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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ㅣ 청소년문학 보물창고 17
한스 페터 리히터 지음, 배정희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8월
평점 :
책은 읽고 싶은데 좀체 책이 잘 읽혀지지 않는 날들의 연속.
어느 날 문득 이 책을 받았다. 거리가 있으면서도 진지한 눈빛이 모서리 귀퉁이에서 뭔가를 보고 있는 듯한. 모르겠다.
그 눈빛의 묘한 매력에 끌려 읽어나간다. ‘글자’로만 읽히는 글자는 서서히 가슴으로 스며들어 좀체 책을 놓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책의 힘에 감탄 그리고 답답함과 위안. 그 때 난 거기에 없어서 다행이라는 비열하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짓는다.
프리드리히와 나는 레쉬 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이웃 사이. 우리처럼 윗집아랫집 주고받고 인사하는 단조로운 일상과 평화.
너무나 무덤덤하고 단조로워서 ‘뭐야~’ 하고 책읽기전의 기대가 실망해 갈 무렵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디서 왔는지 모를 소소한 마찰이 이웃사이를 방해한다.
청소년기 활동적이고 열정의 분위기가 있는 곳이라면 누구나 호감이 가는 시절. 단짝친구인 독일인 ‘나’와 유대인 ‘프리드리히’가 함께 간 그곳에서.
“유대인은 우리의 불행이다.”
드디어 연설이 끝났다. 특별위임을 받은 그 꼽추사내는 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하여 박스 위에 서 있었다. 그는 침묵했다. 홀 안은 아주 조용했다. 그 때 꼽추 사내가 프리드리히를 가리켰다.
“내가 말한 문장을 다시 말해 봐.”-본문 58p
독일인 이웃과 아주 잘 지내는 프리드리히에게 ‘자신은 독일인에게 불행이다’라고 말을 하라니, 유대인인데 독일인이 되어 ‘유대인은 우리의 불행이다’라고 자신의 종족을 욕하라고 하다니... 어떤 상황이든 간에 평화롭게만 보이는 진행에 갑자기 폭풍이 휘몰아친다. 책을 읽는 내가 군중에 싸여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처럼 가슴이 벌렁거린다.
펑! 펑! 펑! 무기들이 내는 굉음보다 더 독일 사람들은 프리드리히 가족을 박살낸다.
겁이 많지만 무엇이든지 잘하는 프리드리히를 짜증날 정도로 불안감에 휩싸이게 만들고, 읽는이가 부끄러울 정도로 비참하게 만든다.
침착하고 유능하고 이해심 많은 프리드리히 아빠를 성미 급한 겁쟁이로 만든다.
가족을 잘 돌본 엄마를 갑작스레 죽여 버린다.
이들의 몰락을 절친한 이웃 사이인 ‘나’의 가족들은 적당한 거리에서(자기 가족의 피해가 없는 선)밖에 지켜 볼 수 없게 만든다.
적당한 타협이 없이 ‘나’의 가족들에게 유대인 아니면 독일인밖에 인정하지 않는다. 독일인이건 유대인이건 그들을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괜히 둘 다 누군가의 손아귀에 잡혀 사는 것 같아(말하나마나 말도 안 되는 법을 만든 소수의 윗사람들이지) 답답하다.
아빠도 엄마도 친구와 이웃까지 모두 잃고 홀로 지내는 프리드리히는 웃음의 시간이 깃든 레쉬 씨의 집 앞에서 주인의 발길에 체인 채 쓰러진다.
끝인가? 하고 뒷장을 계속 넘겨본다. 끝이다.
그래, 그 때 수많은 프리드리히는 독일인을 발길에 쓰러졌을 것이다. 이렇게 짧은 서평을 쓰는데 감정이 제 맘대로 솟구치려 한다.
다행히도 글쓴이는 작가이기에 한 장 한 장마다 터져 나올 법한 격한 감정의 상황에서도 담담하게 남의 이야기인 듯 내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작품의 분위기에 전염이 되었는지 이성적인 힘으로 ‘역사’의 진실과 왜곡을 보게끔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적당한 거리로 감정과 이성의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기분 좋게 마음이 꽉 찬 듯하면서도 씁쓸한 것은 뭐지?중학교 조카 녀석이 숙제를 한다고 갑자기 들이닥쳤다. 막 읽은 책을 읽어보라고 건네 본다. 제 나이 또래의 불행한 이야기를 읽은 중학생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