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목회의 본질이다 신 옥한흠 다락방 45
옥한흠 지음 / 국제제자훈련원(DMI.디엠출판유통)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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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에 있었던 한목협과 국제제자훈련원이 공동 주최한 한국교회 갱신과 목회자 성숙을 위한 독후감 공모전에 응모해서 장려상을 받게 됐다. 시상식에 참가하니 부상으로 책 한 권을 받았는데 바로 옥한음 목사님의 <이것이 목회의 본질이다>라는 책이다. 이 책은 옥 목사님이 올 봄에 서울신학대학원 춘계신앙수련회에서 강의한 내용을 토대로 정리한 것인데, 다루는 주제는 다름 아닌 목회의 본질로써의 제자훈련이다.


 

한국교회의 갱신을 부르짖는 옥 목사님의 메시지인지라 귀로 듣기엔 쓴 소리가 많다. 그러나 원래 몸에 좋은 약은 쓴 법이 아닌가. 귀담아 들으면 한국교회가 빠져 있는 영적 침체 요인과 극복방안 등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분명해 진다.

무엇이 목회인지, 목회의 본질조차 모른 채 목회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자연 앞선 선배들의 전처를 뒤따라갈 수밖에 없다. 옥 목사님 자신도 초기 목회 시절 그저 앞선 선배들처럼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 문제의식을 갖고 목회하는 교회의 영적 상태를 보면 이것이 바른 목회의 열매인가 의심할 수밖에 없는 모습들이 너무나 많이 보인다. 옥 목사님은 자신의 그런 경험에서 비롯된 문제의식을 갖고 그저 전통적인 목회, 선배들의 뒤를 말없이 따라가는 목회가 아닌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목회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노력했고 그에 대한 답으로 한국교회 평신도를 깨우는 제자훈련의 기수가 되었다.

이 책에서 얻는 도전은 이렇게 본인 스스로가 문제의식을 안고 싸우며 발견한 성경적 진리들을 목회 현장에서 그 열매로 경험하게 된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이론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한국교회를 향해 갱신을 부르짖는 저자의 외침도 가슴에 와 닿는 것이리라.

무엇이 본질적인 목회인가를 알려면 반대로 무엇이 비본질적인 목회인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런 비본질적인 목회를 일삼는 자들의 모습과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한 사람을 작은 예수 만드는 목표보다는 덩치 큰 교회로 성장하기에만 열을 올리는 평균적인 한국교회의 모습에서 자자는 비본질적 목회의 문제점을 말해 주고 있다. 아직도 중세기 사제와 평신도 구분의 기준이 남아서 잘못 오용되는 ‘평신도’의 개념에서부터 저자는 문제의식을 갖고 그런 잘못 사용되어지고 있는 말의 참 의미를 되찾아 주고 있다. 그 참 의미란 ‘평신도’가 단지 목회자와 구분되는 직분상의 어떤 차이기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주체요, 그 자체가 교회란 것이다. 목회자들은 오히려 이런 평신도를 섬기고 세우라고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목회자가 교회의 주인이 아니란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개념조차 받아들여지지 않고 여전히 만연해 있는 교권주의적, 제왕적 목회자상으로 목회를 하는 사람들을 통해 어찌 본질적인 목회가 우러나오겠는가?


 

이 책은 나에게 많은 물음표를 달게 해 주었다. 과연 목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참 교회의 모습은 무엇인가? 제자훈련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등의 질문들을 하게 만들었다. 이런 고민은 현 시점에서 적절할 뿐 아니라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아무 문제의식 없이 목회하게 되면 나 역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나의 목표와 꿈을 갖고 본질에서 빗나간 일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절망적 순간에 희망은 바로 절망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것이리라.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 시대의 절망적 상황, 한국 교회의 절망적 상황, 그리고 나 자신의 절망적 상황 이 모두를 끌어안자. 그리고 이 모두를 하나님 앞에 내 놓고 회개하며 기도하자. 나는 이런 결심을 하며 책을 무릎에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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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길
조엘 비키 지음, 윤석인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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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신앙사에서 발간된 조엘 비키의 책 <청교도 전도>를 읽은 이후 저자의 또 다른 책을 읽게 되어서 참 좋았다. 이번에 부흥과개혁사에서 펴낸 <영적침체에서 벗어나는 길>은 조엘 비키 만의 특유한 간결하고 명료한 문체 속에 청교도 신학과 사상이 녹아져 있는 책이다.


