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경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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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도 '달'은 시간의 흐름을 표지하는 중요한 '기호'로 작용하고, 새해는 '그레고리력'을 따른 양력이 아닌 '달'의 운행에 따른 '음력'을 새해의 시작으로, '아직까지, 우린'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달'은 시간의 기호이면서 동시에 물리적 실체이기도 하다. 조류의 흐름을 관장하듯 친족들은 밀물처럼 몰려왔다 한순간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휑하니 텅 빈 자리는 각자가 다른 시간을 달리며 이듬을 기약한다.

'설명절'이 이전과 다르게 느껴지는 건, 어른이 되어가면서 지속되는 명절의 여운이 점점 짧아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성묘를 다녀오고 받은 세뱃돈은 또래의 친지들과 또는 시골동네의 친구들과의 '관계의 지속'을 며칠이나마 더 연장시켜 주는 매개물이 되었고, 지금처럼 차례가 끝나기 무섭게 서둘러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다시 나'만'의 공간이다.
바리바리 싸들고온 반찬과 제사음식들. 달뜬 기분도 집에 들어서는 순간 적막한 공기가 무거운 압력이 되어 가라앉는다. 부침개를 데우고 들어오면서 사온 맥주로 저녁 요기를 때운다. 그리고 다시 책을 펴든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부제는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러 철학 입문서들을 읽어보았지만 이만큼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책이 있었나 싶을만큼 쉽게 잘 씌여진 책이다. 바로 전에 읽었던 책이『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였기에 자연스럽게 선택된 책이었지만, '설명절'에 읽는『~쉽게 읽기』는 나름의 의미로 지난 '설'을 재음미해보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다.

전공자가 아닌 일반 독자로서도 나에게, 구조주의는 낯설지 않다. 
『~쉽게 읽기』에서 다소 생소한 철학자는 '바르트' 정도였고 맑스와 프로이트, 니체를 거처 푸코와 레비스트로스, 라캉은 그들의 직접적인 저작물이 아니어도 이미 여러 인문학적, 철학 책들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나름 푸코와 라캉은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자주 만나게 되는(물론 근접성이 친밀도와 이해력을 의미하진 않지만) 철학자들 중 하나였기에 그렇다. 따라서 책에 소개된 내용은 이미 여러번 반복적으로 접했던 단편적 내용들을 '우치다 다츠루'를 통해 통일성 있는 '구조'물로 엮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돼주었다.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란 질문에 가장 손쉬운 대답은 아마도
'주체' '자아'란 본질적이지 않다는 것일 게다. 주체와 사고가 먼저고 이후 언어와 제도, 사회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언어와 담론,으로 형성된 사회구조가 역으로 '주체'를 결정짓는 다는 것이 '구조주조'의 기본 모토이다. 인간(성)이 사라진 철학. 때문에 구조주의는 비인간적이라는 비판과 함께 그 불가해한 언어적 장벽으로 인해 '상아탑' 밖으로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라캉이 극단적인 사례가 되지 않을까. 아직까지도 논란이 많은 그의 저작과 그를 둘러싼 다양한 해석들이 도대체 현실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있는지 그의 책을 읽으면 읽으수록 더 혼란에 빠지기만 한다. 비록 지젝을 통해 정치와 혁명에 접목된 라캉까가지도 작금의 세상에서 지젝의 이론이 현실화 될 수 있는 것인지 의아스러운게 솔직한 심정이다. 단지 지적유희나 그의 독자들과의 제한된 틀 내에서만 유통될 수 있는 지식, 이란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쉽게 읽기』의 책을 다 덮고 나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면 구조주의가 단지 세상과 주체를 바라보는 시선을 고답적 언어로 표현한 몇몇 천재들의 지적활동에 그치는 것이 아닌 그를 통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성찰과 사회적 변화를 동시에 모색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인'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규범을 수용하면서 '인간이 된다'......'이웃 사랑에 대한 사랑'이나 '자기희생'과 같은 행동이 인간성의 '잉여'가 아니라 인강성의 '기원'임을"(181쪽) 레비스트로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성의 기원'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주체'를 형성하는 구조로서의 '사회적 규범(틀)'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밑줄긋기]
레비스트로스와 라캉의 장은, 비록 이 책이 두 철학자의 전체적인 이론을 조망해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증여와 답례'로서 시작된 친족의 형성과 언어적 소통(그를 위한 독서의 중요성까지)으로 통한 사회적 관계망의 형성 등은 '구조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와 함께 '언어'와 '타자'에 대한 중요성을 새삼 각인시킨 장이기도 했다. 레비스트로스의 장에 한해 밑줄을 그어본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말은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로서,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는가에 따라 그 인간이 본질적으로 '누구인가'가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중략) 사르트르의 '참여하는 주체'는 주어진 상황에 과감하게 몸을 던지고 주관적인 판단을 토대로 자기가 내린 판단의 책임을 숙연하게 받아들이며, 그 수용을 통해서 '그러한 결단을 내리고 있는 어떤 것'으로서 자기의 본질을 구축해가는 것입니다." (155~6쪽)
 

"모든 문명은 각자기 지닌 사고의 객관적 측면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161쪽)
 

"우리는 어떤 인간적 감정이나 합리적 판단을 바탕으로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구조는 우리의 인간적 감정이나 인간적 이론에 앞서서 이미 그곳에있고, 오히려 그것이 우리가 지닌 감정의 형태나 논리의 문법을 차후에 구성하는 것입니다." (172쪽)
 

"우리가 정의한 바와 같은 친족의 기본 단위의 본원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성격은 실은 세계의 어느 곳에서든 예외 없이 지켜지고 있는 근친상간 금지의 직접적 결과이다 - 『구조주의인류학에서』" (173쪽)
 

"레비스트로스는 사회 시스템의 변화를 '끊임없이 새로운 상태가 되는' 역사적인 모습을 바탕으로 구상하는 사회를 '뜨거운 사회'로, 역사적인 변화를 배제하고 신석기 시대와 다르지 않은 무시간적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사회, 즉 '야생의 사고'가 지배하는 사회를 '차가운 사회'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중략) '인간은 자지가 원하는 것을 타인으로부터 받는 방식으로만 손에 넣을 수 있다' (중략)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인간은 세 가지 수준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개합니다. 재화·서비스의 교환(경제활동), 메시지의 교환(언어활동), 그리고 여자의 교환(친족제도)이 그것입니다."
(177~8쪽)
 

"인간이 타자와 공생하기 위해서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집단에 적용되는 규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사회는 동일한 상태로 계속 있을 수가 없다'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먼저 타자에게 주어야 한다'는 두 가지 규칙입니다. (중략) '이웃 사람에 대한 사랑'이나 '자기희생'과 같은 행동이 인간성의 잉여'가 아니라 인강성의 '기원'임을 간파한 레비스트로수의 통찰을 어떻게 반反인간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요? (18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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