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베스트셀러 미니북 20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안영란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로서 괴테는 작가란 이름만으로 세계문학사의 거인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시인이면서 동시에 자연 과학자였고, 사상가였으며 유능한 정치가였다. 이런 점이 작가라는 틀 안에서만 그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다양한 모습은 모두 예술성 안에서 융화되어 있고 그것을 통해서 괴테를, 그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괴테의 저 유명한 세계문학의 걸작 '파우스트'가 60년 간의 지칠 줄 모르는 작가로서의 위대성을 입증하기 위해 그의 생의 말년에 완성된 작품이라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가 지는 작가적 천재성을 세상에 드러내며 일약 '질풍노도'(疾風怒濤, Strum und Drang) 운동의 중심에 그를 세워준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괴테가 1772년 제국 고등법원의 실습생으로 몇 달 간 베츨러에 머무는 동안 샤르로테 부프(그녀는 괴테의 친구인 케슈트너의 약혼녀였다.)와 맺은 비운의 사랑에 대한 경험과 예루잘렘(괴테와 라이프치히대학에서 함께 공부한 사람)이 유부녀에게 실연당해 자살한 사건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1774년, 그의 나이 25세 때 탈고한 작품으로써 이 소설을 통해 그의 이름이 독일 문단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가하면, 당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거부하는 젊은이들의 세계에서 베르테르라는 인물은 그 자체로서 그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어 베르테르의 옷차림(푸른 연미복에 노란 조끼)을 따라 입고, 심지어 그의 자살까지 모방하려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괴테를 말하주는 이 작품, 아니 괴테가 말하고 싶었던 인간과 자연과 예술이 녹아져 있는 이 작품을 대할 때, 나는 부인할 수 없는 선입견이 있음을 숨길 수 없다. 그러나 변명하자면, 깊이 있는 문학작품일수록 다방면에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란 사실이 나로 하여금 내가 지닌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롭게 이 작품을  말하게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 철학자 니체에게, 심리학자 프로이드에게 각각 다른 영향을 끼쳤던 것처럼, 괴테의 이 작품 또한 철학자에게, 심리학자에게, 신학자에게 나름의 영향을 줄 수 있는 대작임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고백하건대 나 자신은 신앙적(신학적이라기 보다는)선입견으로 이 작품을 보았다. 그 선입견이란 내가 이 작품을 재해석하는 틀이기도 하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젊은이 베르테르는 일반적 해석에서 괴테 당대의 '질풍노도'적 개인, 혹은 '진정한 인간상'의 대변인으로 보여질 수도 있지만 내게 있어서 이 젊은이의 정열적인 사랑은 신자로서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를 향한 거룩한 사랑을 되새겨 보게 하는 그런 것이었다. 구약성경 아가서에 나오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 신자, 혹은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사랑에 대한 은유로 해석될 수 있다면 젊은 베르테르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세상적으로 구현된 표현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여기에는 어느 정도의 한계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부분으로 전체를 말하는 우를 벗어나 부분으로 부분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이 문학작품을 신앙적으로 재해석하는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베르테르와 로테의 사랑이 비극적 결말로 끝났다면, 이에 반해 신자와 그리스도의 사랑은 해피엔딩이란 점이 이 두 사이의 유비에 있어 가장 큰 차이점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 소설을 통해 기독교적 사랑(아가페적 사랑)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어디 까지나 베르테르의 내면적 사랑의 순수와 열정, 그 동기요 과정이다. 단언컨대 사랑하므로 병을 앓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 작품을 공정하게 비평할 수 없으리라. 이 사랑의 질병적 특성은 세상적이고 육욕적인 것으로만 규정지을 수는 없다. 신앙적 사랑 안에도 이런 종류의 병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니까. 다만 이 병적 징후와 양상에 있어서 둘 사이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집착과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투신해 버릴 수 있는 희생 등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의 플롯을 구성하는 데 작가가 사용한 방식은 독자의 흥미를 자아내는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작가 자신이 베르테르의 사랑과 비극적 결말을 세상에 알리는 편저자의 입장에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또한 베르테르라는 1인칭 주인공이 되어 있는 것, 그리고 이것이 소설 속에 서한문의 형식에 담겨 또 다른 인물인 빌헬름에게 전달되어 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동안 독자로서 나 자신은 베르테르가 되어보기도 하고, 그를 지켜보는 냉정한 관찰자가 되어 보기도 하며, 그와 우정어린 관계에 있는 친구가 되어보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로테라는 여인과 그의 남편 알베르트의 내면 상태에 있어서는 절제된 표현으로 작가는 철저히 베르테르라는 젊은이에게 집중된 시각을 부여하고 있다. 이것은 로테나 알베르트는 상세히 묘사할 필요가 없는 당시 만연한 시대 정신의 대변자들을 뿐이며 종교적으로, 혹은 관습적으로 얽매여 있는 일반 대중을 대변해 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은 오직 젊은 베르테르 뿐이다. 