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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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젯 밤, '작가의 말'을 끝으로 책장을 덮고난 후부터 지금까지, '생강'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역사, 폭력, 고문, 피해자와 가해자, 가족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종국엔 다시 '인간'으로 귀속되는 '생강'
 

무언가 선굵은 리뷰라도 강요하듯 머릿속에 맴도는 '생강'의 향내는, 그러나 하나의 단선적인 미각으로 향유되길 거부한다.
내가 느끼는 생강에 대한 혼미함을 타인의 취향을 통해 추체험하려 온라인서점의 리뷰들-그나마 아직은 얼마되지도 않는-과 언론기사를 샅샅이 훑어도 보지만 도통 그들의 취향에 공감은 커녕 무언가 거스르고 싶은 충동마저 인다. 문제는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나조차 모르겠다는 점이다.

 

『소송』, 『실재의 윤리』, 『쿤데라의 커튼』, 『레고로 만든 집』, 『저녁의 구애』 그리고 『생강』까지.
가장 후발주자로 뛰어들었음에도 나머지를 제치고 '생강'이 결승선을 제일 먼저 끊을 수 있었던 건 첫 장에 묘사된, 예술의 경지로까지 승화된 고문에 대한 묘사 - 마치 셰익스피어의 희극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문장들 - 때문이었다. 천운영 작가의 이전 작품들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표현들 또는 '고문'이라는 단어의 어둡고 음습한 아우라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문장들, 은 예술의 고통 또는 고통의 예술이라는 비틀어진 상징을 경유해 이미 과거의 화석으로 유폐되어 버린 '고문'을 책을 읽는 독자의 눈 앞으로 소환시켜버리는 강렬함을 내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중반으로 치달을수록 계속해서 드는 생각은 '도대체 왜'였다. '고문'이라는, '이근안'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그것이 단지 소설적 모티브나 소재로서의 차원을 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작가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 작가의 가상적 세계에 그대로 착종되어 둘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듯했다. '폭력에 대한 성찰'이라면 천운영 작가의 주특기임에도 그것이 사실로서의 역사적 사건과 매개되는 순간 『바늘』이나 『명랑』에서 보여주었던 작가만의 세계는 좀더 깊고 무거운 세계로의 확장성을 은연중에 강요받을 수 있다. 그리고 『생강』을 끝까지 읽고나서도 목구멍 안으로 완전히 삼켜지지 않고 사래가 들린듯 한동안 켁켁거리게 되었던 이유도, 바로 그런 기대들이 충족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첨언하자면, 포스팅을 끝내고나서 펴든 『커튼』에서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란 장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쿤데라는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인간의 양」(1958)에서 일본인 버스승객과 대립하는 외국병사에서, 누구나 '외국'병사가 '미국'병사라 생각할 수 있음에도 그것이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은 것에 주목한다. 외국병사 대신 '미국'이라는 특정 기표는 소설의 내용을 결국 "정치적인 텍스트로, 점령자에 대한 고발로 귀결"되었겠지만 「인간의 양」에선 그걸 포기함으로써 "소설가가 관심을 가진 주요한 문제인 실존의 수수께끼에 조명이 집중되기에 충분해진다."라고 말하고 있다. 쿤데라는 "사회 운동, 전쟁, 혁명과 반혁명, 국가의 굴욕 등 역사 그 자체는 소설가에게 그려야 할 대상, 고발하고 해석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관심거리가 아니"며 "소설가는 역사가의 하인이 아니다"라며 재차 사실로서의 역사와 소설(가)이 지향해야 할 역사를 구별한다. 『생강』이 소설로서의 역사가 아닌 사실로서의 '역사'로 계속해서 회귀되었던 것은(나에게만 그렇게 읽혔는지 모르겠지만) 특정 '인물'과 '상황'들이 날 것 그대로 재형상화되는 것에 비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우기 그런 인상들이 이틀간이나 머릿속에서 정제되지 못했던 건 천운영작가에 대한 애착 내지 신뢰 때문이기도 하다. 단편에서 풍기는 작가의 날카로움과 강렬함 그리고 작가 자신의 열정 등이 장편으로 넘어오게 되면서부터 다소 무뎌지는 경향이 있다. 이미 대부분의 내용이 휘발되어버렸지만 『잘가라 서커스』 때도, 이번 『생강』의 경우도 동일한 작가의 작품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는 그런 거북스러움이 있었다. 기대와 반작용, 다른 작가였다면 쉽게 거절해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천운영'이라는 작가에 대해서만큼은 여전히 지지를 보내는 이런 입장이 『생강』에 대한 혼란함을 유발한 두 번째 이유다.

