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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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ryman : an ordinary or typical person, 'Daum' 영자사전에서 찾아 본 의미다.

그리 다른 의미는 아니겠지만 『에브리맨』을 읽고 난 후 'Everyman'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보태고 싶다.

 

Everyman :  Nobody escape from death

 

얇은 분량이었지만 분명, 저 곳이 아닌 지금, 이 곳에서 '죽음'을 마주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미 역자(정영목)로서의 명성이 자자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이처럼 무겁고 중후한 문장들이 영어로는 도대체 어떻게 표현되는 것인지 궁금했다.

평범한(!)이의 평범한 죽음이었지만, 그 평범함 속엔 "다른 여느 장례식보다 더 흥미로울 것도 덜 흥미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었다."와 같은 숭고함이 깃들어 있다. 칸트의 '숭고함'에 예외가 적용되는 것이 이 평범하면서도 보편적인 죽음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죽음'이 갖는 숭고함이란 언제나 그렇듯 늘 타인의 죽음을 투과해야만 공명될 수 있다는 한계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자기인식 안에서 죽음의 숭고함은 경험되거나 이해될 수 없다. 그럼에도...


"있음에서 풀려나"

죽음은 존재에서 부재로 넘어가 는 것이 아닌 존재에서 풀려나 어딘지 모를, 그러나 분명 또다른 어느 곳으로 옮겨가는 것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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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용 식탁
윤고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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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 대한 배경적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우중충한 회색톤의 겉표지는 『1인용 식탁』 대한 '끌림'을, 도래하지 않을 막연한 미래로 지연시켰고 겉표지 날개에 실려있는 80년생의 화려한(?) 작가의 사진은 킬타임용으로도 아까운 '칙릿'류의 소설을 떠올리게 했다. 미래는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달"님에게 받은 선물이었지만, 그의 취향을 또는 그가 바라보는 나의 취향에 대해 한번쯤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던 『1인용식탁』이었다.  하지만 멀게만 느껴졌던 미래는 우연한 기회를 계기로 6개월이란, 짧은(!) 시간을 돌아와 '1인용 식탁'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9편의 단편이 실려있는 소설집에서 「1인용 식탁」 「달콤한 휴가」 「인베이더 그래픽」 「박현몽 꿈 철학관」 「로드킬」까지 순서대로 다섯편의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다시 저자의 사진을 바라본다.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분위기가 절대 아닌데' 혹, 그녀도 어느 철학관에 몰래 방문하며 '꿈'을 사고 있었던 건 아닐까.

『1인용 식탁』의 독특함이란 저자의 나이와 외모에도 불구하고(?)하고 사회와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제법 날카롭기도 하거니와 일상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져버린 이야기 속에 작가의 시선이 잘 투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혼자서도 밥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학원이나, 빈대에 대한 극단적인 집착, 백화점 화장실에서 소설을 쓰는 작가, 꿈마져 병에 담에 사고파는 사람들,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헤어나오지 못하고 감금되어버리는 모텔까지 분명 현실에 비껴 선 환상적 소재들이지만, 묘하게도 이런 것들이 결코 가상적·비일상적으로 다가오지만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견고한 것을 녹여버린' 근대 이후 인간적 관계들마져 녹여버린 현대, 스마트폰과 페이스북은 현실의 관계를 통신과 웹의 공간에 새롭게 둥지를 트게 되었지만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역시나, 현실에서 먹고, 자고, 마시고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가엾은(!)존재들이다. 싱글족들을 위한 혼자 먹는 식당, 카페들이 유행하고 독신으로서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시대에, '혼자 먹는 법을 알려주는 학원'이 그렇게 엉뚱하거나 비현실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다.

자연재인 물과 공기마져 상품이 되고, 지식과 담론이 권력이 되는 세상에서, 꿈조차 꿀 수 없게 조여오는 각박한 현실에서, 꿈마져 타인을 통해 꾸고 그 댓가로 돈을 지불하는 것이 결코 기괴한 상상으로만 그치지는 않는다.

방금 전에 읽은 「로드킬」은 다 섯 편의 소설 중 단연 압권이다.

