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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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출판사의 소개 문구나 먼저 읽은 이의 리뷰를 읽어도 내가 읽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 는 봄에 읽으면 더 좋을 소설이라는 걸 나는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러니 나는 봄이 되면 이 소설이 생각날지도 모른다. 『풀베개』는 봄꿈처럼 아련하고 잡으려 애써도 잡히지 않는 꽃잎으로 남은 소설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는 이전에 읽었던 다른 소설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뭐랄까, 소설이 아닌 산문 같다고 할까. 소설 곳곳에 나쓰메 소세키의 ‘하이쿠’가 많이 등장한 탓도 있겠지만 소설 속 화자의 생각이 나쓰메 소세키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예술에 대한 생각 말이다. 첫 문장부터 언급되는 예술에 대한 정의와 이해가 그렇다.


살기 힘든 세상에서 살기 힘들게 하는 근심을 없애고, 살기 힘든 세상 세계를 눈앞에 묘사하는 것이 시고 그림이다. 또는 음악이고 조각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묘사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직접 보기만 하면 거기에서 시도 생기고 노래도 솟아난다. 착상을 종이에 옮겨놓지 않아도 옥이나 금속이 스치는 소리는 가슴속에서 일어난다. 이젤을 향해 색을 칠하지 않아도 오색의 찬란함은 스스로 심안(心眼)에 비친다. 그저 자신이 사는 세상을 이렇게 깨달을 수 있고 혼탁한 속세를 마음의 카메라에 맑고 밝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된다. (16쪽)


화자인 ‘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길을 나섰다. 자연에 더 가까이 다가가 그림을 완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소설은 ‘나’가 만난 길에서 만난 이들과 나누는 이야기, 그 안에서 발견하는 모든 것들은 하이쿠로 채워진다. 봄날의 풍경, 몽환적인 여인 ‘나미’, 스님, 러일전쟁 참전을 위해 떠나는 ‘나미’의 사촌의 느낌들. 어쩌면 하이쿠도 한 편의 그림이라고 하면 맞을 수도 있다.


‘나’와 ‘나미’ 사이에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닐까 기대했지만 그보다는 둘이 나누는 하이쿠 대화가 아름답다. 연애나 사랑, 현실의 고민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진정한 삶은 따로 있다는 듯한 ‘나미’의 말투가 인상적이다. 온천장 주인의 딸로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온 ‘나미’, 미친 여자라는 소리를 듣지만 정작 미친 건 러일전쟁이 일어난 세상이 아닐까 싶다.


그런 나쓰메 소세키의 위트와 유머가 곳곳에 녹아있으면서도 아스라이 사라지는 봄날의 모습을 명확하고 선명하게 그려낸다. 붉은 동백에서 아름다움이 아닌 독기를 발견하는 부분은 지독하게 아리다. 서른의 청춘 ‘나’가 바라보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그러한 것처럼. 짧은 분량임에도 여전히 수월하지 않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이지만 사랑받는지 알 것도 같다.


확 피었다가 툭 지고, 툭 졌다가 확 피고, 수백 년의 성상(星霜)을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은 산그늘에서 태연자약하게 살고 있다. 단 한 번 보기만 하면 그걸로 끝! 본 사람은 그녀의 마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 빛깔은 단순한 빨강이 아니다. 도륙된 죄수의 피가 저절로 사람의 눈을 끌어 스스로 사람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는 듯한, 일종의 이상한 빨강이다. 보고 있으니 빨간 것이 물 위로 뚝 떨어졌다. 고요한 봄에 움직인 것은 그저 이 한 송이뿐이다. 잠시 후 다시 뚝 떨어졌다. 저 꽃은 결고 지지 않는다. 무너진다기보다는 단단히 뭉친 채 가지를 떠난다. 가지를 떠날 때는 한 번에 떠나기 때문에 미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떨어져도 뭉쳐 있는 것은 어쩐지 독살스럽다. (137쪽)


‘나’는 계획했던 그림은 나쓰메 소세키의 문장으로 그려진다. ‘나’의 그림의 완성도는 모르지만 『풀베개』란 그림은 자꾸 보고 싶은 한 편의 수채화이자 읽고 싶은 담백한 산문이다. 벚꽃이 만개한 봄날에 읽으면 더 황홀하겠지만 장마와 열기로 뜨거운 여름에 봄을 그리며 읽어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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