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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무게 믿음의 글들 262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편집자인 월터 후퍼는 "교부들의 글과 같은 반열에 놓아도 될 만큼 훌륭한 설교"라고 본서를 극찬하고 있다.
개혁주의 관점에서 말하는 설교와는 거리가 먼 방식이기는 하나,
곳곳에서 뭍어 나오는 루이스의 성경적으로 올바르고 신앙적으로 확고한 메시지는 과연 보통의 설교를 능가하는
매력이 담겨 있다.
 
<영광의 무게>는 연대기적 방식의 배열로써 그의 성공회 배경 가운데 행한 설교와 몇몇 강연들을 엮어 놓은 책이다.
루이스의 책 어디서나 느낄 수 있는 그의 해박하면서도 따뜻한,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메시지가 있어 이 책을 읽는 재미와 감동을 더해 준다.
  
편집자의 의도대로 '영광의 무게'는 연대기적 배열과 상관없이 본서의 맨첫머리에 나오게 되었다. 그만큼 '영광의 무게'는 본서를 특징짓는 루이스가 전하는 영원한 가치로서의 천국과 불멸적 인간의 영광스러움이 넘쳐 난다.
루이스는 자신의 기독교 세계이 확고하지만 이를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전하는 기술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어떤 독자층이 읽더라도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힘이 담겨져 있는 것 같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변증가가 갖추고 있어야 할 자질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루이스에게 인간이란 '불멸의 소름끼치는 존재'가 되거나, 아니면 '영원한 광채가 될 이들'이 된다. 후자를 바라봄에 있어 필요한 것 바로 '겸손'이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잠재적 영광 뿐 아니라 이웃 사람의 영광까지 생각할 때 그 영광의 무제가 너무 무거워서 '겸손'해야만 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루이스의 글에 내재된 부드러운 호소력은 그가 의도하지 않고 자신 속에 담겨진 자연스러움으로 표출되는 '겸손' 에 기인한 것임을 알게 된다.
 
"평시든 전시든, 미덕을 실천하고 행복을 누릴 시간을 미래로 미루지 마십시오. 장기 계획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매순간 '주께 하듯'일하는 사람이 무슨 일이건 기분 좋게 가장 잘해 냅니다."
 
루이스에게 천국은 단지 관념적이 시공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개인사적이든, 세계사적이든 어떤 극한의 상태 속에서도 미소지을 수 있고, 유머를 잃지 않을 수 있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월터 후퍼가 덧붙인 편집자의 글에서 루이스가 병으로 고생하며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얼마나 초연히 자신의 삶을 누렸는가를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그의 삻에 베어 있는 신앙의 진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본서의 변증적 성격의 글 가운데 백미는 옥스퍼드 소크라테스 클럽에서 발표한 '신학은 시인가?'라는 강연인 것 같다. 여기서 루이스는 기독교 신학만의 독특성을 비교종교학적 비평을 통해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결국 신학은 시에 불과한 것일 수 없다는 것이 루이스의 주장인데, 그의 소박하면서도 명쾌한 진술은 기독교 신학의 특이성은 그것이 다른 종교와 비교할 때 오히려 시적이지 못하다는 있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 문학교수로서 그의 조금도 망설임 없이 오히려 그 이유에 만족하면서 기독교 신학을 변호하고 있다. 이어서 소위 '과학적 세계관'의 모순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저는 태양이 떠오른 것을 믿듯 기독교를 믿습니다.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서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루이스의 기독교 세계관은 외부의 빛보다 내부의 빛, 자연적 이성보다 거듭난 이성을 통해 보게 되는 '시력'과 같은 것이다.
 
'패부패거리'와 '멤버십'은 공동체성에 관한 담론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 글은 오히려 루이스 시대보다 수십년 후인 오늘날은 오늘에 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우정'을 나누는 자연스러운 사귐의 관계와 특별한 배우 소속감을 목표로 하는 '내부패거리' 사이에서, 그리고 '사적 기독교관'과 '현대 집단주의' 사이에서 기독교의 참 모습이 과연 무엇인가를 루이스는 본 강연을 통해 가르쳐 주고 있다.
 
