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작곡가라면 기억하고말고.
언니는 그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잖아.
‘저 개암 열매처럼 생긴 눈을 탁 깨뜨려 버리고 싶다’라는 말을 자주 했을 정도로.
착한 사람이었는데. 때때로 우리는 오후에 같이 산책을 나갔어. 그 사람이 자기가 만든 곡을 낮은 휘파람으로 불 때마다 나는 그 부드러운 목소리가 좋았어.
그 사람은 자주 산책길을 조용히 벗어나 야생 수목의 꽃을 꺾어 주었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서 제철 꽃이 피어 있는 가지를 꺾어 나에게 주었지.
내가 그 꽃에 입술을 가져가면 그는 쑥스러워했어. 나는 그 사람의 부끄러워하는 눈빛이 좋았어.
아아, 어떡하지?
그 부드러운 눈길도, 목소리도, 꽃의 감촉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것만 같아.
개암 열매처럼 생긴 그의 눈을 떠올리면 무릎 위로 뱀이 지나가.
붉은 무늬 뱀이.
나를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독이 없고 가느다란 작은 뱀이.
왜 그의 눈이 사라져 버리는 걸까? 붉은 뱀이 왼발 쪽으로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어.
부드러운 바람. 봄날의 산책.
뭔가 무서운 사고가 있었나 봐. 계절이 바뀌면서 다음 계절 꽃이 피기 시작할 무렵에.
그날도 평소에 다니던 산책길을 걷고 있었어.
다음 계절 꽃이 막 피기 시작한 그 산책길을.
그 사람은 평소대로 나에게 줄 꽃을 찾고 있었어. 그러다가 길을 벗어나 풀숲으로 들어가 막 피기 시작한 라일락꽃 가지에 손을 뻗었지.
목초지도 아니고 농지도 아닌 그냥 아무것도 없는 시골길이었어.
풀숲에 왜 그런 게 있었을까? 도대체 누가 그런 것을 설치했지?
아마 그 사람은 비명을 질렀을 거야. 커다란 들짐승을 잡기 위한 덫이 그 사람의 발목뼈가 부서질 정도로 강하게 파고든 순간, 그 사람의 손에서 막 피기 시작한 라일락꽃 가지가 떨어졌던 것 같아. 자기의 다리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그 사람은 비명을 질렀어, 아마도.
아아, 그런 끔찍한 사고가 정말 있었나?
거짓말이야, 이것도 꿈이겠지? 차가운 밤바람 소리가 무서워서 어린 내가 꿈을 꾸었나 봐. 어떡하지? 왼발 쪽으로 붉은 뱀이 올라오고 있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눈 감으면 생생하게 떠오르는 핏빛 저녁노을 말고는.

아름다운 황혼이야.
너는 왜 이 아름다움을 더럽히려고 하니?
아아, 어쩌면 저렇게도 아름다울까?
이렇게 보고 있는 동안에도 하늘은 점점 더 투명해지고 천상의 음악은 지평선 너머까지 울려 퍼지고 있어. 이렇게 성스러운 황혼을 너는 옛날에 꾸었던 꿈 때문에 망치려고 하는구나.
그러고 보니 나도 딱 한 번 이렇게 아름다운 석양을 본 적이 있어.
창가에서 서성이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한 쌍의 남녀를 여기서 이렇게 바라보았어.
맞아, 그날 우리는 바로 여기에 있었어.
점심이 지날 무렵부터 이곳에 숨어 있었어. 여기에 있으면 베란다 쪽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이쪽에서는 베란다가 잘 보이니까.
우리는 그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어.
훤칠하게 큰 뒷모습과 거기에 기대어 선 가냘픈 뒷모습. 저녁놀을 받아 그녀의 반지가 엷게 빛났어.
두 사람은 우리가 있는 줄은 전혀 모르더군.
방구석 어두운 곳에 우리가 가만히 숨죽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우리는 숨죽인 채 어둠 속에서 손을 꼭 잡고 있었어. 어둠 속에서 서로를 옥죄고 있는 뱀과 무지개처럼.
시간이 없었어.
두 사람의 결혼식이 바로 일주일 뒤로 다가왔으니까.
우리는 새벽녘에 꾼 꿈을 이야기하면서 결심을 굳혔어.
그리고 날을 정했지. 날씨가 너무나도 좋아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그런 아름다운 날로.
그날 우리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어. 말할 필요가 없었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연습을 많이 했지.
먼 늪지대나 채석장 구석에서 몇 번이고 연습을 했어.
아름다운 황혼.
그날, 우리는 오늘처럼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어. 석양 속에 기대어 선 두 사람의 뒷모습 사이로.
그리고 우리는 방아쇠를 당겼지.
불꽃놀이처럼 환한 총성이 맑고 투명한 하늘로 울려 퍼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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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mlim 2009-03-19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빠져든다....

뒷북치는느림뽀 2009-03-19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는 앞선 두편처럼 매일 읽지 않고, 오늘 4회 까지 몰아서 읽었어요,,
아,,역시.. 너무 재미있어요.. 근데 또 마지막편이 남았군요..헐~
여기 들어오면 보고싶은 맘을 이기지 못할까봐,,아예 이 서재로는 발걸음도 안하구,,
내일까지 하루만 더 기다리면 됐었는데.. 더는 못 참겠더라구요..^^

온다리쿠의 매력이 흠뻑 느껴지는 글이에요,
몽환적이며 섬뜩한 느낌이 드네요..

그 총성은,, 두자매의 아버지와 새로운 연인을 향한 총성일까요?
어서 내일이 되길..

미니반쪽 2009-03-19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점점 더 모르겠내요.. 가장 어렵다는.. 전 사실 이 자매가 사람인것 같지 않은데.. 암튼 낼 완결이 올라오면 읽어보고 다시 첨부터 찬찬히 읽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