1인용 식탁에서서 보여줬던 단자화된 개별적 존재들을 좀더 밀고나가 무인모텔에서 각종 자판기를 통해 무덤과도 같은 자기만의 방에서, 타인과의 아무런 관계나 접촉 없이 영원히 헤어나오지 못하는, 가지고 있는 돈의 액수가 줄어들수록 천장의 높이가 낮아지고 결국 동물로까지 퇴화되는 몸뚱아리. 죽음만이 그 모텔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지만 그 죽음조차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는 '로드킬'일 뿐이다.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되는 '하키코모리'들의 운명도, 자본에서 이탈된 증가하는 극빈층의 운명도 '로드킬'의 그것과 닮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환상으로써 현실을 그리지만 그 환상이 결코 현실과 괴리된 이물감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윤고은의 소설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일상을 다르게 바라보기라고나 할까, 그리고 의미를 상실한 듯한 '일상'을 쥐어짜 흘러내린 저 '환상'이 현실의 이면을 다시 소환하여 눈 앞에 펼쳐놓는다.

아직 네 꼭지의 단편이 남았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돌아와, 하루에 한 편을 다 읽지도 못하는 날이 많은 1월이었다.
그 허기진 일상을, 그나마 『1인용 식탁』에서 배를 좀 채운다. 그리고 역시, 혼자 보단 누군가와 함께 읽어봐도 좋을 게다.

"아이슬란드는 모든 경쟁과 소음을 초월한 곳이었지만, 그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쟁과 소음이 필요했다. 수면 위의 우아함은 물 아래 숨겨진 억척스러운 갈퀴질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박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갈퀴질이 불가능해진 지금, 수면 위의 우아함을 스스로 포기해버린 것이다. 나도 그 구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직장을 그만둘 수도, 적금을 해지할 수도, 보험을 취소할 수도, 무작정 떠날 수도 없었다. 내가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진정 자유로워지는 순간, 아이슬란드도 사라질 테니까. [ 아이슬란드 262~26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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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란 무엇인가 -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 난장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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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책장을 둘러본다.

프로이트 전집이 15권, 김훈의 단행본이 15권, 하루키가 종수로 16권 그리고 지젝이 14권이다. 프로이트 전집은 2권 정도 밖에 읽지 않은 관계로 실제 구매와 동시에 책을 독파하며 나간 저자로, 김훈과 하루키와 지젝은 치열한 선두경쟁을 펼치고 있다, 우리 집에선. 하지만 그 '치열함'은 그들의 출발선이 동일하지 않았음을 고려할 때 이미 승부가 결정돼 있는 것과 다름없다.

 하루키가 이미 십 년 전부터 우리집 문턱을 넘기 시작했다면 김훈은 약 오 년 전부터 그리고 지젝은 이제겨우 갓 삼 년이 넘었을 뿐이다. 더우기 48년생(김훈), 49년생(하루키, 지젝)으로 이제 육 십대의 문턱에 들어선 세 저자의 남은 시간을 산술적으로 동일하게 잡아도 출간 속도로만 보면 지젝의 필력을 나머지 두 사람이 따라잡긴 여간 어렵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세 사람의 정치적·이념적 스탠스도 비교해 봄직하다.

하루키가 자유주의자라면 지젝은 혁명적 사회주의자이고 김훈이 자본주의적 보수주의자라면 지젝은 공산주의적 진보주의자 정도 쯤 되려나. 국적도 정치적 지향도 다른 동년배의 세 사람이 으르렁거리지 않고 한 집에서 동거하는 모습, 그게 또 인생이지 않을까 싶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 이어 한동안 뜸했던 지젝과의 만남이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역시나 지젝의 초기(?) 이론서들에 비하면 잘 읽힌다. 이는 스스로도 자신의 주저라고 꼽았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까다로운 주체』 『시차적 관점』이 헤겔과 라캉, 마르크스와 하이데거 등을 통해 자신의 이론적 기틀을 다지는 날 것 그대로의 난해한 언어의 場이었다면 이후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지젝이 만난 레닌』 『레닌 재장전』 『처음에는~』 『폭력이란 무엇인가』로 이어지는 과정은 정립된 이론을 각종 헐리우드 영화와 소설, 가곡 등 문화적 소스들과 우리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실제적 사건들을 종횡무진하며 자신의 이론과 주장을 펼쳐내는 듯하다. 따라서 내공이 부족한 독자들에겐 초기의 번역본들보다 이후의 책들이 그의 이론과 사상을 보다 입체적으로, 체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은 '폭력'이란 화두를 꺼내들었지만, '폭력' 일반에 대한 이론적 고찰보단 지젝이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과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폭력적)혁명에 대한 반복적·지속적 주장으로 읽는게 더 적절한 듯 싶다.