"저는 일시적인 것들을 잘 통과하여 영원한 것들을 잃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것들을 잘 통과하여 일시적인 것들을 잃지 않게 해 달라고 구하고 말았습니다."
'실언'의 한 대목이다.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들 사이에서 흔들리고 방황하는 연약함에 대한 고백과 더불어 그는 독자들에게 확고한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루이스의 <영광의 무게>는 변화의 속도가 가속화되면서 일시적인 것들이 춤추는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좀더 깨어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경각심을 일깨워 준다. 사랑의 매를 드는 부드러운 엄마의 마음을 느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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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메일 - 전 2권 - 기업 사냥꾼이 보내온 녹색 경고장
조주환 지음 / 바다출판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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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처음 시간을 잊고 몰입하여 1권을 읽었을 땐 M&A와 관련된 전문지식 소설 정도로 생각하고 책을 폈지만 실제로 그 안에는 한 청년의 꿈과 사랑, 그리고 비정해 볼일 정도로 냉정한 승부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한 번 손을 댄 책은 단숨에 두 권을 읽어도 결코 지루하지 않은 재미와 감동을 안겨 주었다.

 

M&A를 통해 승부를 펼치는 등장인물들은 선과 악의 미묘한 경계선상에서 사는 존재들로 보였다. 이것이 아마도 작가의 의도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기업, 경영 등의 내용을 획일화된 도덕의 잣대로만 평가할 수는 없을 것에 공감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선과 악의 기준의 상대화 혹은 정당화를 인정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다면적인 평가에 있어

M&A의 세계는 때로 한 인간의 윤리도덕적 판단을 넘어서는 승부의 세계란 점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그 이면에 살고 죽을 수많은 민초들의 애환을 담고 있지는 않다. 이유는 이 소설이 그런 휴머니즘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것을 통해

M&A라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현상과 연루되어 인간의 능력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려는 것 같다.

 

최영준이라는 캐릭터는 단연 이 소설을 읽는 재미 중 하나다. 닥터 하이에나로 불리는 영준과 그가 경영하는 니코스홀딩스는 M&A 업계에 등장한 다윗이며, 그는 성경에서처럼 대한그룹이라는 골리앗을 보기 좋게 쓰러뜨린다. 혜성전자를 인수하는 과정세서 펼쳐지는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은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흥미로운 줄거리다.

 

누가 어떻게 M&A는 '금융의 꽃'일 수도 있고, '기업 사냥'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이 말해주는 건 이런 흐름과 현상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고, 그 속에서 누가 더 정당한 룰을 가지고 악의적이지만 않은 M&A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악의적 M&A라는 것은 순전히 돈에만 눈이 먼 그야말로 기업 사냥을 의미한다. 이것과 대조적으로 주인공이 이끄는 투자회사의 M&A 방식은 쓰러져 가는 회사를 되살려 그 가치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선의의 것으로 부각된다. 이런 점에서는 M&A 상에도 어느정도 목적과 수단에 있어 선과 악의 구도는 있는 셈이다. 다만 그것이 윤리 도덕적 구분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는 것 뿐이다.

 

한 인간의 사랑과 꿈, 그리고 짧디 짧은 인생살이 동안의 성공과 실패 이 모든 중요한 테마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단지 M&A와 관련된 전문 소설로만 평가하기에 더 묵직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자는 소설의 주된 흐름을 M&A를 중심으로 진행시킴으로써 소설의 박진감을 살려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과 동시에 이 모든 것을 초연한 한 인간의 사랑과 꿈 역시 끝까지 살려내는 노련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 특정 기업의 비리와 문제만이 아니라 기업의 생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일각연이 생기게 되는 것 같다. '아 그래서 이런 거구나'하는...

 

이 작품이 처녀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작가는 더욱이 문학수업과는 거리가 먼 M&A 전문가라고 한다. 현장에서 M&A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을테지만 작가와 같이 이것을 재미와 감동으로 엮어 나가 묵직한 장편소설로 재탄생시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작가의 이후 행보에도 관심이 생긴다. 그런 점에서 작가에게 박수와 관심을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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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와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 지음, 정근두 옮김 / 복있는사람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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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설교자의 초상화를 보다


조준환


어느 날 우연히 서점에 들렀다. 거기서 뜻밖의 신간을 만났는데 그 책은 다름 아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와 설교자>였다.

