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 눈
구경미 외 지음 / 열림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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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여름에도 분명, 지리한 장마가 올 것이다. 얼마나 많은 비가 내릴지, 얼마나 더울지, 얼마나 많은 밤을 열대야와 싸워야 할 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여름이니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 게 받아들이기 편할지 모르겠다. 한 번쯤 새하얀 눈이 가득한 여름을 상상한다면 더위가 사라지지 않을까. 상상만으로도 차가운 눈이 내리는 듯하다. 주목받는 젊은 여성 작가 7인이 (구경미, 김유진, 김이은, 김현영, 박주영, 서유미, 조해진) 눈을 테마로 쓴 소설집 『사랑해, 눈』을 읽는 것도 뜨거운 여름을 시원하고 즐겁게 지내는 방법은 아닐까. 
 
 새해 첫 출근길, 폭설로 인해 사회로부터 고립될까 두려운 한 남자의 심리를 잘 표현한 담은 서유미의 <스노우맨>과 병색이 짙은 아버지가 눈이 보고 싶다며 자식들을 대동해 눈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구경미의 <첩첩>은 평범한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일상의 모습이다. 눈 때문에 여행을 떠나 가족과 함께 추억을 만든 이들에게 눈은 소중한 의미로 남을 것이다. 반면 눈 덮인 세상에도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에게 눈은 거대한 세상과 같은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뚫고 나가야 할 삶 말이다.   

 ‘팔을 움직이면서 흘린 땀 때문에 셔츠가, 허리까지 쌓인 눈 때문에 구두와 바지, 속옷이 다 젖었다. 남자의 삽은 점점 느려졌고 눈이 쌓인 길은 끝이 없어 보였다. 삽을 쥐었던 손바닥엔 어느새 물집이 잡혔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파고 온 길이 삐뚤빼뚤 꼬리처럼 이어져 있었다. 앞아 아니라 옆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지저분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삽으로 퍼낸 눈 뭉치들이 원래의 자리로 굴러떨어졌다.’  p.25 - 스노우 맨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떠나 30년 만에 유골 상자로 만나는 엄마와 눈처럼 녹아 없어질 걸 알면서 시작된 사랑 이야기를 그려낸 조해진의 <하카타轉多 역에는 눈이 내리고>은 쌓였다 하더라도 금세 녹아 사라지는 눈을 떠올렸다. 소복하게 쌓인 아름다움이 금세 걱정으로 변하는 눈처럼 아픈 딸을 혼자 키우는 직장 선배를 향해 시작된 사랑이 지속될 수 있는 시간은 눈이 녹기 전까지 짧았다. 엄마의 인생과 딸의 사랑은 나약하고 슬픈 눈 같았다. 

 제목에 담긴 것들을 소설에서 만날 수 있는 김이은의 <첫눈과 소원과 백일몽 사이에 숨겨진 잔인한 변증법>과 박주영의 <소설 小說 小雪>은 신선한 재미가 가득했다. 첫눈에 담긴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그려낸 김현영의 <눈의 물>은 몽환적이며, 무료하듯 반복되는 일상을 섬세하고 잔잔하게 묘사한 김유진의 <눈 위의 발자국>은 한 폭의 부드러운 풍경화을 보는 듯하다. 

 눈은 대기 중의 수증기가 높은 곳에서 찬 공기를 만나 식어서 엉기어 땅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인 비와 다르게 대기 중의 수중기가 찬 기운을 만난 얼어서 땅 위로 떨어지는 얼음의 결정체다.  얼어야만 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해서 사람들에게 사계절 언제나 만날 수 있는 비보다 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건 아닐까. 많은 이가 첫 눈을 기다리지만 첫 비를 기다리는 이는 없으니 말이다.  눈이라는 테마는 같았지만 각 단편들은 작가의 개성을 보여주듯 다양했다. 일곱가지 눈 이야기는 모두 흥미로웠다.  

 어떤 소설은 마치 동화 『눈의 여왕』에 초대된 느낌이었고, 어떤 소설은 이게 눈인가 싶을 정도로 진눈깨비 같았고, 어떤 소설은 눈이 내려 쌓여가는 과정을 담은 듯 느껴졌다. 눈이 가진 아름다움, 눈이 가진 폭력성, 눈이 가진 여러 성질과 느낌들을 잘 살려낸 소설들이다. 

 ‘올해의 첫눈이 오늘, 내렸으니까. 몇 년째 애인인지 이제는 헤아리기도 어렵지만 어쨌든 오늘 너의 그녀는 오늘 너의 사랑. 그러니 첫눈은 당연히 그녀의 것이지. 그녀와 너의 것이지. 7년 전의 그 봄날. 봄이었는데, 화사한 봄날이어야 마땅한데, 때아닌 폭설이 쏟아졌어. 지금까지도 거기 갇혀 잇는 내게 첫눈이란, 그래, 네 말대로야. 물에 물 타기, 눈 위에 눈. 그래봤자  눈. 겨우, 고작, 눈.’ p.182 - 눈의 물 

 누군가는 벌써부터 첫눈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봉숭아 물을 곱게 들인 손톱을 깍지 못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눈이 오기를 간절하게 소망할 것이다. 결국은 ‘물에 물 타기, 눈 위에 눈. 그래봤자  눈. 겨우, 고작, 눈’ 인데 말이다.  나 역시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처럼 한 여름에 내리는 사랑스런 눈을 상상하는 즐거움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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