간략히 지젝이 구분하고 있는 폭력을 보면.
 

먼저 '명확히 실벽 가능한 행위자가 저리르는 가령, 범죄와 테러, 사회폭동, 국제분쟁'과 같은 '주관적 폭력'이 있다. 이는 가시적이며 때문에 일반인의 관심으로부터 배제되기 어렵다. 문제는 이런 가시성은 다분히 정치적이며 때문에 '주관적 폭력'은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상징적 폭력'과 체제를 정상적으로 지탱시키기 위해 가동되는 '구조적 폭력'의 가시성을 탈수해 버린다는 점이다. 정작 후자가 폭력의 중핵이 되는 것들임에도.

일례로, 이전 '무릎팍도사'에 안철수교수가 출연한 적이있었다. 초기 3명으로 시작한 '안철수연구소'가 조금씩 성장해 가고 있던 와중에 실리콘밸리에 있던 경쟁회사로부터 1천만 달러에 회사인수 제안을 받는다. 당시나 지금이나 엄청난 금액이었고 안교수 개인으로서도 평생 만져보지 못 할 거액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교수는 이 제안을 거절했고 '안연구소'는 600명이 넘는 직원으로 성장, 현재까지도 한국 벤처기업의 성공모델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안철수교수가 빌게이츠와 종종 비교되곤 하는데, 그들의 천재성이나 기업적 성공뿐 아니라 바로 이런 점 또한 안교수와 빌게이츠는 비교될 수 밖에 없다.

종종 방송이나 포탈사이트에는 거액의 기부라는 미국 억만장자들의 기사를 접하곤 한다. 이에 어떤이들은 그들의 기부를 칭송하면서 동시에 한국 대기업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대한 외면을 거세게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기부 이면을 들여다보는 '댓글'을 만니보기는 쉽지 않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대표격인 빌 게이츠가 억만불을 기아와 가난에 허덕이는 아이들, 내전과 폭력으로 인한 난민들 등에게 기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억만불 이상의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독한 사업가로서의 그는(빌 게이츠) 실질적 독점을 노리며 경쟁사들을 파산시키거나 사들이고, 목적을 달서하기 위해 온갖 치사한 거래 수법을 동원한다. (중략)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다. 선진국들은 원조와 차관 등을 통해 미개발 국가들을 '도움'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후진국의 빈곤에 연루돼 있으며, 공동책임이 있다는 핵심적 쟁점을 회피한다. 이는 초자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기만이다."

피카소의 이야기를 변용해, 만일 빌 게이츠가 제3세계의 아이들에게 다가가 "누가 이렇게 만들었지? 부모가 그랬니, 아님 마을의 못된 부자가? 아니면 포악한 군인들이?"하고 물었을 때, 아이들이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아니오, 당신이 했잖소!"라고 했을 때 빌 게이츠의 표정을 상상해보는 건 어떨까.

지젝의 주장은 기부 그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닌, 폭력에 대한 무조건적 평화만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나 입발린 관용주의나, 폭력의 희생자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차원의 원조와 지원들이 그 자체로 주관적 폭력을 배양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체제는 내재적으로 주관적 폭력을 생산·유포해야만 한다. 문제는 그런 주관적 폭력이 상징적·구조적 폭력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들어 스스로의 체제에 항상성을 부여한다는 것일 게다.