사족 1
『생강』의 중심엔 '폭력'이 가로지른다. 그것도 사실적, 역사적 폭력이면서 동시에 '평범한 이(?)'에 의해 자행된 폭력이다.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되는 게 자연스러울만큼.

고문기술자 '안'이 또는 이근안이라는 실제의 인물이 처음부터 악마이거나, 아니 끝까지 악마가 되지도 못했을 뿐더러, 우리와 다른 '특이성'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게다. 더우기 그런 전문가가 된 이후에조차 가정에서의 생활이나 고문실 밖에서의 모습 속에서 폭력성 특이성이 일상적 '오점'으로까지 각인된 인물들은 아니었을 것같다. 그렇다면 굳이 '안'의 마조히즘적 성적쾌락이 필요했던 것일까 의아스러웠다. 고문을 행하는 자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외설적인? 변태적인? 적어도 고문이 갖는 폭력성이나 惡은 특정한 개인의 개별적 특이성이 아닌 시스템에 결부되어 있는 구조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아버지에겐 '안'이 아니어도 그를 추종하는 수많은 아들들을 거느릴 수 있는 권력과 힘이 있었으니. 그리고 '안'이 그렇듯 모든 아들들이 태생적으로 '악의 화신'들은 아닐테니. 

사족 2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축이기도 한 딸, 선
'안'이 惡을, '선'이 善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결과적으로 선은 안과 대결함으로써 안의 자수를 이끈다. 그런 이분법이 너무 도식적이고 진부했던 건 아닐까.
더우기 초반에 등장하는 선, 80년대 학번의 (물론 이건 나의 편견이겠지만) 대학생이 된 선, 반드시 그런 시대적 분위기가 아니었어도 조금은 붕떠있는 듯한, 가볍기조차 한 선의 캐릭터가 이물스러웠다. 물론 신에서 악마의 자리로 '변신'하는, 아버지의 실체이자 이면을 알게되면서 의식화 또는 성숙화 되어가는 흐름을 위한 필요성은 있겠지만, 후반에서 보여주는, 초등학교 때의 그 트라우마와 초반의 발랄함에선 쉽게 하나의 인물이라는 동일성을 상상하기 힘들게 한다.

사족3
"사람들은 그를 악마라 부른다. 그가 내 다락방에 숨어들었다"
단지 가벼운 상상일뿐이지만, 그것이 책의 전체 내용을 어떻게 이끌어갈지도 모르겠지만,
진짝 '악마'를 표현했더라면 어땠을까란 생각도 든다.
'악마를 보았다'의 최민식과 이병헌, 그 둘 중 누가 진정 악마일까란 구분이 의미 없을만큼 둘은 결국 끝~까지 간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결코 후회를 하거나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 정의의 편에서 악을 제거한다 생각했던 '안'은 왜 도피를 선택해야만 했을까. 그리고 10년이 넘어, 불현듯 자신의 행위에 대한 '용서'를 구해야만 했을까. - 그 용서조차 불편하거나 또는 지루한, 일상이 되어버린 다락방 생활에 대한 단순한 일탈의 차원일뿐이었을 지라도.

