카리에 대한 이야기다. 마도 다카리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 한다. 따돌림을 당한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항상 혼자였다. 외할머니가 무당였던 화자는 마도 다카리에서 어떤 기묘한 기운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마도 다카리가 학교에 오지 않아 반장과 함께 집을 방문하는데 그 후로 화자와 반장은 무언가가 집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꿈을 꾼다. 그것은 반장은 꿈에서 집 안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고 그 후에 병으로 죽는다. 화자는 인간의 형태를 한 이상한 형체로 오직 붉은 눈만 선명한 꿈에 시달린다. 붉은 눈의 소녀 마도 다카리의 집을 다녀온 후 일어난 일이라 단순한 꿈이라고 단정을 짓기 어려운 것이다.

 

 소설은 이처럼 귀신이나 유령이라고 확정짓기 어려운 괴상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저 소문에 불과하다고 무시할 수 없는 누군가의 경험이라 더욱 공포는 강해진다. 어린 시절 담력 시합을 하듯 친구들과  벼랑 위의 집을 조사하는「내려다보는 집」도 그렇다. 울며 겨자 먹기로 데려간 친구의 동생에게만 보인 집주인. 그러나 정작 부모들의 문의엔 아무도 찾아온 적이 없다는 말이 돌아온다. 동생이 본 건 무엇일까?

 

 제목 그대로 호러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기묘한 괴담을 중계하며 소설로 써보라는「한밤중의 전화」, 죽음의 그림자를 보는 탐정에게 찾아와 죽은 친구들이 꿈에 나타나 자신을 부른다는 「죽음이 으뜸이다 ; 사상학 탐정」은 낮에 읽어도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만든다. 독특한 점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실감 나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귀신이나 유령의 기척 말이다. 읽기만 해도 기분이 이상해진다. 손으로 두 귀를 막고 어떤 소리를 차단하고 싶어진다.  

 

‘슥슥슥…… 하고 다다미를 훑는 듯한, 드드득드드득…… 하고 썩은 갈대밭에 손을 얹는 듯한, 츠읏츠읏츠읏…… 하고 마룻바닥을 기는 듯한, 쿵…… 하고 봉당에 떨어진 듯한, 툭툭툭…… 하고 봉당을 걷는 듯한, 서서히 커지는 소리가 확실히 문을 향해 다가오는 느낌이…….’  (「붉은 눈」,  36쪽)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 있자 묘한 소리가 들렸다. 초인종 소리가 아니다. 좀 더 가까이에서……. 별당 어딘가에서…… , 끽……, 내 머리…… , 끼익……, 머리 위에 있다…… , 끼이익…… 별당 창문 쪽에서 끼이이이이익…… 하고 조금씩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뒷골목의 상가」,  231쪽) 

 

 인상적인 기억이나 상처가 된 경험을 소재로 일상의 공포를 제대로 포착한 작가가 아닐까 싶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공포의 실체를 끄집어내는 소설이다. 그래서 자꾸만 어떤 형체를 알 수 없는 이미지가 나를 따라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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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잔인한 달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신예용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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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 지나치게 깊으면 독이 생기고 결국엔 상처를 남긴다. 비단 남녀 간의 사랑뿐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이 그러하다. 집착, 질투를 사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안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게 인간의 마음이라는 걸 말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다스리지 못 했을 때 사고는 일어난다. 살인도 다르지 않다. 안타깝게도 루이즈 페니의 추리소설 『가장 잔인한 달』 속 살인도 그렇다. 어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결국 폭발하고 만 것이다.

 

 ‘답은 책이나 보고서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인간에게 있다. 심지어 가끔은 형체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잡을 수도, 막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무언가에 있다. 답은 어두컴컴한 과거와 그 안에 숨겨진 감정 속에 있다.’ 94쪽

 

 소설은 조용한 마을 스리 파인스의 사람들의 일상으로 시작한다. 여느 평범한 마을과 다르지 않게 서로에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낸다. 때문에 어떤 이벤트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부활절을 앞두고 마음에서는 교령회가 열린다. 그러니까 죽은 자를 불러오는 모임이다. 누가 주최를 했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약간의 긴장과 함께 설렌다. 첫 번째 교령회는 참석자가 적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실패로 돌아가도 사람들은 두 번째 교령회를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이 꺼리는 장소 해들리 저택으로 모여든다. 깊은 밤, 영매를 중심으로 원으로 둘러앉은 사람들은 어떤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한 여자가 죽는다.

 

 겁에 질린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 여자는 마들렌이다. 놀랍게도 단순 사고사가 아닌 살인으로 밝혀진다. 누군가 ‘에페드라’라는 약물로 그녀를 죽였다. 사건 해결을 위해 가마슈 경감이 마을을 찾는다. 친구이자 상사인 브레뵈프는 형사 르미외를 함께 보낸다. 가마슈를 감시하기 위한 첩자다. 상사였던 아르노의 부정을 고발한 가마슈는 경찰 내부에 적이 많았다. 가마슈가 스리 파인스에서 조사를 하는 동안 브레뵈프는 언론에 가마슈와 가족에 대한 충격적이고 잔인한 기사를 내보낸다. 가족을 상대로 비열한 짓을 버린 그가 가장 친한 친구였다는 걸 가마슈는 언제 알게 될까?

 

 이처럼 소설은 마들렌을 죽인 범인을 찾는 이야기와 동시에 가마슈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경찰 조직과의 대결을 그린다. 범인은 마들렌이 암이 재발하여 곧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모른 채 죽였다. 가마슈는 마을 사람들과 마들렌의 관계를 조사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읽는다. 마들렌은 암에 걸렸지만 주변을 빛내는 사람이었다. 그녀를 향한 사람들의 마음엔 애정이 가득했다. 그러나 가마슈는 마들렌이라는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놓치지 않는다. 금세 사라질 옅은 그림자라도 말이다. 

 

 ‘그는 감정을 모았다. 그리고 정서를 수집했다. 살인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살인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한 행동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 지점에서 모든 일이 출발하기 때문이었다. 한때는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웠던 감정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기괴한 모습으로 변한다. 감정의 주체를 집어삼킬 때까지 비틀리고 부패한다. 결국 인간성의 흔적이 거의 남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142쪽

 

 초반에 등장인물을 전부 소개하는 과정이 조금 지루하다 할 수 있지만 그 지점을 넘기면 소설 속 무대와 배우를 모두 그릴 수 있다. 그것이 루이즈 페니의 특징이라는 걸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이 인간의 내면이라는 것도 함께 말이다. 두 번째로 만난 루이즈 페니의 소설은 아주 세련된 감성 추리소설이다. 처음에 발견하지 못했기에 다행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내면에 감춰 둔 수많은 것들 중 가장 위험한 것은 비밀이다. 우리는 그 비밀을 너무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에게도 감추려 한다. 비밀은 착각을 부르고, 착각은 거짓을 부른다. 그리고 거짓은 벽을 만든다. 우리의 비밀이 우리를 병들게 하는 이유는 비밀이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갈라놓기 때문이다.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기 때문이다. 두렵고 성나고 비참한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급기야 자신에게마저 등을 돌리게 하기 때문이다.’ 4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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