우리시대의 '가장 위험한 철학자' 지젝의 주장들이 과연 실제에서 현전 가능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그의 책은 독자를 잠시나마 '스마트'하도록 느끼게 해주며,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외설적 이면'을-그것이 반드시 혁명과 진보적 사고를 동반하지 않더라도- 스치듯이나마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앞으로 몇 권이 더 우리집 문턱을 넘어서게 될지, 그리고 언제까지 그의 방문을 환영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분간 난 그와의 조우를 기대하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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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경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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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도 '달'은 시간의 흐름을 표지하는 중요한 '기호'로 작용하고, 새해는 '그레고리력'을 따른 양력이 아닌 '달'의 운행에 따른 '음력'을 새해의 시작으로, '아직까지, 우린'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달'은 시간의 기호이면서 동시에 물리적 실체이기도 하다. 조류의 흐름을 관장하듯 친족들은 밀물처럼 몰려왔다 한순간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휑하니 텅 빈 자리는 각자가 다른 시간을 달리며 이듬을 기약한다.

'설명절'이 이전과 다르게 느껴지는 건, 어른이 되어가면서 지속되는 명절의 여운이 점점 짧아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성묘를 다녀오고 받은 세뱃돈은 또래의 친지들과 또는 시골동네의 친구들과의 '관계의 지속'을 며칠이나마 더 연장시켜 주는 매개물이 되었고, 지금처럼 차례가 끝나기 무섭게 서둘러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다시 나'만'의 공간이다.
바리바리 싸들고온 반찬과 제사음식들. 달뜬 기분도 집에 들어서는 순간 적막한 공기가 무거운 압력이 되어 가라앉는다. 부침개를 데우고 들어오면서 사온 맥주로 저녁 요기를 때운다. 그리고 다시 책을 펴든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부제는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러 철학 입문서들을 읽어보았지만 이만큼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책이 있었나 싶을만큼 쉽게 잘 씌여진 책이다. 바로 전에 읽었던 책이『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였기에 자연스럽게 선택된 책이었지만, '설명절'에 읽는『~쉽게 읽기』는 나름의 의미로 지난 '설'을 재음미해보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다.

전공자가 아닌 일반 독자로서도 나에게, 구조주의는 낯설지 않다. 
『~쉽게 읽기』에서 다소 생소한 철학자는 '바르트' 정도였고 맑스와 프로이트, 니체를 거처 푸코와 레비스트로스, 라캉은 그들의 직접적인 저작물이 아니어도 이미 여러 인문학적, 철학 책들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나름 푸코와 라캉은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자주 만나게 되는(물론 근접성이 친밀도와 이해력을 의미하진 않지만) 철학자들 중 하나였기에 그렇다. 따라서 책에 소개된 내용은 이미 여러번 반복적으로 접했던 단편적 내용들을 '우치다 다츠루'를 통해 통일성 있는 '구조'물로 엮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돼주었다.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란 질문에 가장 손쉬운 대답은 아마도
'주체' '자아'란 본질적이지 않다는 것일 게다. 주체와 사고가 먼저고 이후 언어와 제도, 사회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언어와 담론,으로 형성된 사회구조가 역으로 '주체'를 결정짓는 다는 것이 '구조주조'의 기본 모토이다. 인간(성)이 사라진 철학. 때문에 구조주의는 비인간적이라는 비판과 함께 그 불가해한 언어적 장벽으로 인해 '상아탑' 밖으로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라캉이 극단적인 사례가 되지 않을까. 아직까지도 논란이 많은 그의 저작과 그를 둘러싼 다양한 해석들이 도대체 현실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있는지 그의 책을 읽으면 읽으수록 더 혼란에 빠지기만 한다. 비록 지젝을 통해 정치와 혁명에 접목된 라캉까가지도 작금의 세상에서 지젝의 이론이 현실화 될 수 있는 것인지 의아스러운게 솔직한 심정이다. 단지 지적유희나 그의 독자들과의 제한된 틀 내에서만 유통될 수 있는 지식, 이란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쉽게 읽기』의 책을 다 덮고 나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면 구조주의가 단지 세상과 주체를 바라보는 시선을 고답적 언어로 표현한 몇몇 천재들의 지적활동에 그치는 것이 아닌 그를 통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성찰과 사회적 변화를 동시에 모색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인'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규범을 수용하면서 '인간이 된다'......'이웃 사랑에 대한 사랑'이나 '자기희생'과 같은 행동이 인간성의 '잉여'가 아니라 인강성의 '기원'임을"(181쪽) 레비스트로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성의 기원'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주체'를 형성하는 구조로서의 '사회적 규범(틀)'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밑줄긋기]
레비스트로스와 라캉의 장은, 비록 이 책이 두 철학자의 전체적인 이론을 조망해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증여와 답례'로서 시작된 친족의 형성과 언어적 소통(그를 위한 독서의 중요성까지)으로 통한 사회적 관계망의 형성 등은 '구조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와 함께 '언어'와 '타자'에 대한 중요성을 새삼 각인시킨 장이기도 했다. 레비스트로스의 장에 한해 밑줄을 그어본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말은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로서,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는가에 따라 그 인간이 본질적으로 '누구인가'가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중략) 사르트르의 '참여하는 주체'는 주어진 상황에 과감하게 몸을 던지고 주관적인 판단을 토대로 자기가 내린 판단의 책임을 숙연하게 받아들이며, 그 수용을 통해서 '그러한 결단을 내리고 있는 어떤 것'으로서 자기의 본질을 구축해가는 것입니다." (155~6쪽)
 

