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들어 이제, 겨우, 힘겹게, 올리는 '첫' 포스팅이다.

작년과 올해의 경계는 없다고, 더이상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나 미련 또는 도래할 시간에 대한 기대나 환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저 '묵묵히' 또는 '덤덤히'라는 부사만이 이즈음의 세월의 흐름에 대한 정당한 수식어가 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무방비 했던 것일까. 1.2일, 첫 출근과 함께 화들짝 놀란다. 그 놀람은 쉬이 사라지지 않고 끊질기게 괴롭히더니 2주가 지나서야 겨우 숨통을 틔워준다. 그리고 설명절이 끝나고 조기집행과 선거, 감사로 이어지는 '봄날'이 예고돼 있다. 아마도 맞이하지도 못한채 '봄날은 간다', 라는 제목의 포스팅을 5월이 지나갈 무렵 올리게 될 것도 같다.

 

무언가를 '읽기'란 거의 불가능한 시절이다. 군대시절에도 백 여권의 책을 읽었다. 밖에선 다들 한창 일을 할 시기라고 한다. 더 열심히 해야한다고도 한다. 하지만 그런 분주함 속에 빠져들수록 스스로에 대한,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은 반비례하며 흐려져만 간다. 뛰쳐나오지도 못한다. 그게 생이라고들 하니까. 마지막 남아있는 자존, 이랄까 위안, 이랄까. 그럼에도 올해의 첫 책구매는 시작되었고 조기집행과 맞물려 집중적인 구매 시절이 도래했다. 알라딘 보관함에 있던 것들을 우선적으로 구매하게 되진 않았다. 어떤 순간에 사고 싶었던 책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우선순위가 바뀌곤한다. 오늘의 구매리스트에는 이웃님들의 입김이 작용했다. 누군가 외부를 향한 블로그 활동임에도 짐짓 그 외부에 대한 신경은 별로 써보지 않았던 듯하다. 초반엔.  하지만 한 분 한 분, 고마운 이웃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그들의 글을 읽게 되기 시작했다. 거창하지만 그게 '소통'이고 '공유'가 아닌가도 싶다.(책에 대한 보증은 이웃님들이 꼭, 해주셔야 할 듯. 아니다 싶으면 반품 요청 들어갑니다. ^^)

 

오랜만에 누리는 이틀짜리 주말, 어떤 것들은 바로 손에 잡게 될 것이고, 어떤 것들은 정확한 기일을 약속할 수 없다. 그럼에도 책을 사는 건 먼 훗날을 위한 보장성 보험이자 오늘, 읽기에 대한 중지를 강요받는 시절 그 '읽기'에 대한 나만의 작은 위안이 될 것이다.

 

 

『네이션과 미학』 가라타니 고진, 도서출판 비. 고진의 책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올 해 몇 권의 책이 더 구매될 예정이기도 하다. 지젝도 그러하지만 고진은 칸트과 마르크스를 연결지어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느꼈던 도덕화된 정치에 대해 갖는 불편함도고진에게선 크게 반발되지 않는다. 그는 정치의 윤리성을 강조한다.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기 때문일 게다.

 

『먼북소리』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사. 이전에 한 번 읽었던 책이고, 하루키는 소장용으로서, 아직 구비되지 않은 리스트들도 언젠가 모두 위용을 갖추게 될 것이다.

 

『마음사전』 김소연, 마음산책. 진즉에 그 명성과 풍문은 익히 들어왔지만 선뜻 구매를 결정하진 못했다. 작년 말에 읽었던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가 뇌관이 돼 이번 구매리스트에 당당히 오를 수 있었다. 너무너무 기대되는 책들 중 하나이다.

 

이제부터가 이웃님들의 추천 아닌 추천으로 구매하게 된 리스트들이다. 두둥~~

 

 

『핸드메이드 픽션』 박형서, 문학동네 (아, 슬프게도 또다시 '문동'이다. 문학판을 전부 빨아들일 기세다.)