일반적으로 신자들이 영적인 침체를 말할 때 그것은 대부분 소극적인 영적 상태에 대한 표현으로 쓰인다. 때문에 영적으로 침체된 상태를 죄로 규정짓기 보다는 보호받아야 하고, 동정 받아야 하는 가련한 영혼의 상태로 생각한다. 그러나 조엘 비키는 처음부터 영적 침체에 대한 이런 소극적 정의를 피하고 있다. 그는 영적 침체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적 침체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리스도를 거부하며, 성령을 근심시키고, 율법을 짓밟으며, 복음을 오용하는 죄입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1부는 영적 침체라는 질병에 대한 진단을, 2부는 영적 침체라는 질병에 대한 처방과 치료를 가르치고 있다. 내용이 압축된 형태로 쓰였기 때문에 그리 방대해 보이지는 않아도 실제 이런 부류의 책들 가운데 뒤지지 않을 만큼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영적 침체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영적 침체의 진단에 있어서 교회 전체가 영적 침체에 빠져드는 단계와 신자 개인이 영적 침체에 빠져드는 단계를 구분하여 말한다. 이 단계들은 점차로 심각해지는 단계로의 발전적 형태로 진행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자간의 관계는 먼저 공동체적 영적 침체는 신자 개인의 신앙을 파괴시키고, 신자 개인의 영적 침체는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것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크나큰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결론 내려진다. 결국 영적 침체의 문제는 한 개인만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전염병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영적 전염병인 이 질병은 도저히 고쳐질 수 없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저자는 2부에서 이에 대한 처방과 치료에 대한 희망적인 메시지를 말해주고 있다. 만약 어떤 의사가 환자의 위독한 상태만 말해줄 뿐 도무지 치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면 그 의사를 유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엘 비키는 영적 질병을 그런 식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이 유능한 의사는 영적 침체라는 질병이 아무리 치명적인 병이라 해도 치료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불치병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럼, 이 위독한 질병은 어떻게 치료되는가? 먼저 저자는 치료의 가능성을 말하면서 영적 침체가 치료되는 성경적 근거를 바로 성삼위하나님에게 두고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거룩한 협동 사역을 통해서 영적 침체는 치료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근거를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영적 침체의 보이지 않는 질병에 대한 치료가 단순히 어떤 심리적인 방법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방법에 달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뒤이어 저자는 영적 침체를 치료하는 수단을 말한다. 이 치료의 수단들은 철저히 성경적인 것이다. 그리고 달콤한 위로와는 정반대로 환부를 도려낼 때 의사가 예리한 칼을 사용하듯 영적 침체를 치료하는 하나님의 수단 역시 이처럼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하나님의 선하심 자체가 거룩한 수단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만은 아니지만 말이다. 문제는 영적 침체에 빠진 신자 개인과 교회 공동체가 이런 치료의 수단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있다. 이것을 의지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인가? 여기에 바로 환자로서 영적 침체에 빠진 이의 선택과 책임의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참 암울한 상황은 현대 교회 전체가 이런 성경적 수단보다 다른 인간적인 수단을 찾기에 바쁘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효과적인 치료의 수단을 사용할 때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 회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영적 침체로 빠져드는 단계도 여러 단계였듯이, 이렇게 치료와 회복으로 나아가는 단계도 여러 단계로 나눠진다. 이것은 크게 두 단계로 말할 수도 있는데 시작되는 단계와 마무리 되는 단계를 설명할 수 있다. 시작되는 단계에는 영적 각성, 영적 회상, 참된 회개가 포함되고, 마무리 되는 단계에는 새로운 세례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계시가 포함되어 있다.