"모든 문명은 각자기 지닌 사고의 객관적 측면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161쪽)
 

"우리는 어떤 인간적 감정이나 합리적 판단을 바탕으로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구조는 우리의 인간적 감정이나 인간적 이론에 앞서서 이미 그곳에있고, 오히려 그것이 우리가 지닌 감정의 형태나 논리의 문법을 차후에 구성하는 것입니다." (172쪽)
 

"우리가 정의한 바와 같은 친족의 기본 단위의 본원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성격은 실은 세계의 어느 곳에서든 예외 없이 지켜지고 있는 근친상간 금지의 직접적 결과이다 - 『구조주의인류학에서』" (173쪽)
 

"레비스트로스는 사회 시스템의 변화를 '끊임없이 새로운 상태가 되는' 역사적인 모습을 바탕으로 구상하는 사회를 '뜨거운 사회'로, 역사적인 변화를 배제하고 신석기 시대와 다르지 않은 무시간적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사회, 즉 '야생의 사고'가 지배하는 사회를 '차가운 사회'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중략) '인간은 자지가 원하는 것을 타인으로부터 받는 방식으로만 손에 넣을 수 있다' (중략)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인간은 세 가지 수준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개합니다. 재화·서비스의 교환(경제활동), 메시지의 교환(언어활동), 그리고 여자의 교환(친족제도)이 그것입니다."
(177~8쪽)
 

"인간이 타자와 공생하기 위해서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집단에 적용되는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사회는 동일한 상태로 계속 있을 수가 없다'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먼저 타자에게 주어야 한다'는 두 가지 규칙입니다. (중략) '이웃 사람에 대한 사랑'이나 '자기희생'과 같은 행동이 인간성의 잉여'가 아니라 인강성의 '기원'임을 간파한 레비스트로수의 통찰을 어떻게 반反인간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요? (18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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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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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편씩'만' 읽으려던 게, 5일째 책장을 덮게된다.
 

첫 단편인 「퀴르발 남작의 성」부터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까지, 매일 같이 전쟁을 치르는 기분으로 보낸 한 주 내내 작가의 상상력과 재치있는 문장들 피로로 해멀건해진 얼굴에 생기를 돌게 만들어주었다. 보다 분석적·비평적 언어로 풀이된 우찬제씨의 마지막 해설마져도 『퀴르발 남작의 성』을 읽으면서 내내  받았던 나의 인상이 그대로 전이된 것은 아닌가 착각이 들만큼 일치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지나간 걸 자꾸 해집어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한 달 전에 읽었던 『안녕, 인공존재!』 와 신형철의 '해설'이 책을 덮자마자 무의시적 반작용으로 튀어오른 걸 어쩌랴. (거실 정면 책꽃이, 시야에 바로 놓여있는 책이 『안녕, 인공존재!』 였으니 무의식적이라고 하면 좀 어폐가 있긴 하지만)

