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기억을 더듬다 보면 언제나 떠오르는 풍경 하나가 있다.
그날 어머니는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타고 읍내로 장을 보러 나갔다. 나는 어머니가 집을 비우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란 생각에 불안에 떠는 아이였다. 그날도 차디찬 방에 엎으려 온갖 불길한 상상에 시달리다 지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먼 데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아버지의 오토바이가 돌아왔다. 나는 자던 몸을 발딱 일으켜 밖으로 달려 나갔다. 마당에는 땅거미가 깔리고 꽃과 나무가 어둠에 잠긴 가운데 어머니의 얼굴만 등불이 켜진 듯 환했다. 그 순간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날 어머니의 손에는 ‘고소미’라는 과자 두 봉지와 동화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절박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기다린 그날 무슨 보상처럼 만난 동화책이 바로 <안데르센 동화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꽤 조잡한 그 책에는 이야기가 여러 편 실려 있었을 텐데, ‘성냥팔이 소녀’와 ‘백조 왕자 이야기’만 기억난다. 나는 특히 백조로 변한 11명의 왕자들과 그 마법을 풀기 위해 쐐기풀로 오빠들의 옷을 짓던 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했다. 공주가 달도 뜨지 않는 캄캄한 밤 무덤가에서 쐐기풀을 뜯는 장면은 벌써 이십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그 그림이 너무나 무서워서 그 장은 읽지 않고 얼른 다음 장으로 넘기곤 했다. 어쨌든 <안데르센 동화집>을 계기로 나는 더는 어머니를 기다리지 않게 되었고, 현기증 나게 감미로운 책 읽기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아마 나는 그때 아기에서 어린이가 된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어머니가 딸의 욕망을 무시하고 책을 잘 사 주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어머니는 공부도 못하는 데다 친구들과 노는 것도 잼병인 딸년이 집에 틀어박혀 눈만 자꾸 나빠지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그랬거나 말거나 나는 친구 집을 순방하며 빌려온 계몽사 판 세계명작을 기갈이 들린 것처럼 읽어 댔고, 어머니는 내가 현실과 이야기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가 될까 봐 책을 감춰두고 읽지 못 하게 했다.
궁여지책으로 나는 쐐기풀을 뜯던 공주처럼 몰래 장롱에 숨어서 열린 문틈으로 들어온 한줄기 빛에 의지해 책장을 넘기곤 했는데, 사실 나는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한다기보다는 쐐기풀로 옷을 짓는 공주가 되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영원한 이야기 세계에 머물기를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른다.
어른이 된 지금 나는 고통과 침묵의 쐐기풀로 이야기의 옷을 짓는 사람도 되지 못했고 불평불만 가득한 독자가 되었다. 그리고 누구의 간섭도 없는 혼자만의 방에서 좋은 책을 욕심껏 쌓아두고 살아도 그 시절 그때처럼 달디 단 행복한 책 읽기를 두 번 다시 느끼지 못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없어지는 그 순전한 완전 몰입의 상태를 맛보기에는 내 신경 다발이 너무 굵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매번 새 책을 만날 때마다 기대를 한다. 어머니를 기다리던 그날 뜻하지 않게 만난 안데르센처럼 다른 세계로 나를 넘겨 줄 어떤 작가를.
(그런데 공주가 던져 준 쐐기풀 옷을 입고 사람이 된 11명의 오빠들 가운데 마음씨 착한 막내 오빠의 팔 한 짝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이의 팔 한 짝에는 여전히 백조의 날개 달려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