결론에 이르러서 저자는 영적 침체의 치료 내용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 내용은 영적 침체라는 죄의 책임으로부터 치료되는 칭의와 영적 침체의 죄로부터 오염된 상태의 치료인 성화이다. 여기서 저자는 칭의와 성화의 여러 가지 차이점들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기 자신이 병든 것을 알아야 의원을 찾을 것이다. 이 메시지는 본 책의 내용과도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영적 침체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무감각한 영적 상태를 탄식어린 마음으로 일깨우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얼마나 이런 무감각함 속에 갇혀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들이 얼마나 이런 영적 마취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옛날 구약시대에 하나님께로 보냄 받은 참 선지자들 뿐 아니라, 스스로 선지자임을 자부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공존했던 시대를 그려본다. 어쩌면 오늘날에도 교회와 신자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 막연한 평화를 말하며 어린 아에게 사탕 주며 달래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마음이 쓰리다. 그리고 내가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두려움이 생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에 오게 될 영화의 단계에서나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면 누구나 영적으로 병들고 죄에 빠지게 마련이다. 이와 반대로 병도 죄도 없는 이는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있으랴! 그러므로 이 책의 최종적 외침은 그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인간의 가장 숭고한 책임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오늘 하나님께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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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범우희곡선 1
아더 밀러 지음, 오화섭 옮김 / 범우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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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을 읽었다. 작품은 작가로부터의 잉태되어 나오는 것이기에 작품과 작가를 분리시켜 이해할 수 없다. 때문에 이 현대적 비극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세계관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아더 밀러는 ‘비극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비극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이렇게 내린 바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비극은 행복을 찾고자 몸부림치는 인간을 가장 정확하고 조화 있게 묘사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들은 비극을 최고로 존중하는 것이다. 또한 그런 까닭에 다른 문학 양식과 혼동해서 비극을 감소시켜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누구며 우리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또 우리가 마땅히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고, 또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을 제시해 주는 가장 완전한 수단이 되게 때문이다.” 이런 작가의 세계관, 혹은 작품관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세일즈맨의 죽음’을 읽는다는 건 그가 추구한 비극의 고상한 기능과는 상관없이 단순히 감상적인 슬픔에 빠져버리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세일즈맨의 죽음’은 단순한 리얼리티 문학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작품이다. 그것이 작가의 표현방식일 수는 있으나 그가 단지 사실성에만 집중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이 작품을 읽고 고뇌하면서 이 절망적인 슬픔의 정서 너머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도대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지금 내가 그 답을 정확히 발견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가 추구한 비극의 순기능을 고려할 때 그 메시지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윌리 로먼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현대인의 표상은 그가 처한 사회적 환경의 사실성 자체가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는 일찍부터 성공주의 이데올로기에 빠져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세일즈맨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 수단은 그가 생각한 대로 성공의 첩경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그 속에서 장구한 일생을 성공이라는 신기루를 좇을 뿐 실상 단 한번도 그 갈증을 해결하지 못한 채 실패의 쓴물만을 들이켰을 뿐이다. 그는 오늘날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후기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상인 현실에 대한 적응력을 갖추지 못하고 오히려 과거의 허황된 꿈에만 매달린 인물로 자신을 고착시켜 나갔을 뿐이다. 그러면서 그는 점차로 가정에서도 소외되는 불운한 인간으로 전락해 버린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도덕적 결함으로 인해 두 아들들에게도 가장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말이다. 그런 사람의 일생이란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사는 삶일 뿐이다. 윌리 로먼은 그렇게 죽지 못해 사는 삶을 고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점차로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로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으로 기울어진다. 가장 숭고해야 할 인간의 죽음마저도 수단적 가치로 적락되어 버리는 것을 그를 통해 보게 된다. 그러나 어쩌면 삶 속에 어떠한 희망도 발견하지 못한 사람에게 인생은 죽음보다 못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윌리 로먼, 세일즈맨의 죽음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는 살면서 죽음을 생각했고, 죽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처럼 살았던 것이다.

