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뒤락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9
애니타 브루크너 지음, 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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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절이나 날씨 변화에 민감한 편이다. 비가 오면 비에 관련된, 눈이 오면 눈에 관련된 노래를 찾아 듣거나 시나 소설을 떠올린다. 이런 감성을 알아주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빨리 친해지거나 더 알고 싶어진다. 하지만 특별한 이유없이 강하게 끌리는 사람이 있다. 사람뿐 아니라 음악이나 책도 그렇다. 내게 애니타 브루크너의 『호텔 뒤락』은 그런 책이다.

 

 소설은 필명으로 책을 쓰는 이디스라는 여자의 이야기다. 스스로 버지니아 울프를 닮았다고 말하는 그녀는 휴가철이 지나 조용하고 쓸쓸한 호텔 뒤락에 머문다. 그곳에서 다양한 부류의 여자들을 만나고 그들과 시간을 보낸다. 화려한 외모의 퓨지 부인과 그녀의 딸 제니퍼,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모니카, 늘 혼자인 노년의 보뇌이유 부인, 그들의 일과는 단조롭다.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으며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고, 쇼핑을 하고, 호텔 근처를 산책하다. 그들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적극적으로 서로를 탐하며 알아간다.

 

 이디스는 작가라는 사실을 숨긴 채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채 곳에 왔다. 호텔 뒤락을 도피처로 삼은 것이다. 퓨지 부인은 남편이라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여행과 쇼핑을 낙으로 여긴다. 혼기가 지난 딸을 자신의 부속물처럼 여기며 모두에게 주목받기를 바란다. 거식증에 걸린 모니카는 아이를 갖지 못해 남편에게 유배를 당한 격이다. 보뇌이유 부인은 며느리에게 집을 빼앗겨 호텔을 전전한다.

 

 주인공 이디스의 사연은 연인인 데이비드에게 쓰는 편지를 통해 들려준다. 로맨틱한 삶을 꿈꾸던 어머니와 그런 아내를 견디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이디스에게 결혼은 망설임이다. 작가라는 직업도 결혼을 주저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다.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만이 요구되는 시대였기에 글쓰기를 보장받을 수 없다. 때문에 자신의 결혼식에 다른 곳으로 차를 돌린 것이다. 모든 비난을 피해 호텔 뒤락으로 도망쳤다. 어쩌면 이디스에게 사랑은 불륜 관계인 데이비드 뿐인지 모른다.

 

 소설은 호텔 뒤락이라는 제한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일상 속에 숨겨진 여자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이 가득하다. 애니타 브루크너는 차분하고 담담하게 서로를 질투하고 험담하고 은밀하게 누군가를 유혹하는 그들의 생생하게 묘사한다. 더불어 그들에게 결혼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말한다. 어떤 남자와 결혼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여자들의 삶을 퓨지 부인, 모니카, 보뇌이유 부인을 통해 보여준다. 남편과 아들에 의해 결정되는 삶은 진정 행복한 것인지 묻는다. 이디스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호텔에서 만난 사업가 네빌은 이디스에게 결혼을 제안한다. 사랑이 아니라 누구나 꿈꾸는 완벽한 결혼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디스는 결혼이 아니라 자신을 인정하고 존중해 줄 사랑을 원했다.

 

 애니타 브루크너는 무엇이 여자을 살게 하는지 이디스의 말을 통해 전한다. 여자에게 사랑은 그런 것이다. 단순한 애정이 아니라 한 사람의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랑 말이다. 여자에게 필요한 건 일을 포기해야 하는 사랑이 아니라, 희생을 강요하는 사랑이 아니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랑이라고.

 

 “나는 사랑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 내 말은 사랑 때문에 망가지고 괴상한 징후가 생기고 우스꽝스러워진다는 뜻은 아니에요. 내가 말하는 건 그것보다 훨씬 진진해요. 내 말은 난 사랑 없이는 잘 살아낼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다른 어떤 힘이 있어도 사랑 없이는 생각할 수도,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고 심지어 꿈도 꿀 수도 없어요. 살아있는 세상에서 배제되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차가운 피가 흐르는 물고기 같은, 움직이니 않는 존재가 되어버려요. 안에서부터 파멸해버리는 거죠. 내가 생각하는 완전한 행복이란 저녁이면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올 걸 알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온종일 햇볕 따가운 정원에 앉아 책도 읽고 글도 쓰는 거예요. 매일 저녁 그 사람이 올 거라고요.” 114~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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