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소설
기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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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의 삶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그 삶의 주체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삶이 풍경처럼 보이기를 바라면서 사는지도 모른다. 하여 때때로 감정을 숨긴 채 살아간다. 그런 일상에 익숙해지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이 낯설게 느껴진다. 아니, 부럽다는 게 맞다. 기준영의 『연애소설』엔 그런 두 종류의 삶이 등장한다. 조금은 뻔뻔할 정도로 솔직한 사람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삶은 풍경이라는 틀 속에 있기 마련이므로.

 

 표제작인 「연애소설」은 화자인 나와 친구 수아가 만난 하루의 이야기다. 수아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친구였다. 수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사람으로 나를 만났다며 스물세 살 많은 남자와 살고 있다는 말을 꺼낸다. 그 나이 많은 남자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른 친구들이 수아는 미쳤다고 말한다. 수아는 친구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거부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수아의 이야기를 듣고 그 남자와 살고 있는 집까지 동행한다. 그러는 사이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나에게도 풍경이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풍경 같았던 아닌 풍경이었던 삶 말이다. 기준영은 나에게 다가오는 변화의 조짐을 황홀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보여준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오늘의 이 기운은 저 달 때문인가. 나는 내 방 창가로 조금씩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커다란 보름달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구름은 보름달의 빛과 그 밖의 어둠과의 경계를 덮쳤다. 흐렸다, 지웠다가, 아지랑이처럼 다시 피어올랐다. 달은 뭔가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서운, 무서운, 무서운, 무서운 허무로부터 달음질치는, 도망가는, 숨이 차는 찰나들을 비추며.’ (「연애소설」, 26쪽)

 

 헤어진 남자 친구의 남동생 유성과 만나는 여자 혜리의 이야기 「시네마」도 다르지 않다. 영화 시나리오를 위해 여자 얘기를 듣고 싶다며 유성은 혜리에게 연락한다. 혜리는 형과 헤어졌다고 말하지 못하고 어색한 시간을 이어간다. 함께 걷으며 사람들을 관찰한다. 유성은 혜리에게 아델과 트래비스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아델과 트래비스의 이야기였다. 석재와 사귄 육 년의 시간도 그러했다. 서로에게 상처가 되기도 했지만 사랑으로 빛나기도 했다. 석재와 혜리도 아델과 트래비스였지만 그들만의 사랑이 있었던 것이다. 유성 때문에 혜리는 하마터면 놓칠 뻔한 사랑을 붙잡을 수 있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이처럼 아주 미세한 감정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결핵에 걸려 요양 차 부산에 내려온 나와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진 모델 나희와의 만남을 그린 「아마도 악마가」,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 대해 불안을 안고 살며 대형할인마트에서 1+1 물건을 파는 제니의 삶을 다룬 「제니」, 파티용 소품들을 팔고 있지만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르는 회사에 다니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사람들의 이야기 「파티 피플」속 인물들은 소망이나 희망을 표현하지 못한다. 복학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현실과 미혼모의 사생아라는 존재는 행복과 멀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운은 불행이 아니라는 걸 믿어야 하는 게 삶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아마도 악마가」 의 주인공처럼 주문을 외워서라도 말이다.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좋은 생각을 해야 한다. 나는 좋은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이를테면, 나는 날개가 아주 커다란 새이고, 내 이마에는 노란 털이 별 모양으로 나 있어 제3의 눈처럼 보이는 게 아주 근사하다고 생각해본다. 또 다리가 긴 황새가 되어 풀밭 위를 천천히 걸어 다니면 무척 우아할 거고, 세상은 두 배로 아름다워 보일 거라는 생각. 의사가 처방해준 약 속에 뭔가 좋은 성분이 있어서 내가 다른 꿈을 꿀 수 있다는 생각.’ (「아마도 악마가」, 61쪽)

 

 기준영의 소설은 하나하나가 영화처럼 다가온다. 담백하고 솔직한 묘사로 주변 환경을 스케치하듯 보여주고 인물의 내면을 파고든다. 독특한 건 단 한 명의 주연이 아니라 다수의 조연이 등장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기준영은 소설을 통해 특별한 누군가의 삶이 아니라 보통의 그것에 대해 말한다. 보잘 것 없는 삶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말이다.

 

 꿈꾸던 풍경 밖에서 풍경을 보는 일은 힘겨운 일이다. 하지만 다른 각도로 본다면 우리는 모두 풍경이다. 우리의 삶에서 누군가가 메인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수많은 카메라와 수많은 연출자가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결정적인 그때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찰나의 꿈처럼 마주할 그때를 기다린다.

 

 ‘A캠이 메인이다. 카메라 한 대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연출자가 손짓을 한다. 다른 장소, 다른 상황, 다른 각도, 혹은 다른 정서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B캠은 움직인다.’ (「B캠」, 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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