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열린책들 세계문학 216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레베르테의 소설은 흔히 움베르토 에코의 그것과 많이 비교되곤 한다. 추리 소설의 형식을 빌고는 있으나, 일반적인 추리 소설처럼 주된 사건의 수수께끼 풀이가 아닌, 전문 지식이 총동원된 독자와의 지적 유희가 책 내용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방식이 상당히 비슷하기 때문일까.

그러나 책을 펼쳐 보면 곧 알게 되겠지만, 레베르테의 글은 에코보다는 훨씬 쉽게 읽힌다. 그의 다른 작품인 <뒤마 클럽> 도, 지금 말할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도 그렇다. 비교적 쉽게 채색된 에코 풍의 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내가 이 책을 읽고 난 후 받은 느낌을 가장 적절하게 나타내줄 듯 싶다.

무엇보다 소재가 참신하다. 유명한 화가 반 다이크의 그림 속에 숨겨진 진실을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 추적해 나가는 과정은 상당히 독특하다 --- 그 수수께끼의 가장 큰 단서가 바로 그림 속에 그려진 체스판이기 때문에. 레베르테의 세밀한 묘사 덕분에, 체스의 달인이 그림 속의 체스판을 분석할 때마다 저절로 손에 땀이 쥐어질 정도다. (나는 체스를 전혀 모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 중세의 명화가 가진 비밀이 하나 하나 비밀이 벗겨져 나가며 소설이 클라이막스에 다다를 때마다 주인공에게는 위기가 닥친다. 문제는, 그 절정에 기다리고 있는 결말이 상당히 충격적이라는 것.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 결말은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을 많이 읽은 사람이면 금방 알아낼 수 있는, 그런 결말이라는 점이다. 몇몇 독자들은 책을 덮고 난 뒤 '식상하다' 라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랬었다)

다시 서두로 돌아가자. 이 소설은 분명 에코와 많이 비슷하다. 그렇지만 그와는 또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 에코 만큼의 치밀함과 흡인력은 떨어지지만, 생소한 소재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음에도 매우 쉽게 읽힌다.

책 속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전문 용어들도 글을 어렵게 한다기 보다는, 사건의 진행을 위해 필요한 양념 정도로 느껴지기 때문에, 이런 류의 소설치고는 부담없이 편하게 볼 수 있다는 게 최고의 장점 아닐까 싶다. 그리고 덤으로, 글을 통해 이색적인 스페인의 풍물과 정취를 느껴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중세 그림 속으로 떠나는 여행 못지 않게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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