작가가 보여주고 있는 작중 인물의 삶과 죽음은 그 자체가 덤덤한 슬픔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비극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작가는 이런 소시민의 한 사람, 내가 될 수 있고 내 주변 가까운 이웃일 수 있는 세일즈맨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중요하게 써 내려가고 있다. 그런 과정 속에 베어 있는 여러 인물들과의 갈등을 매우 세심하게 그려감으로써 실로 비극다운 비극을 연출해 내었다. 그 비극적 요소가 바로 윌리 로먼이라는 사실적인 가공인물을 통해 하나의 경종을 울리는 된 것이다. 그가 만들어낸 인물은 그런 점에서 도로의 표시판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는 여행자가 목적지를 향해 갈 때 보게 되는 길가의 표시판과 같이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길에서 어디로 가면 되고, 어디로 가면 안 되는가를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비극의 우물에서 퍼 올린 희망의 메시지는 인간의 존엄성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한 존재이기에 어떤 사회에서도 소외당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사회라는 구조 속에 결코 소외되어서는 안 되는 인간의 존엄성이 아무런 저항 없이 소외되고 있는 현 사회의 현실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문제의식을 일깨우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러나 대다수의 세일즈맨과 같은 소시민들은 갇혀 있는 상태에서도 자유를 갈구하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비극 중의 비극이 아닌가! 

숭고한 인간 영혼이 필요로 하는 건 사회에서의 성공, 대단한 부와 명예 등이 아니란 사실이다. 작품의 종반부에 이르러 윌리 로먼의 닫힌 마음이 어느 순간 열리게 되는데 그의 문을 여는 열쇠는 다름 아닌 큰 아들 비프의 순결한 눈물이었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 눈물에 얼음처럼 차가왔던 윌리 로먼의 마음은 녹아져 내린다. 이것이 작가가 말하는 인간의 근원적 필요가 아닐까?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가 소유한 어떤 소유에 의해서가 아닌 인간의 존재 그 자체로서 임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비극은 하나의 역설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의 비극은 그를 통해 희망을 말하는 작가의 외침이 담겨 있다. 그 죽음의 반대쪽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희망에 대한 외침이 말이다. 비인간다운 죽음을 통해 우리는 인간다운 죽음을 알게 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역설을 발견했다. 그래서 슬픈 곡조에 담겨 있는 희망찬 인간의 삶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죽음, 인간의 죽음의 그가 누구이든지 숭고한 것이다. 때문에 그 누구의 죽음이든 그 죽음이 내포하고 있는 역설적 희망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는 것이 산 자의 책임일 것이다. 나는 그 책임을 다하고 싶다. 세일즈맨의 죽음 속에서 참된 삶을 찾고 싶다. 이것이 이 책을 덮으며 내 마음의 말하는 소리이며, 앞으로 내 삶을 통해 부르고 싶은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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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목민심서
정약용 지음, 이지영 옮김 / 사군자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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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보낸 18년 간의 긴 세월 동안 심신을 수련한 결과로써 세상에 내 놓은 다산 정약용의 걸작 <목민심서>는 그의 나이 57세에 완성된 것이기에 또한 완성도가 높은 글이라 할 수 있다.

<목민심서>는 그야말로 박학다식한 다산의 학문적 실력과 현실 정치와 경제 제도 개혁에 대한 불붙는 의지, 그리고 힘없이 권련에 희생되어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에 대한 따뜻한 심정이 한데 녹아져 있는 책이기 때문에 더욱 감동적이다. 또한 2세기 가량의 긴 시간적 공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정치지도자들과 목회자들에게도 감명을 줄 만한 적용점들이 풍부한 책이기도 하다.

맹자는 평륙에 갔을 때에 목민하는 것을 가축에 기르는 것에 비유했다고 한다. 이에 다산은 "백성을 기르는 것을 일러 목(牧)이라 한 것은 예성현들께서 남기신 뜻이다."라고 말하였다. 목민관, 곧 지방 행정관인 수령은 그렇기 때문에 백성을 잘 돌보아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이런 자신의 본분대로 행치 않고 오히려 백성을 괴롭히고 그들이 치는 양들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탐욕스럽게 먹어치우는 야만적인 목민관, 정치인, 더 나아가 종교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이들은 다시 한 번 다산의 말에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