고문마저 단지 '밥벌이'의 수단이었을까, 무소불위의 조직을 해바라기하며 그 세계의 '한식구'가 되길 바랬으나 결국 '불가사리'의 발처럼 효용가치가 제거되어야만 했던, 단순한 수단으로서의 인간,이 아닌 진정 자신의 행위를 끝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 진짜 '괴물'같은 '안'을 끝까지 밀고가보는 건 어땠을지를 상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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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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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독자들은 책 속의 애덤 워커가 실제로는 애덤 워커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 주기 바란다. 그윈 워커 테데스코는 그윈 워커 테데스코가 아니고, 마고 주프루아도 마고 주프루아가 아니다. 엘렌과 세실 쥐앵은 엘렌과 세실 쥐앵이 아니고, 세드릭 윌리엄스도 세드릭 윌리엄스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샌드라 윌리엄스는 샌드라 윌리엄스가 아니고, 그녀의 딸 레베카도 레베카가 아니다. 심지어 보른도 보른이 아니다. (중략) 뉴저지의 웨스트필드는 뉴저지의 웨스트필드가 아니고, 에코 호수도 에코 호수가 아니다. 캘리포니아의 오클랜드는 캘리포니아의 오클랜드가 아니고, 보스턴은 보스턴이 아니다. 비록 그윈이 실제로 출판계에 종사하고 있긴 하지만, 대학 출판부의 부장은 아니다. 뉴욕은 뉴욕이 아니고, 컬럼비아 대학은 컬럼비아 대학이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p,275~6

 고로 『보이지 않는』 책의 저자 '폴 오스터'는 '폴 오스터'가 아니다.
 

폴 오스터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넘어가고, 실제로는 애덤 워커가 아닌 애덤 워커가 '폴 오스터'라는 이름으로 낸 책이거나, 실제로는 짐이 아닌 '짐'이라는, '애덤 워커'아 아닌 '애덤 워커'의 친구가 '오스터'라는 필명으로 출간한 책이기도 하다.

재미난 건 이제 겨우 오스터의 책 두 권을 읽었을뿐이지만, 이런 수많은 부정들 속에서 부정할 수 없는 건, 바로 '폴 오스터'라는 저자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천천히 이전의 책들을 읽어보면서 스스로 사라져버리려는 '오스터'의 형상을 그려볼까도 싶다.

『뉴욕3부작』, 『보이지 않는』, 두 권 모두 소설적 내용보다는 소설적 형식 비틀기로 읽힌다.

이야기로서의 흥미나 그 어떤 '의미화'를 원한다면, 그때는, 폴 오스터는 폴 오스터가 아니다. (역시 책 한 권 읽은 X가 가장 용감한 법이다. 겨우 두 권 읽어놓고 뻔뻔하게 시리)

 
'여름'에서 애덤과 그윈의 사회적 금기를 파기하는 성애가, 어떤 불쾌감이나 거북스러움 없이 읽혔다.
아마도 근친간의 성애가 아닌 워커의 또다른 여성성으로서의 그윈, 즉 워커의 나르시시즘적 자위이진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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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스완 - Black Swa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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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잠제된 욕망의 분출-68혁명을 전후로 성의 해방은 성적 차별의 소멸이 아닌 성적 욕망의 해방으로-은 자연스런 주체적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한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여진다. 욕망의 전시와 표출은 '자유로움'의 상징과도 같은 사회적 합의-적어도 현대 문화적 場에서만큼은-가 점점 강화되고 있다. 영화의 중반쯤 들었던 생각은 '왜 흑조의 결여가 완벽함에 도달하지 못하는 장애물일까'란 것이었다. 인간에게 내재된 (성적·금기적)욕망을 부정하진 않지만 언젠가부터 그런 억압된 욕망은 '반드시' 분출되어야만 할, 그래야만 진정한 주체로 재탄생할 수 있는 무엇으로 각인된다. 이런 사고 자체가 푸코가 말했던 '에피스테메'(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유통된 일단의 지식과 인식 체계를 지칭하는 용어.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 p65)가 아닐까? 영화는 그런 보편화된 인식의 흐름을 그대로 따르는 것처럼 보였고, 이미 너무 익숙해져버린 흐름에 다소 식상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면서 남기는 여운은, 오랜만에 것이었다. '마틸다' 이후 '스타워즈에피소드'를 제외하고는, 그렇기에 늘 유아적 이미지만을 갖고 있던 나에게 '니나'(포트만)의 연기는 하룻밤 사이 아이에서 성숙한 어른으로 변신한 '마법'과도 같았다. 그리고 영화 자체에 대한 감상보다는 '라캉'(지젝)을 소환하고 싶은-아직까지 버겁기만 한-'욕망'이 분출한다.
 