이 책과의 만남은 자그마치 10년 전 신학교에 입학했던 첫 해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목사와 설교>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었다. 설교가 무엇인지 아무런 지식도 없었던 신학교 초년생 때 읽은 책이었지만 그래도 무언가 가슴 뭉클한 감동과 도전으로 기억되는 책이었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론을 전공한 정근두 목사님의 충실한 번역으로 새롭게 탄생한 책이기에 고민할 것 없이 샀고 그날로 바로 읽고 또 읽었다. 인간의 기억의 무능력을 절감하면서 마치 정말 처음 읽은 사람처럼 책의 내용이 마음에 와 닿았다. 강연식의 문체를 그대로 살려서 번역한 탓인지 몰라도 내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강의를 직접 듣는 학생과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로이드 존스다움’이란 신조어를 만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매 장마다 ‘과연...’, ‘맞아...’하는 내적인 탄성을 자아내게 만드는 내용을 접하며 나는 다시금 이 투명한 설교의 거울 앞에서 나를 보게 되었다. 지금의 내 모습이, 내 사역이 참된 설교자의 모습과 얼마나 비슷한지, 아니면 형편없이 어긋나 있는지를... 물론 후자 쪽에 서 있는 내 모습에 스스로 실망하며 뉘우치고 반성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이 시대에 참된 설교자상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아서 내 모습도 그런대로 쓸 만하다는 착각 속에 빠져 살 뻔한 나를 구해주었기 때문에 마음 아픈 고마움을 느낀다.

유명한 화가의 대작을 보듯이 로이드 존스를 통해 나는 참된 설교자의 초상화를 보게 되었다. 이것이 내게는 ‘큰 바위 얼굴’과 같아서 계속 응시하고 바라보며 꿈을 키운다면 나도 그렇게 변하리라는 희망을 주기에 더욱 고마움을 느낀다.


로이드 존스는 영혼의 의사와 같다. 그는 그의 시대와 현 시대를 불문하고 매 시대마다 변하지 않는 부패한 인간 본성의 문제 속에서 사람들이 설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적 병폐를 지적한다. 그 병폐 속에 함몰되어가는 설교의 진정성을 되살리며 그는 왜 설교가 교회의 최우선 과업인지를 본 강의를 통해 외치고 있다.

그 누구보다 교회사에 정통한 로이드 존스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 특히 부흥의 역사 속에서 면면히 흐르는 불꽃같은 설교자들을 통해서 참된 설교의 권위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는 이런 권위 있는 설교가 어떤 것인가를, 또 어떻게 참된 설교를 할 수 있는가를 세세히 가르쳐 주고 있다.

로이드 존스에게 설교는 ‘설교문’과 ‘설교행위(전달)’로 구분되는데 그는 특히 설교행위에 있어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아무리 학식 있고 훌륭해 보이는 설교문을 쓴다고 해도 그 자체가 설교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실제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의 전 과정에서 설교의 진가가 우러나온다고 말한다. 자신은 당시 유행하던 라디오 방송 설교의 요청에 끝끝내 응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을 통해 이런 설교에 대한 그의 신념이 얼마나 투철했는가를 알 수 있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의 필요성과 정의, 그리고 일반적인 특징과 특별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설교의 총체적인 면모를 이 책을 통해 가르쳐 주었다.


아, 책을 읽기는 쉽지만 이 내용을 소화시켜서 실제 설교에 적용하기까지는 얼마나 어려운가? 오늘날의 설교자 자신의 부족함도 문제거니와 현대교회의 회중의 수준 역시 이런 식의 설교에 얼마나 동의하며 이를 갈망할지가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설교와 진정한 설교자를 향한 추구와 노력은 결코 게을리 해서는 안 될 숙명적인 과제임을 깨닫는다. 

책을 덮지만 이 책은 가르침은 덮여지지 않는다. 계속해서 내 마음에 울리고 퍼지는 메아리처럼 그렇게 살아있다. 누군가 기름부음이 있는 책을 가리켜 ‘그 책을 읽고 무릎 꿇게 되는 책’이라 말한 것이 기억난다. 그렇다면 이 책은 분명 기름부음이 있는 책일 것이다. 지금 내가 무릎 꿇고 기도하게 되니 말이다.