"성현들의 가르침에는 본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사도가 만 백성들을 가르쳐 각각 수신(修身)하도록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태학에서 국자들을 가르쳐 각각 수신하여 치민(治民)하게 하는 것인데, 치민이란 곧 목민인 것이다. 그렇다면 군자가 배워야 할 것은 수신이 반이요, 반은 목민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정치인들과 각종 공무들 담당하는 자들은 절반도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탐욕에만 눈이 멀어 있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기본적 자격조건이 설령 갖추어 져 있다 하더라도 백성을 기르는 목민관은 더 높은 윤리 도덕적 덕목을 지니고 있어야 하기에 그만큼 어려우며 누가나 선뜻 나설만한 자리가 아니다. 다산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록 덕망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위엄이 없으면 하기 어렵고, 비록 하고 싶은 뜻이 있다 하더라도 밝지 못하면 하지 못한다. 무릇 그런 능력이 없는 자가 목민관이 되면 백성들은 그 해(害)를 입어 곤궁하고 고통스럽게 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소명(召命)이 이런 것이다. 그건 단지 윤리 도덕적 기준에서 만이 아니라 교회를 기르는 목회자는 하늘의 부름, 하나님의 부름을 입은 자라야 할 수 있다는 것! 이런 점에서 다산의 목민관(觀)은 기독교적 소명관(觀)과 통하는 바가 있다.

이렇게 높은 부름에 응하여 나온 사람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해야만 한다. <목민심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책인데, 어떻게 하면 목민관으로서의 자질을 수련하고 목민관이 해야 할 일을 잘 할 수 있을지를 이 책에서 가르쳐 주고 있다. <목민심서>의 구조가 전체 12편으로 이뤄져 있으며 이 중 4편(부임, 율기, 봉공, 애민)은 목민관의 기본 자세에 대한 가르침을, 다음 6편(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은 목민관의 구체적인 실천 정책에 대한 가르침을, 나머지 2편(진황, 해관)은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는 문제와, 벼슬살이를 물러날 때의 마음가짐과 처심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것은 목민관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고, 이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본 책은 이 중 6전에 해당되는 내용을 제외하고 엮었는데, 결국 목민관의 마음가짐과 자세에 대한 부분만을 실은 셈이다.

하룻밤에 읽을 만한 분량이긴 하나, 그 내용상 하룻밤에 읽어 치울 책은 아니다. 이 나라를 생각하고, 청지인들을 생각하고, 목회자들을 생각하고, 또 나를 되돌아 볼 때 참으로 반성할 것이 많기에 어찌 하룻밤 독서로 끝낼 수 있겠는가? 나라의 큰 일을 하는 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크든, 작든 누군가를 돌보며 다르려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숙지해야 할 이 책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마음에 깊이 새겨본다.