 

 "라캉에 따르면 거세는 상징적 작용이며 상상적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팔루스의 기능이다. 따라서 그것은(주체에게) 구조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구조화하며 역동화시키는 거세로 인해 주체는 완전함이라는 환상을 포기하게 되는데, 이는 이전 단계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하지만 강박증 환자의 어머니는 이것에 대해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불안 문제의 핵심에는 젖떼기와 사물과의 관계가 있다. 주체가 주체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근원으로부터 분리되어야만 하지만 원초적 대타자는 그 근원에 상상적 일관성을 부여한다. 주체는 이러한 원초적 대타자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또한 그는 자기 자신의 일부를 포기해야 한다. 그는 원초적 대상, 즉 어머니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그 대상-자기자신-을 애도해야만 한다. 『강박증: 의무의 감옥』 

(출처:http://blog.naver.com/lovelamb4?Redirect=Log&logNo=70085289179)

 
거울상과 또는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하게되는 '상상계'에서 언어와 사회적 규칙이 적용되는 '상징계'로 진입하기 위한 '상상적 거세'. 어머니의 좌절된 꿈과 거울 속의 자신의 이미지에서 분리될 수 있는 '거세'를 겪지 않은 니나.

"이상적 자아는 상상계로, 라캉이 '소문자 타자'라고 부른 내 자아의 이상회된 분신 이미지다. 자아 이상은 상징계로, 내 상징적 동일화의 지점, 그로부터 나 자신을 관찰(판단)하는 대타자 내부의 지점이다. 초자아는 실재계로, 내가 불가능한 요구들을 퍼붓고 그것을 해내지 못하는 내 실패를 조롱하는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작인이자, 내 '죄스러운' 분투를 억누르고 그 요구들에 응하려하면 할수록 그 시선 속에서 나는 점점 더 유죄가 되는 그런 작인이다. (중략) 라캉에 따르면 우리는 도덕적 성장과 성숙으로 이끄는 자아 이상이라는 자비로워 보이는 작인은 기존의 사회 상징적 질서의 '합리적' 요구에 따르게 함으로써 '욕망의 법'을 배반하도록 강요한다." (『HOW TO READ 라캉』, P124~5)

상상계와 상징계 실재계라는 순차성을 경험하지 못하고 상상계에서 실재계로 건너뛰어 온 니나는 상징적 질서 내로의 조화로운(안전한) 진입에 실패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예술' 또는 예술을 통한 '완벽함'이라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영화적 결말 후 그녀의 'Perfect'는 지속될 수 없는 완벽함이었지만 예술가로서, 아니 보통의 평범한 인간들에게조차 무의미한 일상적 반복의 지속보다는 어떤 순간적인 폭발, 희생이 따르는 결단이 역으로 존재의 '완볌함'으로 승화되는 것은 아닐까도 싶다.

 
그 완벽함에 기대어 내일 있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포트만의 수상을 점쳐본다.
  

http://redneck96.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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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예찬 프런티어21 14
알랭 바디우 지음, 조재룡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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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사랑은 구체적이고 실증적이었다. 비록 정의내려지거나 사랑의 주체가 되어보진 못했음에도 사랑은 보편적이었고 열린 가능성의 세계에 있었다. 몇 번이고 '러브레터'를 보아도 싫증나지 않았고 '상실의 시대'는 상실로 인한 고통은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실존을 경험하기 위한 통과제의와도 같았다. 늘 겨울처럼 춥고 암담했던 시절이었지만 봄은 언제고 도래할 것처럼 보였다.
 

30대, '비록 정의내려지거나 사랑의 주체가 되어보진 못했음에도' 더이상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을 기대하거나 시작한 사람들보단 '사랑'의 자연스런 종착역으로 생각되어지는 '결혼'이란 제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제 갓 결혼생활을 시작한 신혼부부에서 자식의 결혼을 바라보는 중년들까지. 하지만 그들의 표정과 언어 속에 사랑의 격정과 열정은 이미 퇴색되어 빛이 바랬다. 분리된 각자의 세계에 살던 둘이 만나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였지만 그 '세계'의 깊이와 넓이는 오히려 좁아져 "사회적으로 부여된 관성에 따라 아이를 키우고, 아이의 안락과 미래를 위해 '둘'은 희생된다. 새로움은 사라(p.160)'져버린지 오래다. 그들에겐 단지 일상을 군소리 없이 버틸 수 있는 사회적 시선과 의무로서의 '가정'이 있을 뿐이다.