“오 하나님,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를 말라있는 이 시대를 보시옵소서.

엘리사가 엘리야의 하나님을 외치며 간구했듯이,

오늘 저는 주께서 영광스런 교회 역사 속에 세우신 불꽃같은 설교자들이

오늘 이 시대 가운데도, 우리 조국 교회 가운데도 일어나기를 간구합니다.

이 땅 가운데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이 영광스럽게 달음질하며,

그 말씀의 권위가 혁혁한 권세로 친히 입증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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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록 - 불안 또는 회의에 관하여
필립 얀시 지음, 정영재 옮김 / 좋은씨앗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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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필립 얀시의 글은 편안하게 읽을 수 있고, 그 속에서도 나름의 감동과 도전, 그리고 일깨움을 얻을 수 있어 유익하다. 그렇다고 그가 가벼운 글들을 쓴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무거운 주제와 더불어 싸우는 사람이다. 다만 읽는 이의 편에서 그가 싸움 끝에 얻어낸 사실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풀어놓을 뿐이다.

좋은 씨앗에서 <비망록>이란 제목으로 펴낸 <I was just wondering>이란 책은 필립 얀시가 <Christianity Toaday>에 1983년부터 기고한 월간 칼럼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칼럼인 만큼 이 책에서 매우 다양한 주제의 글들이 나온다. 중요한 건 이런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필립 얀시가 어떠한 견해를 갖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이 책은 그를 통해서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물을 바라보는 어떤 관점과 견해를 가져야 할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신앙인들이 편히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고대와 중세와 근대를 거쳐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지금까지 축적된 역사의 의미와 현재 발생하고 변화되는 급변하는 세태 등을 어떠한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 오늘날이야 말로 신앙적 지성의 능력이 절실히 요청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은 맹목적 신앙 내지는 보수적인 신앙의 도피성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있다. 세상이 요구하는 무수히 많은 질문들에 대해 기독교는 벙어리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런 점에서 필립 얀시의 글은 우리에게 먼저는 어렵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끊임없이 도전해 오는 세상의 질문들에 대해 생각할 것을 도전하고 있다. 그래서 이 글에는 그야말로 다양한 주제의 글들이 담겨 있다. 우주에 대해, 현대 과학 이론에 대해, 음담패설, 에이즈, 전쟁 기타 등등의 평소 우리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어렵게 생각한 주제들이 담겨 있다. 물론 필립 얀시가 이런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그는 용감하다고 말해야 한다.

책은 6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안에 총 44개의 칼럼이 있다. 그 속에 인간과 세상, 위인들, 성경 이야기, 내세에 대한 이야기들을 큰 주제가 담겨 있다. 내 부족한 기억력이 이 모든 이야기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의 독창적이 사고와 진지함, 그리고 성경적인 조망 등은 어떤 글 속에도 융해되어 있었음을 기억할 수 있다. 전문적인 영역에서 부족할 수는 있어도 그는 일관된 신앙의 관점에서 다양한 세상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생각해 본다. 내가 얼마나 무성의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내 지성의 활동하는 영역은 얼마나 편협하기 짝이 없는지를...

필립 얀시가 세상 속에서, 성경 속에서 끄집어 낸 중요한 화두들을 더 깊이 음미해 보고 생각해 봐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만물박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기엔 난 너무나 연약한 갈대이니까. 하지만 나는 또한 생각하는 갈대가 되어야 함을 잊지말고 포기하지 말자. 무지로의 도피가 참된 신앙인양 생각하지 말고 내 게으른 지성을 일깨워 이 땅을 살아가면서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 많은 것들과 더불어 씨름하도록 하자.

필립 얀시는 생각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를 본받아 나 또한 생각하는 신앙인으로 이 땅을 살아가도록 힘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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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사랑
빌 브라이트 지음, 이용복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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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지만 지금은 주님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있다. 그의 신앙 회복을 위해 책을 선물하고픈 마음에 서점에 들렀다. 여러 제목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 중에서도 빌 브라이트가 지은 <처음 사랑 First Love>란 책이 유독 내 마음을 붙들었다. 아마도 제목 그 자체가 마음에 와 닿은 모양이다.

