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2
최은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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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꺼내는 일은 어렵다. 상처를 직시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고통을 동반한다. 단순하게 지난 일이니까 이제는 괜찮지 않냐고 묻는 질문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슬픔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처럼 상처도 그렇다. 최은미의 『어제는 봄』은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 주저하게 만든다. 소설 속 수진이 쓰고 싶지만 쓸 수 없는 양주 이야기, 그 실체를 전부 보여주지 않은 소설에 대해 답답해할 수 없는 이유가 그렇다. 나는 소설 속 수진이 될 수 없고, 설령 수진과 닮은 상처를 지녔다 해도 나의 상처와 수진의 그것은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공감하고 이해한다고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종류의 것들. 상처의 안과 밖에 존재하는 두 가지의 삶을 살아간다. 소설은 수진의 현재와 과거를 교차로 들여준다.


10년 전 신춘문예로 소설가가 된 정수진은 결혼을 했고 딸아이를 키우며 소설을 쓴다. 그녀를 소설가로 인정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원고 청탁도 없고 강연 의뢰도 없다. 남편도 조금씩 그런 수진이 지겹다. 딸 소은이 학교에 가고 나면 그는 의식처럼 카페에 가서 소설을 쓴다. 자신의 의지대로 소설가로의 삶을 유지하려는 안감힘이라고 할까. 써야 할 이야기가 있기에 그렇다. 바로 양주 이야기다.


나는 양주 이야기를 10년째 쓰고 있었다. 한 이야기를 10년 동안 붙들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지겹고 힘든 일이었다. 스스로의 능력이 의심스러워지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선우 경사의 답변 속에서 어떤 단어들을 볼 때, 나는 그 단어 하나만 갖고도 양주 이야기를 바로 끝장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소설도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17~18쪽)


그렇다면 독자는 이제 궁금하다. 양주 이야기라니, 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수진은 자신의 소설을 통해 그것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아버지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부모님 사이의 일에 대해서 시시콜콜하게 털어놓지 않는다. 그 죽음에 관련된 범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경찰관 이선우를 만날 뿐이다. 이선우만이 수진을 작가라 부르고 존중한다. 둘의 만남은 점차 개인적인 만남이 되고 서로의 삶에 개입한다. 상대의 시간을 상상하고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려는 욕망이 자란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나는 거울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3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내가 혼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그래도’와 ‘아직도’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가리면 가려지는 것들이지 않은가. 그래도 아직은 살아 있는 선들이 있지 않은가. 그래도 아직은 푸른 핏줄이 보이지 않는가. 그래도 아직은 붉고, 그래도 아직은 물기가 남아 있지 않은가. (42~43쪽)


좋은 엄마와 아내의 역할로도 괜찮아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지난 시간은 돌아보지 않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아이의 안전을 위해 선생님을 돕고 학교 행사에 참여하고 보통의 엄마처럼 보인다. 그러나 수진은 그런 삶을 선택할 수 없다. 상처 밖의 자신은 그런 모습이지만 상처 안에서 살아가는 수진은 결핍된 무언가로 힘들다. 자신의 내면을 채운 불신과 불안, 깊은 상처를 달랠 수 없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소설로 써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오롯이 글을 쓰는 것으로만 수진은 자신을 확인하고 삶을 지탱할 수 있다. 수진이 소설을 완성하고 상처 밖으로 나올 수 있을지, 건조하고 무감한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선택할지 여전히 불투명하다. 다만 독자인 나는 작가의 이런 목소리를 응원할 뿐이다.


나를 극복하고 너에게 가는 길은 이렇게 멀어서, 나는 여전히 매일매일 1층으로, 엘리베이터 밖으로, 유리문 너머로, 니가 나를 기다리던 곳으로, 힘을 다해 달려 나간다.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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