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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란 무엇인가 -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 난장이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주변의 책장을 둘러본다.
프로이트 전집이 15권, 김훈의 단행본이 15권, 하루키가 종수로 16권 그리고 지젝이 14권이다. 프로이트 전집은 2권 정도 밖에 읽지 않은 관계로 실제 구매와 동시에 책을 독파하며 나간 저자로, 김훈과 하루키와 지젝은 치열한 선두경쟁을 펼치고 있다, 우리 집에선. 하지만 그 '치열함'은 그들의 출발선이 동일하지 않았음을 고려할 때 이미 승부가 결정돼 있는 것과 다름없다.
하루키가 이미 십 년 전부터 우리집 문턱을 넘기 시작했다면 김훈은 약 오 년 전부터 그리고 지젝은 이제겨우 갓 삼 년이 넘었을 뿐이다. 더우기 48년생(김훈), 49년생(하루키, 지젝)으로 이제 육 십대의 문턱에 들어선 세 저자의 남은 시간을 산술적으로 동일하게 잡아도 출간 속도로만 보면 지젝의 필력을 나머지 두 사람이 따라잡긴 여간 어렵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세 사람의 정치적·이념적 스탠스도 비교해 봄직하다.
하루키가 자유주의자라면 지젝은 혁명적 사회주의자이고 김훈이 자본주의적 보수주의자라면 지젝은 공산주의적 진보주의자 정도 쯤 되려나. 국적도 정치적 지향도 다른 동년배의 세 사람이 으르렁거리지 않고 한 집에서 동거하는 모습, 그게 또 인생이지 않을까 싶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 이어 한동안 뜸했던 지젝과의 만남이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역시나 지젝의 초기(?) 이론서들에 비하면 잘 읽힌다. 이는 스스로도 자신의 주저라고 꼽았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까다로운 주체』 『시차적 관점』이 헤겔과 라캉, 마르크스와 하이데거 등을 통해 자신의 이론적 기틀을 다지는 날 것 그대로의 난해한 언어의 場이었다면 이후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지젝이 만난 레닌』 『레닌 재장전』 『처음에는~』 『폭력이란 무엇인가』로 이어지는 과정은 정립된 이론을 각종 헐리우드 영화와 소설, 가곡 등 문화적 소스들과 우리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실제적 사건들을 종횡무진하며 자신의 이론과 주장을 펼쳐내는 듯하다. 따라서 내공이 부족한 독자들에겐 초기의 번역본들보다 이후의 책들이 그의 이론과 사상을 보다 입체적으로, 체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은 '폭력'이란 화두를 꺼내들었지만, '폭력' 일반에 대한 이론적 고찰보단 지젝이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과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폭력적)혁명에 대한 반복적·지속적 주장으로 읽는게 더 적절한 듯 싶다.
간략히 지젝이 구분하고 있는 폭력을 보면.
먼저 '명확히 실벽 가능한 행위자가 저리르는 가령, 범죄와 테러, 사회폭동, 국제분쟁'과 같은 '주관적 폭력'이 있다. 이는 가시적이며 때문에 일반인의 관심으로부터 배제되기 어렵다. 문제는 이런 가시성은 다분히 정치적이며 때문에 '주관적 폭력'은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상징적 폭력'과 체제를 정상적으로 지탱시키기 위해 가동되는 '구조적 폭력'의 가시성을 탈수해 버린다는 점이다. 정작 후자가 폭력의 중핵이 되는 것들임에도.
일례로, 이전 '무릎팍도사'에 안철수교수가 출연한 적이있었다. 초기 3명으로 시작한 '안철수연구소'가 조금씩 성장해 가고 있던 와중에 실리콘밸리에 있던 경쟁회사로부터 1천만 달러에 회사인수 제안을 받는다. 당시나 지금이나 엄청난 금액이었고 안교수 개인으로서도 평생 만져보지 못 할 거액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교수는 이 제안을 거절했고 '안연구소'는 600명이 넘는 직원으로 성장, 현재까지도 한국 벤처기업의 성공모델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안철수교수가 빌게이츠와 종종 비교되곤 하는데, 그들의 천재성이나 기업적 성공뿐 아니라 바로 이런 점 또한 안교수와 빌게이츠는 비교될 수 밖에 없다.
종종 방송이나 포탈사이트에는 거액의 기부라는 미국 억만장자들의 기사를 접하곤 한다. 이에 어떤이들은 그들의 기부를 칭송하면서 동시에 한국 대기업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대한 외면을 거세게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기부 이면을 들여다보는 '댓글'을 만니보기는 쉽지 않다.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대표격인 빌 게이츠가 억만불을 기아와 가난에 허덕이는 아이들, 내전과 폭력으로 인한 난민들 등에게 기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억만불 이상의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독한 사업가로서의 그는(빌 게이츠) 실질적 독점을 노리며 경쟁사들을 파산시키거나 사들이고, 목적을 달서하기 위해 온갖 치사한 거래 수법을 동원한다. (중략)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다. 선진국들은 원조와 차관 등을 통해 미개발 국가들을 '도움'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후진국의 빈곤에 연루돼 있으며, 공동책임이 있다는 핵심적 쟁점을 회피한다. 이는 초자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기만이다."
피카소의 이야기를 변용해, 만일 빌 게이츠가 제3세계의 아이들에게 다가가 "누가 이렇게 만들었지? 부모가 그랬니, 아님 마을의 못된 부자가? 아니면 포악한 군인들이?"하고 물었을 때, 아이들이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아니오, 당신이 했잖소!"라고 했을 때 빌 게이츠의 표정을 상상해보는 건 어떨까.
지젝의 주장은 기부 그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닌, 폭력에 대한 무조건적 평화만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나 입발린 관용주의나, 폭력의 희생자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차원의 원조와 지원들이 그 자체로 주관적 폭력을 배양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체제는 내재적으로 주관적 폭력을 생산·유포해야만 한다. 문제는 그런 주관적 폭력이 상징적·구조적 폭력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들어 스스로의 체제에 항상성을 부여한다는 것일 게다.
우리시대의 '가장 위험한 철학자' 지젝의 주장들이 과연 실제에서 현전 가능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그의 책은 독자를 잠시나마 '스마트'하도록 느끼게 해주며,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외설적 이면'을-그것이 반드시 혁명과 진보적 사고를 동반하지 않더라도- 스치듯이나마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앞으로 몇 권이 더 우리집 문턱을 넘어서게 될지, 그리고 언제까지 그의 방문을 환영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분간 난 그와의 조우를 기대하 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