내가 읽어보지 않은 책을 선물하기는 뭐해서 먼저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처음엔 그저 다른 이에게 줄 책으로 생각하고 나와는 거리감 있는 자세로 책장을 열었지만 이내 내 마음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독자는 다름 아닌 나 자신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국제대학생선교회의 설립자인 빌 브라이트가 생의 말년에 그것도 호흡이 곤란하여 산소통을 의지하여 연명하고 있을 무렵 쓰여진 책이다. 그만큼 죽어가는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하고픈 마지막 유언같은 애절함이 묻어 나오는 책이다. 그는 프롤로그에서 이런 독자로 하여금 기도하며 이 책을 읽을 것을 당부하고 함께 기도에 참여시킨다.


“사랑하는 주님, 제가 이 책을 읽을 때 저를 도우사 저를 향한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새롭게 깨닫고 경험하게 하소서. 그리고 제가 당신을 향한 처음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옵소서.” 


그는 한편으론 격려를, 다른 한편으로 충고로 주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할 것을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간증적인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이런 말이 자신의 평생 삶 속에서부터 우러져 나오는 것임을 입증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가 말하는 첫사랑이란 젊은이들의 감성어린 표현 이상의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서 차츰 시들해지는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이 잃어버리기 쉬운 사랑을 뜻한다.


1장과 2장은 본서의 서론에 해당되는 것으로써 첫사랑을 회복할 필요성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주고 있다. 그가 말하는 첫사랑의 회복은 단지 감상적 느낌 이상의 전인격적인 회복이다. 따라서 그는 본론 2장부터 5장까지의 내용에서 첫사랑 회복의 방법과 과정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런 다음 결론부분인 6장과 7장에서 첫사랑이 회복됨으로써 오는 결과인 부흥과 보상을 말하고 있다.

규장 출판사의 메인 광고는 다소 첫사랑의 감정을 자극하는 문구로 이 책을 어필하려고 하지만 이 책은 그런 감상적인 내용보다는 오히려 논리적인 흐름을 띄고 있다. 그 논리적인 흐름인 전체적으로 요한계시록 2장 1-7에 나오는 첫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교회를 향한 주님의 메시지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저자가 강조하는 회복인 전인적인 것이기에 그는 머리, 마음, 영혼, 힘을 다한 회복으로 독자들을 초청하고 있다. 회복의 과정에서의 최고 정점은 다름 아닌 회개이다. 또 이런 회개가 일어나기 위해서 먼저 첫사랑의 기억과 그로부터 멀어진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후회가 필요함을 말한다. 이런 전체적인 흐름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일 것이다. 저자는 6장 부흥에서 이 비유를 드라마틱하게 풀어주고 있다.


“첫사랑!” 이 책을 읽는 내내 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게 되었다. 인간의 삶이란 변화의 연속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한 이후 지금까지의 내 삶 속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이 변화가 모두 긍정적인 변화만은 아닌 것 같다. 그 중에서는 변하지 말아야 하는데 변해버린 것들도 있다. 나에게 있어 그건 분면 주님을 향한 순수하고 뜨거웠던 첫사랑이다. 다른 누군가에게 첫사랑의 회복을 말하기 앞서 나 자신부터 회복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첫사랑은 빠져버린 채 온갖 형식과 외적인 노력만으로 신앙생활을 이어나간다는 게 얼마나 불행한 신자의 삶이겠는가를 깊이 되새겨 본다.

첫사랑은 순수한 사랑이다. 순수란 그 안에 무언가를 더 첨가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그럴 때 오히려 변질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수함은 단지 그대로 지켜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첫사랑은 순수하게 지켜져야 할 것이 아닌가! 지난 날,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첫사랑을 간직하고 지켜나가지 못한 내 모습을 돌이키며, 가장 핵심적인 문제인 죄를 회개함으로써 주님을 향한 내 마음의 순수하고 일편단심한 첫사랑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런 바람을 안고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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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타 2004-09-10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앙에 대한 믿음이 대단하시는 말밖에는 없네요. 그 친구분에게는 좋은 책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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