 

"이야기로서 자신을 증명하는 소설가(...) 이 책에 대해 한 마디로 말한다면, 흥미롭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양한 장르의 글을 만날 수 있다. 어떤 소설들은 정말 재미있고, 어떤 소설은 정말 애닳고, 어떤 소설은 기상천외한, 어떤 소설은 정말 놀라웠다. 그러니까 박형서란 작가는 실로 대단한 글쟁이라 할 수 있다.(http://littlegirl73.blog.me/, 강조는 소훔)

 

『새벽의 나나』를 통해 이미 만나본 작가이고, 이웃님의 포스팅을 보고 박형서의 신간이 나왔음을 알게 되었다. 책장 어느 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자정의 픽션』도 꺼내 한 두 장을 읽었다. 무엇보다 '자목련'님의 저 문장이 모든 걸 보장해주었다. 아니, 솔직하자. 박형서는, 특히 '자정의 픽션'을 조금 읽어보고 나선, 그 누군가의 보증이나 추천이 없어도 난 충분히 만족하게 되리란 것을.

 

 

 

『끝나지 않는 노래』 최진영, 한겨레출판

 

"모쪼록 최진영을 1순위로 놓아 주세요. 이 작가를 위해서라면 보탤 수 있는 힘은 죄다 보태고 싶어요 정말. 이 작가를 떠올리면 언제나 가장 먼저 '도대체 어디서 이런 작가가 나타났는가'하는 생각이 든답니다."

(http://blog.naver.com/what2read/120148821573?copen=1&focusingCommentNo=5876877).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Gore"(참고로 이건 '고래'라고 읽죠.ㅋㅋ)님이시죠. 그런 분이 저렇게 말씀하시는데 어찌 사보지 않을 도리가 있게습니까. 최진영이란 작가도 처음 알게 되었고, 한겨레출판사 책도 오랜만에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마구마구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소설가로 산다는 것』 김훈 외, 문학사상

 

출간 때부터 살갈말까 고민을 했던 책입니다. 이 또한 '고래'님의 추천이 있었기에 이런 만남이 가능했던 책 중 하나이죠.

 

 

『섬』 장 그르니에, 민음사

 

"『섬』은 책을 읽는다는 신성한 기쁨과 동시에 끝까지 어떤 앎의 즐거움을 준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에세이를 읽다보면 어느 순간 자기오류에 빠져 쓰는 이 못지 않게 읽는 이에게도 한풀 꺾인 한낮의 노동같은 책 읽기를 하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반해 『섬』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그 믿음에 변함이 없었다.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http://blog.naver.com/dimmu/30127688050?copen=1&focusingCommentNo=5882522

이전까지 『섬』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에겐. '까뮈'와의 연관성 없이 '그르니에'를 알지 못했기에. 이는 단독적 주체로서의 그르니에는 없었다는 말과 같다. 이미 27쇄다. 그런데도 전혀, 몰랐다. 『섬』을. 늦었지만 뒤늦게라도 『섬』에 가볼 수 있는게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꼭, 섬에 대해서만큼은 입속으로 옹알옹알 거리며 '묵독'이 아닌 '음독'을 하며 가보고 싶다.

 

 

책 몇 권 샀으면서 자랑이 너무 길어졌다.

어느새 해도 정오를 넘어서고 있다. 끼니도 거르며 먼 길을 달려온 기분이다.

하지만, 역시, 책은 사물로서의 대상이 아닌 그것을 펼치고 읽어 내려가는 순간 완전한 존재로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줄이고, 하나 둘 산파로서의 역할로 돌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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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한 달력을 보니 검게 물든 숫자가 다섯 개, 그나마 하나는 스마트폰에 대한 예행연습 차원이었으니 12월은 도무지 분발을 못한 셈이다. 무기력했던 탓인지 반대로 무력함조차 느끼지 못할만큼 분주했던 탓인지, 아마도 그 양자 사이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는 사이 어느덧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리고 말았다.

 

이웃님의 말씀대로 한 해를 나름 정리해보아야 할텐데, 조급하다.