"사람으로서 두려워 할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백성과 하늘과 자기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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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베스트셀러 미니북 20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안영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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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서 괴테는 작가란 이름만으로 세계문학사의 거인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시인이면서 동시에 자연 과학자였고, 사상가였으며 유능한 정치가였다. 이런 점이 작가라는 틀 안에서만 그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다양한 모습은 모두 예술성 안에서 융화되어 있고 그것을 통해서 괴테를, 그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괴테의 저 유명한 세계문학의 걸작 '파우스트'가 60년 간의 지칠 줄 모르는 작가로서의 위대성을 입증하기 위해 그의 생의 말년에 완성된 작품이라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가 지는 작가적 천재성을 세상에 드러내며 일약 '질풍노도'(疾風怒濤, Strum und Drang) 운동의 중심에 그를 세워준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괴테가 1772년 제국 고등법원의 실습생으로 몇 달 간 베츨러에 머무는 동안 샤르로테 부프(그녀는 괴테의 친구인 케슈트너의 약혼녀였다.)와 맺은 비운의 사랑에 대한 경험과 예루잘렘(괴테와 라이프치히대학에서 함께 공부한 사람)이 유부녀에게 실연당해 자살한 사건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1774년, 그의 나이 25세 때 탈고한 작품으로써 이 소설을 통해 그의 이름이 독일 문단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가하면, 당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거부하는 젊은이들의 세계에서 베르테르라는 인물은 그 자체로서 그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어 베르테르의 옷차림(푸른 연미복에 노란 조끼)을 따라 입고, 심지어 그의 자살까지 모방하려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괴테를 말하주는 이 작품, 아니 괴테가 말하고 싶었던 인간과 자연과 예술이 녹아져 있는 이 작품을 대할 때, 나는 부인할 수 없는 선입견이 있음을 숨길 수 없다. 그러나 변명하자면, 깊이 있는 문학작품일수록 다방면에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란 사실이 나로 하여금 내가 지닌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게 이 작품을  말하게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 철학자 니체에게, 심리학자 프로이드에게 각각 다른 영향을 끼쳤던 것처럼, 괴테의 이 작품 또한 철학자에게, 심리학자에게, 신학자에게 나름의 영향을 줄 수 있는 대작임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고백하건대 나 자신은 신앙적(신학적이라기 보다는)선입견으로 이 작품을 보았다. 그 선입견이란 내가 이 작품을 재해석하는 틀이기도 하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젊은이 베르테르는 일반적 해석에서 괴테 당대의 '질풍노도'적 개인, 혹은 '진정한 인간상'의 대변인으로 보여질 수도 있지만 내게 있어서 이 젊은이의 정열적인 사랑은 신자로서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를 향한 거룩한 사랑을 되새겨 보게 하는 그런 것이었다. 구약성경 아가서에 나오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 신자, 혹은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사랑에 대한 은유로 해석될 수 있다면 젊은 베르테르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세상적으로 구현된 표현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여기에는 어느 정도의 한계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부분으로 전체를 말하는 우를 벗어나 부분으로 부분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이 문학작품을 신앙적으로 재해석하는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베르테르와 로테의 사랑이 비극적 결말로 끝났다면, 이에 반해 신자와 그리스도의 사랑은 해피엔딩이란 점이 이 두 사이의 유비에 있어 가장 큰 차이점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 소설을 통해 기독교적 사랑(아가페적 사랑)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어디 까지나 베르테르의 내면적 사랑의 순수와 열정, 그 동기요 과정이다. 단언컨대 사랑하므로 병을 앓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 작품을 공정하게 비평할 수 없으리라. 이 사랑의 질병적 특성은 세상적이고 육욕적인 것으로만 규정지을 수는 없다. 신앙적 사랑 안에도 이런 종류의 병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니까. 다만 이 병적 징후와 양상에 있어서 둘 사이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집착과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투신해 버릴 수 있는 희생 등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의 플롯을 구성하는 데 작가가 사용한 방식은 독자의 흥미를 자아내는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작가 자신이 베르테르의 사랑과 비극적 결말을 세상에 알리는 편저자의 입장에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또한 베르테르라는 1인칭 주인공이 되어 있는 것, 그리고 이것이 소설 속에 서한문의 형식에 담겨 또 다른 인물인 빌헬름에게 전달되어 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동안 독자로서 나 자신은 베르테르가 되어보기도 하고, 그를 지켜보는 냉정한 관찰자가 되어 보기도 하며, 그와 우정어린 관계에 있는 친구가 되어보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로테라는 여인과 그의 남편 알베르트의 내면 상태에 있어서는 절제된 표현으로 작가는 철저히 베르테르라는 젊은이에게 집중된 시각을 부여하고 있다. 