40대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두 연인이 며칠 전 '결혼'을 했고, 40대를 갓 넘어선 한 여인이 '결혼'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삶의 의지를 꺾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며칠 후, 바디우의 『사랑예찬』을 읽는다.

사랑에 대한 낭만적 서술이 아닌 이성적, 철학적 접근임에도 분명 바디우의 『사랑예찬』은 그 어떤 문학적, 영화적 서술보다 뜨겁고 열정적이다. 그렇기에 한편으론 급진적이고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사랑은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을 만들어내는 지점들, 예컨대 차이의 관점을 시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유의 안으로 우리를 데려(p.27)" 가기 때문이다. 하나가 둘이 되는 순간이며 이 둘은 분명 더 확장된 모두의 세계로 들어가는 가장 시원적 심급이다. 즉 각자의 동일성을 넘어 차이의 세계를 경험하는 최초의 지점이 바로 '사랑'의 순간이다. 반복하자면 "사랑에는 우연의 순전한 특이성에서 보편적 가치를 지니는 한 요소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경험이 존재(p.27)한다.


사랑은 '우연'을 전제로 한다. "사랑은 우연의 산물이다. 아니, 우연의 산물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통념·이데올로기·판단·조작·통제·타협·공모 등을 사랑에서 제거해낼 가능성은 우연에서 말고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p130) 하지만 그 전제로 인해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30대(그 연령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후반의 성인들에게 '사랑'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대상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우연'을 통한 만남은 '욕망'으로 귀결되거된다. 또는 결혼을 전제로 한 타자와의 만남은 서로의 직업과 가정환경, 능력과 외모까지 고려된 '우연'일 뿐이기 때문이다.

더우기 바디우의 '사랑'은 우연을 통한 만남으로 시작되지만 그 우연은 지속되어야한다. 그것도 충실하게.

앙드레 고르의 『D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결혼을 준비하고 있던 친구에게 선물로 준적이 있다. '아~사랑이란 이런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고 그들의 삶을 닮아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보는 수많은 커플들을 지켜보면, 그 충실한 지속성이란 것이 얼마나 어렵고 지난한, 거의 완전한 불가능에 닿아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1년, 2년, 3년 그리고 3년 이후의 부부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도대체 '결혼이란 무엇인지'란 회의먼저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대부분의 그들은 '그럼에도'라는 자기 위안을 내뱉으며 말끝을 흐르지만 그들의 언어는 그들의 표정을 배신하고 있음을 금새 알아볼 수 있다.

 내가, 우리가 해내지 못한다고 바디우의 '사랑'을 부정하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신이 물리적으로 현존하지 않는다 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못하는 종교인들과 같이. 나조차 '사랑'이 나와 다른 타자를 통해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그리고 더낳은 세계로 인도해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안내자가 되어줄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기에.

어쩌면, 진정한 사랑은 한 점에 고정되지 않고 방랑하는 유목민들에게 가장 가까이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든다. 배낭여행을 통해서 만났던 사람들. 짧은 만남이 강한 울림으로 남는 건 그 만남에 순수한 '우연'이 전제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직장이나 가정, 지식과 능력이 배제된, 한 사람의 배경이 사라지고 무장해제 된 '인간'으로서의 만남. 소유물이 늘어가고 통장의 잔고가 늘어나면서 점점 더 현실에 고정되어가는 내가 보인다. 사랑은 그만큼 반비례해 서서히 나의 무대에서 멀어져가고 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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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고양이 눈 - 2011년 제44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최제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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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의 의도가 뭐지? 저자가 말고하자 하는 의미가 도대체 뭐야?

그것이 B급 대중영화든 유치한 삼류소설이든 어떤 '텍스트'를 접하고 나서 많은 이들이 던지게 되는 질문들이다. 작품을 작가와 분리될 수 없는 필연적 관계로 바라보는 시선으로 결국 모든 작품은 작가라는 단독적 창조주에 의해 탄생한 생명체이며, 때문에 그 창조물에는 분명 작가가 생각하고자 하는 의도 내지는 의미가 깃들어 있을거라는 생각. 그리고 40여년 전 이런 시선에 철퇴를 가한 철학자가 나타난다. 바르트.