한 달 사이 읽은 책이 많지 않았음에도 그 중 두 권이  『퀴르발 남작의 성』과  『안녕, 인공존재!』 라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그 둘을 얽어매는 결정적 키워드 "상상력"

먼저  『안녕, 인공존재!』의 띠지에 있는 문구 中
"우주에서 온 무한대의 상상력"
 

다음으로  『퀴르발 남작의 성』 띠지에 있는 문구 中
"현상과 환상을 넘나드는 결정적인 상상력
 

두 권 모두 "상상력"이라는 캐치프레이지를 내 건, 작가들의 첫 단편소설집이라는 공통점이 '퀴르발'을 덮은 후 자연스럽게 '인공존재'를 투영해 보게 만들었을 터이다. 상상력이 가치평가나 승패이 대상의 되지 못하니 단지 개인적 취향만으로 평가하면 단연 '퀴르발'은 '인공존재'를 잡아먹고도 남을 법하다. 

지상에 발딛고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아직까진 우주적(초월적) 상상력 보다는 현상적 존재를 둘러싸고, 있을 법한 한계 내에서의 상상력이 좀더 친밀하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듯하다(또!또! 혼자 생각을 일반화한다.)

 

해설에서도 말했듯이, 최제훈의 소설은 가볍고 경쾌하면서도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소설이다. 『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을 읽으면서, '고찰'이라는 진중한(!) 어휘에도 불구하고 내내 떠나지 않던 생각이 '작가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걸까? 단지 자기 유희 때문인가'였다. 하지만 '마녀사냥'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다양한 신화를 바탕으로, 통통 튀는 문장들이 난무하는 '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조차 후반으로 갈수록 하늘하늘 가볍게 솟구치던 문장들이 결합되어 어느 순간 어마어마한 중력으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힘을 갖고 있기도 했다.

 
"다시 쓰기" 또는 '새로운 스타일의 리뷰' 탄생?
 

「괴물을 위한 변명」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은 '브라이언 P. 르박의 유럽의 마녀사냥'에 대한 깊이, 꼼꼼이 읽기를 통해 새롭게 또는 변형된 형태의 창작물로 재탄생한다.(전자는 확실하지만 후자의 책은 딱 꼬집어 말할 순 없다.)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 또한 '셜록홈즈' 시리즈에 대한 충분한 배경지식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소설 중 하나였을 터이고.

하나의 결론으로 매듭지어졌다고 생각했던 책에서 최제훈은 새로운 틈을 발견(발명)해내고 그 틈에 그만의 독창적인 시선과 상상력을 쏟아붓는다. 그리고 그의 그런 시도는 마지막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에서 절정을 이룬다.

7편의 단편에서 등장했던 인물들이 모두 모여 한바탕 소란을 벌이다 갑자기 퀴르발 남작의 "각자 위치로, 서둘러, 누군가 책장을 연다!"로 돌연 책장을 덮게되는 순간, 과연 그들은 자신들의 무대를 찾아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을까?

어릴 때 유행했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놀이가 있다.
보통 술래가 전봇대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은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다 말하고 뒤를 쳐다보는 순간, 미처 대처하지 못하고 움직이게 되면 술래에게 잡혀 그가 술래가 되는 놀이.
 

매번 다른 위치, 다른 모습으로 고정된 채 서있으면서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문장이 발화되는 그 짧은 순간 무수한 움직임과 형태변화를 일으키는 아이들 처럼 『퀴르발 남작의 성』에 나왔던 주인공들은 '누군가 책장을 연' 순간, 비록 제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며 허둥댈지라도 마치 또다른 형식의 이야기가 뭉글뭉글 피어오를 것만 같다.

그 이야기는 아마도, 좀더 기다려야겠지만 확실한 건, 최제훈이라는 작가는 나에게 그 '기다림'을 충분히 보상해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나의 '북컬렉션'에 '최제훈'이란 세 글자가 오늘, 등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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