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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평점 :
하루 한 편씩'만' 읽으려던 게, 5일째 책장을 덮게된다.
첫 단편인 「퀴르발 남작의 성」부터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까지, 매일 같이 전쟁을 치르는 기분으로 보낸 한 주 내내 작가의 상상력과 재치있는 문장들은 피로로 해멀건해진 얼굴에 생기를 돌게 만들어주었다. 보다 분석적·비평적 언어로 풀이된 우찬제씨의 마지막 해설마져도 『퀴르발 남작의 성』을 읽으면서 내내 받았던 나의 인상이 그대로 전이된 것은 아닌가 착각이 들만큼 일치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지나간 걸 자꾸 해집어 무슨 의미가 있을까마는, 한 달 전에 읽었던 『안녕, 인공존재!』 와 신형철의 '해설'이 책을 덮자마자 무의시적 반작용으로 튀어오른 걸 어쩌랴. (거실 정면 책꽃이, 시야에 바로 놓여있는 책이 『안녕, 인공존재!』 였으니 무의식적이라고 하면 좀 어폐가 있긴 하지만)
한 달 사이 읽은 책이 많지 않았음에도 그 중 두 권이 『퀴르발 남작의 성』과 『안녕, 인공존재!』 라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그 둘을 얽어매는 결정적 키워드 "상상력"
먼저 『안녕, 인공존재!』의 띠지에 있는 문구 中
"우주에서 온 무한대의 상상력"
다음으로 『퀴르발 남작의 성』 띠지에 있는 문구 中
"현상과 환상을 넘나드는 결정적인 상상력
두 권 모두 "상상력"이라는 캐치프레이지를 내 건, 작가들의 첫 단편소설집이라는 공통점이 '퀴르발'을 덮은 후 자연스럽게 '인공존재'를 투영해 보게 만들었을 터이다. 상상력이 가치평가나 승패이 대상의 되지 못하니 단지 개인적 취향만으로 평가하면 단연 '퀴르발'은 '인공존재'를 잡아먹고도 남을 법하다.
지상에 발딛고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아직까진 우주적(초월적) 상상력 보다는 현상적 존재를 둘러싸고, 있을 법한 한계 내에서의 상상력이 좀더 친밀하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듯하다(또!또! 혼자 생각을 일반화한다.)
해설에서도 말했듯이, 최제훈의 소설은 가볍고 경쾌하면서도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소설이다. 『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을 읽으면서, '고찰'이라는 진중한(!) 어휘에도 불구하고 내내 떠나지 않던 생각이 '작가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걸까? 단지 자기 유희 때문인가'였다. 하지만 '마녀사냥'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다양한 신화를 바탕으로, 통통 튀는 문장들이 난무하는 '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조차 후반으로 갈수록 하늘하늘 가볍게 솟구치던 문장들이 결합되어 어느 순간 어마어마한 중력으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힘을 갖고 있기도 했다.
"다시 쓰기" 또는 '새로운 스타일의 리뷰' 탄생?
「괴물을 위한 변명」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은 '브라이언 P. 르박의 유럽의 마녀사냥'에 대한 깊이, 꼼꼼이 읽기를 통해 새롭게 또는 변형된 형태의 창작물로 재탄생한다.(전자는 확실하지만 후자의 책은 딱 꼬집어 말할 순 없다.)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 또한 '셜록홈즈' 시리즈에 대한 충분한 배경지식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소설 중 하나였을 터이고.
하나의 결론으로 매듭지어졌다고 생각했던 책에서 최제훈은 새로운 틈을 발견(발명)해내고 그 틈에 그만의 독창적인 시선과 상상력을 쏟아붓는다. 그리고 그의 그런 시도는 마지막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에서 절정을 이룬다.
7편의 단편에서 등장했던 인물들이 모두 모여 한바탕 소란을 벌이다 갑자기 퀴르발 남작의 "각자 위치로, 서둘러, 누군가 책장을 연다!"로 돌연 책장을 덮게되는 순간, 과연 그들은 자신들의 무대를 찾아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을까?
어릴 때 유행했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놀이가 있다.
보통 술래가 전봇대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은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다 말하고 뒤를 쳐다보는 순간, 미처 대처하지 못하고 움직이게 되면 술래에게 잡혀 그가 술래가 되는 놀이.
매번 다른 위치, 다른 모습으로 고정된 채 서있으면서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문장이 발화되는 그 짧은 순간 무수한 움직임과 형태변화를 일으키는 아이들 처럼 『퀴르발 남작의 성』에 나왔던 주인공들은 '누군가 책장을 연' 순간, 비록 제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며 허둥댈지라도 마치 또다른 형식의 이야기가 뭉글뭉글 피어오를 것만 같다.
그 이야기는 아마도, 좀더 기다려야겠지만 확실한 건, 최제훈이라는 작가는 나에게 그 '기다림'을 충분히 보상해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나의 '북컬렉션'에 '최제훈'이란 세 글자가 오늘, 등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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