바르트는 '저작의 죽음'을 선포하며 한 작품을 해석할 때 저자의 의도를 배제한 채 텍스트 자체만을 독립된 존재로 고려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텍스트의 탄생과 동시에 저자는 죽고, 그 빈자리를 '독자'가 대체하는 것만이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다시, 최제훈이다.
 

"누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문단이나 대중성에서 '김애란'의 그것엔 미치지 못할 수 있으나 '그녀'만큼이나 '그'는 나에겐 엄청나게 '센시이셔널'한 데뷔작가로 각인되었고, 두 번재 장편(연재)소설인 『일곱 개의 고양이 눈』으로 더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게 되었다.

첫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부터 심상치 않았다. 늦은 나이의 등단이었음에도, '아니, 도대체 어디서 무얼하다 지금에서야'라는 생각이들만큼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근래에 접하기 힘든 신선하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러냈다.

며칠 간 '알라딘' 메인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음에도 요상한(!) 표지 때문에(한창 유행하고 있는 일본류의 장르소설쯤으로 여기고)라도 그 커다란 표지이미지를 클릭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필연이 될 수밖에 없는 우연이었지만 그럼에도 결국 클릭을 하게 되었고 '최제훈'이란 익숙하면서도, '텀이 좀 짧은데, 설마 그사이 벌써 장편을~~'란 생각에 긴가민가한 이름을 만나게 되었다. 전날 알라딘에서 배송된 책이 있었음에도 바로 구매버튼을 눌러 결제를 하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이미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던 책들은 그 번호가 무색하게 어디서 굴러먹던 '낙하산'인지도 몰랐을 '최제훈'에게 순서를 양보해야만 했다.

책에 대한 설명은, 이미 저자가 책 속에다 자세히 설명을 해놓았기에 그래도 옮겨보면,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은 말이죠, 내용이 끊임없이 변하는 책이에요. 누군가 책 속에 자신을 유폐시켜놓고 계속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가고 있는 거죠. 마치 유령이 연주하는 변주곡처럼. 백과사전에서 찾아본 원주율에 대한 설명이 이러한 추론에 단서를 제공해주었죠. '초월수π는 소수점 아래 어느 자리에서도 끝나지 않고 무한히 계속되며 반복되지 않는다.' 무한대로 뻗어나가지만 결코 반복되지 않는 이야기 사슬"

세헤라자데가 들려주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도 결국 천일이라는 한정된 시간을 벗어나진 못했다. 하지만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은 무한대로 뻗어나갈 것만 같다. 마치 책이 하나의 생명체가 된 것처럼, 죽음을 초월한. 이는 바르트가 이야기한 '저자의 죽음'과 맥을 같이하는듯도 하다. 독자에 따라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은 또다른 이야기로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태생적으로 갖고 있었기에.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일곱 개의 고양이 눈』는 '최제훈'이라는 특정한 개인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오히려 '코난 도일'의 죽음을 파해치는 소설 속 인물인 '셜록 홈즈'의 이야기를 통해 '저자의 죽음'을 예고하는 듯한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도 있었지만, 또한  『일곱 개의 고양이 눈』에서 마치 스스로 살아있는 개체들처럼 자생하는 듯한 등장 인물들의 반복되지 않는 서사는 '저자'라는 외재적 한계를 이미 넘어버린 듯하지만, 오히려 난 그 너머에서 팔짱을 끼고 헤헤거리고 있는 전지전증한 신 '최제훈'을, '니들은 다 나를 벗어나선 단 1초도 살아남을 수 없어'라고 혼잣말하는 최제훈을 지워버릴 수 없다.

'누가 그런 신적인 존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P.S.

'문학평론가'란 타이틀을 걸어두고 시작했기 때문일까, 평소 정여울씨 답지않은 해설이다.
없으니만 못한 해설. 타자화된, 사물화된 죽음, 이라니. 도대체 이 책을 읽고 죽음의 심연을 들여다 볼 또는 보아야 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너무 멀리 나가고 말았다. 결국은 길까지 잃어버린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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