이것은 작가가 직면한 시대 정신과 그 속에 외로이 떠 있는 섬과 같은 작가 자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작품 속에 풍성히 담겨 있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순수한 사랑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이것이 곧 슬픔이다. 받아들여지지 못한 사랑, 이해받지 못한 정열, 이런 슬픔으로 인해 그 순수한 젊은이가 택한 것이 바로 죽음이다. 이런 비극적 결말을 통해 작가는 오히려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는 것이로 보여지는데, 그것은 베르테르는 스스로의 죽음의 선택을 약자의 선택처럼 말하는 알베르트의 관점과는 다르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선택이 있기 오래 전에 있었던 베르테르와 알베르트 사이의 자살 논쟁은 이 소설의 비극적 결말에 대한 하나의 복선인데, 여기서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와는 상이한 견해를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알베르트는 도덕군자식의 생각으로 자살을 죄악시하지만, 베르테르에게 있어 자살은 열병을 앓다가 죽는 사람과 같이 여겨지는 것이다. 알베르트는 일반명제로만 베르테르를 설득하려 하지만, 베르테르는 그것 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나약성을 말하며 자살을 변호하려 한다. 이것은 절대성과 상대성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베르테르는 그리고 괴테 자신은 인간의 한계와 나약성은 인간 자신이 절대성을 지니고 판단할 수 없는 것으로 말하며, 인간은 수많은 예외 속에서 상대적 가치 속에서 흔들리는 역약한 갈대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이 소설에서 말하는 자살이란 '미학적 자살론'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작가는 자살 자체를 아름답게 색칠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 현실을 문제를 동정어린 마음으로 쓰고 있고, 이것을 끝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 고정된 관념과 틀에 박힌 사고, 흑백논리는 타파되어야 할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떤 점에서 이 소설은 내세적 관념을 주입시키고 있다. 그것은 현세가 끝이 아니고 죽음 이후에 끝없이 이어지는 세계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베르테르가 자살이라는 자신의 용기어린 결심을 하기까지 는 절망 뿐 아니라 희망이 동기부여가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르테르는 죽음 앞에 오히려 당당하다. 신에게 그것을 감사하기까지 한다. 이런 희망- 이루어 질 수 없는 꿈, 다다를 수 없는 희망의 세계에 대한 동경은 나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안타까움이다. 그 때보다 지금은 오히려 이런 꿈 속에서 자신을 내던지는 이들이 더 많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괴테가 그토록 동정했던 유약한 갈대가 스스로 선택한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죽음 건너 편에 있을 인간의 모습 또한 베르테르 만큼이나 당당할 수 있을까? 이것은 작가의 종교관에 있어 절대적 신관념의 부재가 낳은 결과라고 볼 수있다. (괴테 자신은 범신론적 신앙을 가진 사람이란 점을 볼 때)그 자체로써 안타까움이라고 할 수 밖에... 다만 어느 누구에게나 미지의 세계이므로, 현실 세계에서는 누구나 자유로이 말할 수 있다는 사실 밖에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말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분명 자유는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베르테르나 괴테나 그리고 나 자신 까지도... 그러므로 숙연히 머리를 숙이자. 알베르트의 정신을 높이 살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베르테르의 정신 편에 속할 수도 없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므로... 인간 자신은 절대적 판단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절대적 판단자 앞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그 사실을 숙고해야 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주는 위안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편저자의 위치에서 첫머리에 작가가 말한 것처럼 세상에 드러내 놓고 말하진 못해도 수많은 인간들이 실상 베르테르와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 이것이 비운에 가득 찬 인간의 실존에 이해를 불러 일으키고, 그래서 위안을 주는 것이다. 비록 소설 속 주인공의 인생이며 운명이지만, 작가는 이를 통해 인간이란 이런 존재임을 말해주며 그런 실존 앞에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을 달래주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소설이 읽혀전해지는 이유는 그 모두가 베르테르를 보며 자신 안에 있는 실존적 자아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나에게 있어서도 이 소설은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에 빛을 더해준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 자신의 해석를 덧붙여서 얻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괴테가 없었던들, 젊은 베르테르가 없었던들 생각지 못했을 그런 것을 말이다. 어느 하나로 규정지울 수 없는 많은 것을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내 안에 있는 사랑의 열정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내게는 없는 완전한 사랑의 열정이 내가 사랑하는 그리스도께 있음을 위안 삼는다. 그러나 부딪혀 오는 책임감은 그 사랑에 단지 위로를 받는 것만이 아닌 나에게 그 사랑이 덮여지도록, 이를 위해 깨어져야할 수많은 내 안의 고집 센 자아와 헛된 자랑, 공허한 지식들을 내 던져야 한다는 것, 그런 외침이 끊임없이 내게 들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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