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의 사태 - 김도언 소설집
김도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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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소설가와 소설의 주인공을 동일시 하는 경우가 있다. 소설은 꾸며낸 이야기가 분명한데 말이다. 소설가와 주인공의 동성이거나 같은 연령대면 더욱 그러하다. 그것은 소설을 통해 소설가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가 뿐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독자들 역시, 그네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해서, 자전소설이나 산문집을 통해 일상을 공개하는 것이리라.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 신경숙의 『외딴방』이 그 예가 아닐까 한다. 작가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랑의 사태』를 읽으면서 작가 김도언이 아니라 ‘그 남자 김도언’을 읽는 듯했다. 이건『불안의 황홀』의 여파인지 모른다.  

 『불안의 황홀』에서 만난 김도언은 밝음 보다는 어둠에 가까운, 가볍지 않고 무거운, 투명하기 보다는 불투명에 속해있었다. 해서, 그의 소설을 읽기 전 어떤 긴장감이 몰려왔다. 한데, <이토록 사소한 멜랑꼴리>나 <악취미들>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랑의 사태>는 내게 평이했고, 편안하기까지 했다. 단편은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 보였다. 아마도 그건 곧 드러낼 냉소이며 광기인지 모른다. 아무튼 이 말은 내가 그의 소설을 좋아한다란 말이다.   

 <내 생애 최고의 연인>나 <전무후무한 페스트베이스맨>,<어느 위대한 소설가의 자술 연보>,<백하동 가는 길>을 제외한 나머지<권태주의자>와 <랑의 사태>,<다큐멘터리 가족극장>,<안으로 나가고 밖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 <다크블루, 시간의 풍경>은 작가 자신의 삶을 어느 정도 소설 속에 투영되고 있다.  대부분의 화자는 소설가이거나, 출판사의 편집장, 시인, 시를 읽거나 시를 쓰고자 하는 문학과 관계가 깊은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 <권태주의자>와 <전무후무한 페스트베이스맨>,<안으로 나가고 밖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이 특히 인상적이다.  

 소설 속 인물이나 배경이 같은 <권태주의자>나 <랑의 사태>는 마치 연작소설으로 읽힌다. <권태주의자>는 제목 그대로 권태로운 삶을 사는 이야기다. 뚜렷한 목적 없이 흘러가는 대로, 그러나 한 편으로 보면 무언가에 집착하듯 보인다. 소설엔 화자가 벤자민 나무와 대화하는 부분이 있는데, 나는 벤자민 나무의 답에 매료되고 말았다.  

 “나는, 위협받는 포로처럼 우울해요. 눈에 에워싸인 당신의 복사뼈처럼 우울해요. 한쪽 발을 잃은 마네킹처럼 우울해요.”  p. 118  

 벤자민 나무도 화자처럼 권태주의자였던 거다. 눈에 에워싸인 당신의 복사뼈처럼이라니.누군가는 지루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자 탁구장 주인인 화자 삼촌이나 화자는 모두 권태주의자답게 살고 있다. <랑의 사태>는 랑이라는 여자의 이야기다. 도서관에서 삼촌의 시집을 읽고 있는 랑을 만난다. 랑은 모텔을 운영하는 할머니와 살고 있다. 랑에게 부모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녀는 환상의 세계가 아니면 살아낼 수 없는 여자다. 화자는 기꺼이 랑의 환상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다. 현실을 부정하며 살아가는 삶, 때때로 누구나 바라는 권태로운 삶이 아닐까.

 <다큐멘터리 가족극장>, <안으로 나가고 밖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은 신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와, 장남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꿈을 저버린 큰 형과 쌍둥이 형을 비롯한 가족 이야기가 등장한다. <안으로 나가고 밖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고찰>에서는 평소에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 바라보며 아버지의 삶을 빌어 우리 생에 가져야 할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은 안과 밖을 나누면서 모두들 따뜻한 내부를 갖기를 원한단다. 우리는 밖이 아닌 안에서 위로를 받으면서 고통과 슬픔을 견뎌내는 것이지. 그런데 나에게는 이 세상이 온통 까다롭고 사나운 바깥 같구나. 사는 것이 참으로 두렵고 어려워. 어떻게 저 밖으로 들어가야 할지 모르겠어.” p. 203~ 204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삶은 무엇일까. 한 가족의 가장이며 세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온 삶 속에 이같은 생각들이 가득했을 꺼라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러하니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생이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고단할까.  이는 서른 아홉의 출판사 편집자인 화자가 열두 살 아래의 그림작가를 사랑하는 <내 생애 최고의 연인>나 은퇴를 앞둔 야구 선수가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인 <전무후무한 페스트베이스맨>에서도 느껴진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함, 소통에 대해 말이다. 

 9편의 소설에서 김도언은 이런 삶을 지향하는구나 싶은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소설들은 하나의 특정한 에피소드를 통해 무언가를 갈구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가령, 죽음이라든지 존재의 이유처럼 다소 철학적인 것들이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으나 쉽게 꺼내지 못하고 말하지 않는 일들 말이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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