작년부터가 아니었을까. 크리스마스와 각종 연말회식들, 숱한 만남과 헤어짐들이 만들어내는 소란스러움 때문이라도 연말은 역시 '연말'의 분위기를 연출해내곤 했다. 하지만 그런 유난스러움조차 의미없는 통과제의처럼, 단지 어쩔 수 없음에 이끌려 지나쳐야만 하는 의무적 행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마치 그런 '고단함'을 통과하지 않고선 새로운 한 해가 영원히 도래하지 않기라도 하듯, 모두가 술과 기억조차 하지 못할 말들을 토해내며 지나 온 시간에 대한 천도재를 올린다. 그뿐이다. 단지. 성탄절과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되는 흥분과 설렘도, 시끌벅적한 여흥과 살풀이도 모두, 덤덤하게 다가온다. 서글픔이나 후회도 덩달아 줄어든다. 나이를 먹었다는 반증이겠지만 그 또한 나쁘지만 않다. 무뎌지는 세월들 너머로도 새해는 어김없이 도착하기 때문이다.

 

그래, 조급, 하다.

몇 번의 망년회를 겪고도 잊혀지지 않을만큼 2011년의 마지막 한 주, 한 해의 하중이 한 점으로 집중된다. 부득이(?) 집으로 올라온 건 다음날 입을 옷을 챙겨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일 집을 나서면 금요일 밤, 최악의 경우엔 토요일에나 이곳에 있게 된다. 야근을 하지 않고선, 새해 첫 날을 사무실에 홀로앉아, 손을 호호 불어가며 자판을 두들기는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 몇 장의 사진을 몰아찍고 포스팅을 시작하려는 찰나 '나꼼수 특별공지' 다운로드가 완료된다. 우선순위가 바뀌어 버린다. 또한 내일은 사무실 대청소로 다소 이른 출근을 해야만 하고...후~~~

 

 

하루종일 끊이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 업무에 요상스런 퇴근길.

싱크대에 쌓여있는 그릇들과 베란다에 널려있는 세탁물들을 처치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쌀을 씻고, 샤워를 하고. 빛(아마 달빛이었나보다)의 속도로 하나들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하나하나 해결했음에도 밥을 먹고 모니터 앞에 앉으니 벌써, 열시가 가깝다. 트윗에도 올린 것처럼 적어도 이런 날만큼은 '각시'는 고사하고 '우렁이'라도 한 마리 있었으면 싶다. 아무래도 봄이 오고 날이 풀리면 어디 논두렁에라도 나가 보아야겠다. 우렁이 몇 녀석을 납치해 집으로 데려오려면. 아니, 아니다. 우렁이가 밥과 청소는 해주겠지만 그러고나면 분명, 자기와 놀아달라며 때를 쓸지도 모른다. 돈도 더 벌어오고 그럴러면 야근도 더 해야할지 모른다. 아! 도무지 헤갈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딜레마.

 

 

 

 

백가흠의 『귀뚜라미가 온다』

시차가 느껴졌다. 오히려 『조대리의 트렁크』와 동시에 읽고 있던 『가나』에 눌리는 형국이다. 2005년 7월, 그 시절이라면 인도의 어디메쯤 있었을 때이지만 만약 당시 『귀뚜라미가 온다』를 만났더라면 지금과는 역시, 다르게 느껴졌을 게 틀림없다. '배꽃이 지고'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독자의 무자비한 폭력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게 만든다. 소설 속으로 뛰어들어 가서라도 '과수원집 주인'을 멍석말이를 하고 싶을정도였으니. 하지만 이례적으로(?) 이 책의 압권은 평론가 김형중의 해설이다. 욕망과 폭력이라는 그물로 얽혀있는 소설집이지만 해설을 읽고나서야 그 그물들이 얼마나 촘촘하고 단단히 얽혀 있는지를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여직원들에게 요사이, '한강'을 읽으라 자주 권한다. 난, '김연수와 하루키' 못잖게 '한강'을 좋아할 수 있는 여자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자신이 있다. 문제가 없진 않다. 주변의 사람들은 대부분 '한강'이라 말할 때, '漢江'을 먼저 떠올리고, '한강'을 권하는 이들이라곤 유부녀와 곧 유부녀가 될 분들 뿐이다. 치명적, 사랑은 그녀의 소설로 이미 충분하다.

 

 

 

 

 

 

좀더 나이를 먹는다면 달라질까. 스티븐스의 그 꼿꼿한 명예와 자존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남아 있는 나날'들이 있음에도 나에겐 그 나날들 속에서 스티븐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과거의 시간을 길어올려 화려하게 각색하고 자위하는 일밖엔 없을거라 생각이 든다 . 하지만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소위 고전이라는 것들을 읽었을 때 느꼈던 분위기를 이 책에서도 받았다. 역시나 스토리는 소설을 구성하는 한 요소일 뿐, 전부가 될 순 없다.

