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봄날의 소품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글은 글쓴이를 상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아니, 그건 글쓴이의 재주일 것이다. 나는 나쓰메 소세키의 책을 여러 권 가지고 있지만 아직 제대로 읽지는 못했다. 나중에, 나중에 읽어야지 하고 미뤄둔 것이다. 거장이라는 두려움, 모두가 좋다고 하는 글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라도 해두자.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나쓰메 소세키와의 만남을 『긴 봄날의 소품』으로 시작했다. 이 책에는 두 편의 단편과 수필이 담겨 있다. 단편과 수필은 제법 다르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다.


 단편 「이백십일」은 두 친구가 아소산에 오르는 과정을 들려준다. 정말 친한 친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아소산에 오르는데 그 이야기를 듣노라면 산행은 잊어버리고 만다. 즐거운 수다, 유쾌한 수다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열흘 밤의 꿈」은 제목 그대로 열흘 동안의 꿈에 대한 이야기인데 꿈속이라는 배경 때문인지 정말 꿈속을 거니는 듯하다.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들, 언제 육지에 닿을지 알 수 없는 배를 타고 있거나, 어떤 여자를 따라가거나, 죽은 남편을 위해 기도를 드리거나. 열 밤의 화자가 모두 동일하다고 할 수도 없다. 어쩌면 그래서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러 날에 걸쳐 읽은 책이다. 쉽게 읽지 못했다는 말이다. 재미의 유무를 말하기는 어려운 종류, 그러니까 산문이 그러했다. 산문에서는 다양한 일상을 만날 수 있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하루를 그려보기도 했고 그가 가족을 대하는 무표정한 얼굴도 상상할 수 있었다. 잘 알려진 작가로 많은 이들의 방문을 받고 혼자 조용히 쉴 시간이 없었겠구나 생각했다. 표제와 같은「긴 봄날의 소품」의 수필에서는 천을 훔쳐 간 도둑을 잡는데 더 많은 시간과 돈이 든다는 이야기, 평소에는 밥만 주고 돌보지 않던 고양이가 죽고 난 후 고양이 제삿날을 챙기는 다소 색다른 이야기, 런던 유학시절 하숙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건강이 나빠져서 제목처럼 유리문 안에서 생활해야 했던 시절의 이야기인 「유리문 안에서」는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 보였다. 아픈 몸에 대한 사색, 늦둥이로 태어나서 다른 집에 입양이 되었다가 다시 돌아왔지만 여전히 부모님을 할머니, 할아버지로 불렀다는 글과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적은 글에서는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뎠을까 안쓰럽기도 했다. 젊은 나이에 폐병으로 죽은 형에 대한 이야기는 형제를 잃은 슬픔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지고 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의 방문을 거절하지 않고 병세를 물어보는 이들에게 그럭저럭 살아 있다고 말하다 누군가 원래의 병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겠냐는 말을 듣고 쓴 글은 강한 울림과 감동을 전한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내가 모르는, 또한 자신들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지속되고 있는 것이 얼마든지 숨어 있는 게 아닐까. 만약 그들의 가슴에 울리는 커다란 소리로 그것이 한꺼번에 파열된다면 그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의 기억은 그때 그들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리라. 과거의 자각은 이미 사라져버렸으리라. 지금과 옛날, 그리고 그 이전 사이에 아무런 인과를 인정할 수 없는 그들은 그런 결과에 빠졌을 때 자신을 뭐라고 해석할 생각일까. 결국 우리 각자는 꿈꾸는 사이에 제조한 폭탄을 안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죽음이라는 먼 곳으로 담소를 나누며 걸어가는 게 아닐까. 다만 어떤 것을 안고 있는지 남도 모르고 자신도 모르기에 행복한 것이리라.’ (「유리문 안에서」, 286쪽)

 

나쓰메 소세키와의 만남은 무겁고도 경쾌했다. 무겁다는 것은 깊다는 뜻이라 말하고 싶다. 아직 읽어야 할 그의 소설이 많다. 다음의 만남은 어떤 느낌일까. 점점 더 그에게로 다가갈 수 있으니 조금 설렌다는 말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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