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란서 안경원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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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납 기일을 두 번이나 연장하도록 한 게으름과 동시에 욕심을 낸 책이다.  쉽게 읽히지도 않았으며 번쩍하는 빛이 보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한 권 한 권 조경란의 소설을 읽어가면서 책 속에 감추려 했던 아니, 드러내려고 했던 조경란의 모습을 찾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수없이 많은 책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낸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느낌을 받는 것은 나뿐일까. 

 10편의 소설, 어느 하나 즐거운 엔딩을 보여주는 소설은 없다. 시를 위한 소설처럼 낮은 읊조림으로 들린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내고 있는 이들을 만나기 어렵다. 어쩔 수 없는 강한 힘에 끌려 인생을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결코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없는 운명적 관계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 운명적인 관계, 그것은 사랑의 관계, 핏줄의 관계이다.  그러나 완전하게 완성된 관계는 찾을 수 없다. 죽음으로 인한 어머니의 부재, 힘없고 나약한 가장들의 존재들로 인해 삶의 끈을 놓고 싶은 딸, 아내들은 모두 힘겹다. 

 
내 사랑 클레멘타인
 
 든든한 가장이었던 아버지는 갑자기 알츠하이머 병에 걸리고 만다. 숨쉴 수 없는 시간들이 시작되고 가족이라는 이름뿐 모두 가족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 유학을 핑계로 떠나버린 남동생, 출생의 비밀을 모른 채 병든 아버지를 원망하고 질책하는 여동생, 점점 비대해지는 몸으로 병든 아버지를 수발하는 어머니, 그 사이 사랑은 떠나버리고 가장으로써 남은 그녀. 소리내어 악을 쓰고 싶은 현실,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 그녀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한 이는 아무도 없지만 그녀는 이 울타리를 떠날 자신이 없다.

 
사소한 날들의 기록

 제목처럼 사소한 일상일 수 있는 날들의 기록이다. 심리 치료 워크숍에 참석한 사람들의 3일 간의 기록이다. 8명의 인물 하나 하나의 닉네임과 외부 묘사를 통해 그들을 이미지화한다. 참석한 모두 내면에 자리잡은 상처를 치료하고 싶어하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믿었던 사랑에 대한 배신, 불륜을 일삼는 아버지, 이복동생과의 갈등. 그리고 남편과 자신과의 속내가 두려운 화자. 3일이라는 기간을 통해 변화의 시작을 원했던 그들. 그러나 화자는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다. 

 중독

 이 단편은 마치 조경란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듯 보인다. 스물 여섯의 대학 입학, 소설을 쓰고 있고 신춘문예에 당선한 소설 속 권재경은 조경란과 흡사한 인물이다. 시를 쓰고자 했지만 결국 소설가가 된 재경과 같은 학과 동기인 완희 언니, 두 여자의 이야기.  자신의 자살을 재경에게 확인하게 끔 편지와 열쇠를 보낸 그 섬뜩함은 소설의 제목인 중독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같은 듯 다른 두 여자, 서로에게 속하지 않았다고 믿었지만  완희가 남긴 노트를 통해 재경은 완희와 자신이 닮아있음을 발견한다. 이야기를 이끄는 화자인 재경의 글쓰기와 소설 속 완희가 남긴 글을 비교하며 읽게 하는 짜임은 이 단편의 특징이라 하겠다.

 불란서
안경원

 주변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이름의 안경원이다. 그만큼 평범한 이름처럼 평범함을 가장하며 살고 있는 때로는 음융하고 때론 속물적이고 절망적인 우리의 모습의 단면을 보여준다. 주인공 나는 불란서 안경원의 안경사이다. 단정한 외모에 친절한 미소를 띄고 있다. 그러나 지친 일상에 마음은 찌들어 가고 있다. 그녀가 볼 수 있는 세상은 오직 12자,8자인 안경원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세상뿐이다.

' 세상을 12자, 8자 통유리로 들여다보고 이해하기까지...... 지나치게 많은 시간들이 필요했다. 그것은 어쩌면 삶과의 전의(戰意)을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중략 나에게 삶이란 단지 오늘을 견디는 것, 바로 그것뿐이다. 아직 더 견뎌야 했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내게 삶을 견디는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은 없다. 304쪽'

 그 문을 통해 들어오는 사람들과의 형식적인 관계가 전부이다. 안경원을 시작하고 평범한 삶을 꿈꾸게 했던 남자는 그녀를 떠나고 자신을 향한 세상의 눈은 온통 경계의 대상이다. 자신의 생계를 이어주는 자신들의 안경은 누구에게는 사치이고 세상을 보는 절실한 것이다. 유리창을 통해 보는 세상, 그 유리창을 깰 날이 그녀에게 올까?

 소설 속 그녀들은 나이에 따라 민감한 반응을 보여준다.  서른 한 살( 내 사랑 클레멘타인 ), 스물 아홉( 푸른 나부 ), 스물 여덟 살( 천국 보다 낯선 ), 서른 셋( 사소한 날들의 기록 ), 서른 하나(불란서 안경원) 등등 소설 속 그녀들은 서른 전후의 나이들이다. 작가 조경란이 갖는 나이에 대한 의미가 있는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또 하나 소설 속 전화가 갖는 의미도 크다. 

 
' 내가 걸고 싶은 전화와, 내가 걸지 못한 전화와, 내가 걸었던 전화와, 내가 끊었던 전화와, 내가 기다렸던 전화 때문에. 그 전화들 사이로 흘러간 추제할 수 없이 안타까운 시간들 때문에... ... 129쪽 '

 새벽에 걸려오는 낯선 전화, 자신이 잠든 사이 공중전화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남편, 아들의 전화를 기다리는 어머니, 부재 중 전화를 통해 확인하는 자신의 목소리. 가족이 아닌 상대를 갈구하는 사람들, 낯선 이를 통해서라도 막연한 소통을 기대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결핍된 것은 무엇일까?

 삶은 자신에게 찾을 수 없는 결핍을 끊임없이 발견하게 한다. 우리는 그 결핍 그대로인 삶을 끌어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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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1 21: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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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2 1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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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4 02: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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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5 1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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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5 2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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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7 01: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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