(하루키는 동시대 일본 작가의 책들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잡문집'을 읽으면서 알았다. 하지만 동시대 일본인 작가인 '이시구로'는 예외란 사실을. 하루키의 만들어내는 자장은 자연스레 '이시구로'에게까지 인력을 작용시킨다.)

 

 

 

 

문학이 아닌 문학 너머의 사회에 대한 시선들조차 그는 다감하다. 동시에 날카롭다. 논술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교재가 있을까 싶을정도다. 신형철은 예리하면서 따듯하다. 정신분석과 철학적, 문학적 이론들로 무장했음에도 평로가이자 한 명의 '독자'로서 느끼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들지 않는다. 김현선생이 그렇듯 '평론'이 '문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가 '신형철'이 아닐까. 다만, 그의 능력과 글쓰기의 場이, 그의 학벌과 맞물리면서 곱게만 보이지 않는다. '문동'이라는 '메이져'를 벗어나도 그라면, 자립할 수 있을 것이다. '문동'이 '악'은 아니지만 적어도 '선'은 아니기에.

 

 

정치의 바람이 거세진다. 정봉주 의원의 구속과 선관위 디도스 공격은 태풍의 눈이 되어 바람을 한층 요동치게 만들 것이다.. 『느낌의 공동체』에서 가장 먼저 읽은 글이고 가장 먼저 옅은 밑줄을 그어 본 문장이다. '태풍의 눈' 속에서 그는 좀더 선명한 모습으로 보일 것도 같다.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이 살아야 할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 그렇게 살았고,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죽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결단해 그렇게 죽었다. 나는 늘 문학은 천박한 '성공'을 찬미하는 세계에 맞서 숭고한 '몰락'의 의미를 사유하는 작업이라고 믿어왔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인간 노무현의 몰락이 내게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문학적이다." (느낌의 공동체 p185~186)

 

 

자기말한 불쑥 뱉어내고 끝낸다.

이웃님들 관리도 들어가야하는데...

아직, 2011년, '남아 있는 나날'들이 있으니까요.

 

                                                (http://redneck96.blog.me/에서 옮겨온 페이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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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갑작스레 머리 위로 몰려오는(아파트 꼭대기 층에 살다보니 이렇게 하늘이 잔뜩 내려오는 날이면 말그대로 하늘은, 란다 문을 열고 손을 내밀면 언제라도 잡힐듯 시각적 왜곡을 낳곤하다) 구름과 함께 서둘러 어둠이 찾아온다. 줄줄이 늘어서 있는 직육면체의 건물들은 시각이 퇴화된 물고기들이 스스로의 빛과 촉각으로 어두운 심해 속을 부유하듯 하나둘. 모두가 같은 모양 같은 크기의 불빛을 밝히며 자기만의 세계로 침잠해 간다. 똑같은 크기, 똑같은 밝기, 똑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돌아온 이들의 세계는 그러나, 결코 같지만은 않을 게다. 그리고 풍경만으로도 겨울이 임박했을음 말해주듯 차가운 어둠 속에 빛나는 인공조명들은 더이상 가족의 따뜻한 체온으로 상징되지도 못할 것이다. 적어도『조대리의 트렁크』를 읽고난 후에 보이는 여기Here의 세계에서는.

  

저 불빛들 중 어느 곳에선 '눈과 귀가 없이' 태어난 아이가 바깥세상으론 들리지도 않을 가련한 울음을 멈추지 않거나, 도시의 밤이 유혹하는 좀더 화려한 불빛을 좇아 나가버린 부모를 애타게 기다리며 허기진 배를 움켜진 채 침대 한켠에 웅크리고 잠을 재촉해야만 하는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또는 하루종일 남자의 전화만을 부여잡은 채, 어둠과 함께 찾아올 주먹질과 폭력을, 더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닌 일상의 시간으로 받아들이는 여인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곳은 소설과 영화가 보여주는 상상의 세계, 즉 저기There만의 장소가 더이상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조대리의 트렁크』는 2007년과 그 이전의 세상이 아닌 현재 진행형의 아니, 오히려 그 때보다 좀더 임팩트 강한 지금, 여기의 세계이기도 하다. 