이것은 로테나 알베르트는 상세히 묘사할 필요가 없는 당시 만연한 시대 정신의 대변자들을 뿐이며 종교적으로, 혹은 관습적으로 얽매여 있는 일반 대중을 대변해 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은 오직 젊은 베르테르 뿐이다. 이것은 작가가 직면한 시대 정신과 그 속에 외로이 떠 있는 섬과 같은 작가 자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작품 속에 풍성히 담겨 있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순수한 사랑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이것이 곧 슬픔이다. 받아들여지지 못한 사랑, 이해받지 못한 정열, 이런 슬픔으로 인해 그 순수한 젊은이가 택한 것이 바로 죽음이다. 이런 비극적 결말을 통해 작가는 오히려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는 것이로 보여지는데, 그것은 베르테르는 스스로의 죽음의 선택을 약자의 선택처럼 말하는 알베르트의 관점과는 다르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선택이 있기 오래 전에 있었던 베르테르와 알베르트 사이의 자살 논쟁은 이 소설의 비극적 결말에 대한 하나의 복선인데, 여기서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와는 상이한 견해를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알베르트는 도덕군자식의 생각으로 자살을 죄악시하지만, 베르테르에게 있어 자살은 열병을 앓다가 죽는 사람과 같이 여겨지는 것이다. 알베르트는 일반명제로만 베르테르를 설득하려 하지만, 베르테르는 그것 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나약성을 말하며 자살을 변호하려 한다. 이것은 절대성과 상대성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베르테르는 그리고 괴테 자신은 인간의 한계와 나약성은 인간 자신이 절대성을 지니고 판단할 수 없는 것으로 말하며, 인간은 수많은 예외 속에서 상대적 가치 속에서 흔들리는 역약한 갈대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이 소설에서 말하는 자살이란 '미학적 자살론'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작가는 자살 자체를 아름답게 색칠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 현실을 문제를 동정어린 마음으로 쓰고 있고, 이것을 끝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 고정된 관념과 틀에 박힌 사고, 흑백논리는 타파되어야 할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떤 점에서 이 소설은 내세적 관념을 주입시키고 있다. 그것은 현세가 끝이 아니고 죽음 이후에 끝없이 이어지는 세계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베르테르가 자살이라는 자신의 용기어린 결심을 하기까지 는 절망 뿐 아니라 희망이 동기부여가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르테르는 죽음 앞에 오히려 당당하다. 신에게 그것을 감사하기까지 한다. 이런 희망- 이루어 질 수 없는 꿈, 다다를 수 없는 희망의 세계에 대한 동경은 나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안타까움이다. 그 때보다 지금은 오히려 이런 꿈 속에서 자신을 내던지는 이들이 더 많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괴테가 그토록 동정했던 유약한 갈대가 스스로 선택한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죽음 건너 편에 있을 인간의 모습 또한 베르테르 만큼이나 당당할 수 있을까? 이것은 작가의 종교관에 있어 절대적 신관념의 부재가 낳은 결과라고 볼 수있다. (괴테 자신은 범신론적 신앙을 가진 사람이란 점을 볼 때)그 자체로써 안타까움이라고 할 수 밖에... 다만 어느 누구에게나 미지의 세계이므로, 현실 세계에서는 누구나 자유로이 말할 수 있다는 사실 밖에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말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분명 자유는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베르테르나 괴테나 그리고 나 자신 까지도... 그러므로 숙연히 머리를 숙이자. 알베르트의 정신을 높이 살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베르테르의 정신 편에 속할 수도 없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므로... 인간 자신은 절대적 판단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절대적 판단자 앞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그 사실을 숙고해야 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주는 위안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편저자의 위치에서 첫머리에 작가가 말한 것처럼 세상에 드러내 놓고 말하진 못해도 수많은 인간들이 실상 베르테르와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 이것이 비운에 가득 찬 인간의 실존에 이해를 불러 일으키고, 그래서 위안을 주는 것이다. 비록 소설 속 주인공의 인생이며 운명이지만, 작가는 이를 통해 인간이란 이런 존재임을 말해주며 그런 실존 앞에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을 달래주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소설이 읽혀전해지는 이유는 그 모두가 베르테르를 보며 자신 안에 있는 실존적 자아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나에게 있어서도 이 소설은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에 빛을 더해준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 자신의 해석를 덧붙여서 얻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괴테가 없었던들, 젊은 베르테르가 없었던들 생각지 못했을 그런 것을 말이다. 어느 하나로 규정지울 수 없는 많은 것을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내 안에 있는 사랑의 열정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내게는 없는 완전한 사랑의 열정이 내가 사랑하는 그리스도께 있음을 위안 삼는다. 그러나 부딪혀 오는 책임감은 그 사랑에 단지 위로를 받는 것만이 아닌 나에게 그 사랑이 덮여지도록, 이를 위해 깨어져야할 수많은 내 안의 고집 센 자아와 헛된 자랑, 공허한 지식들을 내 던져야 한다는 것, 그런 외침이 끊임없이 내게 들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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