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지혜 - 그림과 함께 보는 서양철학사
B.러셀 지음, 이명숙 외 옮김 / 서광사 / 199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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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러셀은 한마디로 '대단한' 사람이다. 저명한 수학자이자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저술가이며 20세기 철학사에 한 획을 그은 철학자인데다가 반전, 반핵 시위를 주도했던 평화주의자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의 철학은 너무나도 난해해서, 철학을 전공하지 않고 그저 교양으로 배우던 나에게는 말 그대로 '넘을 수 없는 산' 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다.

서양철학을 교양으로 배우기 시작하면서 먼저 눈길이 갔던 책이 러셀의 '서양철학사' 였다. 책을 펼쳐 조금 읽어 보고 '...어려워' 라고 생각했다. 그 책을 덮고 다시 서가에 꽂아 넣으려던 순간 옆에 있던 노란 빛깔의 조금 큰 책이 눈에 띄었다. 러셀이 서양철학사를 집필하고 난 후 여러 해가 지난 다음에 새로 쓴 책이라고 했다. 펼쳐 보니 여러 가지 그림들이 보였다. 게다가 문체도 서양철학사보다는 조금 더 평이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서양철학사가 아닌 '서양의 지혜' 를 선택했다.

여태 여러 권의 철학사 책을 읽어보았지만 '서양의 지혜' 처럼 나를 생각의 도가니 속으로 빠뜨린 책은 없었다. 확실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이 책은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라는 것이다. 상당히 많은 철학사 책들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철학자의 사상들과 그들의 일생을 객관적, 단편적으로 죽 나열하고 있는 데 반해, 러셀은 어떤 철학자의 사상과 인생에 대해 설명하면서 거기에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덧붙여 '살아 있는 글' 을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체계적이지 않다.

예를 들자면 플라톤의 사상에 관해 이야기할 때, 내용의 절반 이상을 소크라테스와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상을 설명하는 데 할애하고 있는 것 등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다른 책들처럼 플라톤에 관한 것만 나오리라고 생각할 일반 독자들은 얼마나 놀라겠는가!)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점, '목적을 위한 수단의 무조건적인 정당화' 로 비난받았던 마키아벨리즘을 약간 다른 입장에서 해석한 점 등이 눈에 띈다. 글 속에 러셀의 의견이 들어 있기 때문에 책을 읽으며 '생각'을 할 수 있다.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동조하고, '그래도 저건 아니야' 라고 여기는 대목은 반박하는 등, 글을 통해서 저자와의 대화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러셀의 독창적인 의견과 해석 때문에 단점 또한 존재한다. 아까 밝혔다시피 이 책은 체계적이지 않다. 철학자들과 그들의 사상이 꽤 들쑥날쑥하게 등장한다. 그래서 가끔 갈피를 잡지 못하고 글 속에서 헤맬 때가 있다. 또한 러셀이 뛰어난 수학자이기 때문에,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목적으로 수학에 관련된 도식이 많이 등장한다. 그 덕분에 본인과 같은 수학 공포증 환자는 가끔 그 도식들 때문에 더더욱 사상을 이해하기 힘든 적도 있었다. 따라서 철학에 관한 기본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권해 주고 싶지 않다.

비록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평하긴 했지만 - 이 책은 대단한 책이다. 무엇보다도 러셀이라는 인물의 지식의 폭과 깊이가 여실히 드러나 보인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내내 '나는 이 철학자의 사상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소. 당신은 어떻소?' 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단순히 책을 읽고 지식을 암기하는 것이 아닌, 생각할 꺼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러셀의 전기들을 읽는 것 보다는, 오히려 그의 저술을 읽으며 사람됨을 판단하는 것이 효과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서양철학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진지하게 어려운 독서를 해보고 싶은 분들께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서양의 지혜' 는 절대 쉽게 읽고 넘어갈 책이 아니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말 그대로 '지혜'를 쌓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씌어진 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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