 

백가흠을 때늦게 읽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인 '굿바이 투 로맨스'를 읽기 바로 직전에 '알라딘'에 들어가『귀뚜라미가 온다』도 바로 구매를 해버렸다.(내일쯤 배송이 되겠지) 이미 김이설과 편혜영은 세상사는 일의 '고단함'과 '지독함'을 '치열하게'보여주었고 덕분에 그만큼의 내성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백가흠이 보여주는 세계는 뭐랄까, 그래 '리얼'하다. 바로 이웃집에서 소설 속 인물들이 살고 있다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만큼. 나와 충분한 거리감이 유지되기에 뉴스나 상상 속 세계에서나 존재할 듯 싶은, 그래서 적어도 일반적인, 상식적인 사람들의 세계에는 발들이지 못할 것 같은 인물들. 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난 지금엔 그 거리의 간격이 붕괴돼 버렸다. 그게 내가 네가 살고 있는 오늘의 모습이다. 전부라고 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저들은 세계의 주변부이면서 동시이 시대를 상징하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벌거벗은 생명에게는 그 배제에 인간들의 공동체가 기반한다는 독특한 존재상의 특권이 주어진다"는 '아감벤'의 말처럼. 
 

 

 

 

아무튼 당분간은 커다란 아파트 건물에서 빛나는 저 자그마한 불빛들을 바라볼 때면 나도 모를 의심과 불쾌한 상상을 떨궈버리지 못할 것만 같다.
 

 

 

 

1950년대의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홀든 콜필드'가 온몸으로 뿜어대는 반항과 분노는 단지 십대라는 젊음이 만들어내는 순간적 일탈이 아닌, 본능적으로 반응한, 세계에 대한 저항은 아니었을까. 2차대전의 승전국으로서 본격적인 자본주의적 대량생산/소비적 시스템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한 미국적 환상에 대한 '샐린저'식 분노. 권위적 교육체제와 관습적 인간관계가만들어내는, 인간적 본성으로부터 점점더 멀어지게 되는 세상에 대한 '무력한' 외침이 '홀든'이라는 인물로 형상화되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결국 홀든이 꿈꾸었던 '호밀밭'은 어디서도 존재할 수 없는 꿈같은 장소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변할수록 인간은 누구나 '여기'가 아닌 '저기'를 갈망하게 된다.

 

 

 

"그곳에서는 나는 나 자신이고, 나 자신은 나다. 그 둘 사이에는 어떠한 틈도 없다. 그러한 기묘한 장소가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어느 맑은날 아침에~ 96p

더이상 나와 세계가 불화하여 나와 자신이 분열되는 여기가 아닌, 나를 나로서 인식하고 자각할 수 있는 '기묘한 장소' 말이다. 여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언제나 저기를 꿈꾸는 이들을 누군가는 이상주의자라 할지 모른다. 또는 홀든과 같은 미성숙한 청소년이거나. 하지만 '거기'가 결코 물리적, 실제적 공간이 아님을 모두가 알지 않는가. 순간이나마 저기를 이곳으로 데려올 수 있는 매개물의 하나가 '책'인 것도 같다. 언어와 문장은 짧은 순간, 익숙한 주변의 공기를 낯설게 만들어 평소 인식하지 못한 자신을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데려와 대면하게 만든다. 또한 일상에 가려 볼수 없던 세계를 찢어발겨 쉽게 드러나지 않던 사람들과 세상을 보여줌으로써 '여기'의 변화를 꿈꿔볼 수 있게 자극한다. 단지 책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일상으로서의 '생활'은 언제나 여기에 붙들려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여기를 벗어나 저기로의 이동은 사회적 폐배이자 탈선이라 세뇌하고 겁준다. 저기는 '벌거벗은 사람'들의 비참하고 냉혹한 실제 현실이기도,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순수한 초월적 관념의 세계일 수도 있다. 인간적 삶이란 비록 여기에 발딛고 있다 할지라도 저기를 꿈꾸며 그리고 그 둘의 거리를 줄이며 하나의 공동체적 공간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Here and There is Every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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