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고양이 눈 - 2011년 제44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최제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감독의 의도가 뭐지? 저자가 말고하자 하는 의미가 도대체 뭐야?

그것이 B급 대중영화든 유치한 삼류소설이든 어떤 '텍스트'를 접하고 나서 많은 이들이 던지게 되는 질문들이다. 작품을 작가와 분리될 수 없는 필연적 관계로 바라보는 시선으로 결국 모든 작품은 작가라는 단독적 창조주에 의해 탄생한 생명체이며, 때문에 그 창조물에는 분명 작가가 생각하고자 하는 의도 내지는 의미가 깃들어 있을거라는 생각. 그리고 40여년 전 이런 시선에 철퇴를 가한 철학자가 나타난다. 바르트.

바르트는 '저작의 죽음'을 선포하며 한 작품을 해석할 때 저자의 의도를 배제한 채 텍스트 자체만을 독립된 존재로 고려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텍스트의 탄생과 동시에 저자는 죽고, 그 빈자리를 '독자'가 대체하는 것만이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다시, 최제훈이다.
 

"누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문단이나 대중성에서 '김애란'의 그것엔 미치지 못할 수 있으나 '그녀'만큼이나 '그'는 나에겐 엄청나게 '센시이셔널'한 데뷔작가로 각인되었고, 두 번재 장편(연재)소설인 『일곱 개의 고양이 눈』으로 더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게 되었다.

첫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부터 심상치 않았다. 늦은 나이의 등단이었음에도, '아니, 도대체 어디서 무얼하다 지금에서야'라는 생각이들만큼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근래에 접하기 힘든 신선하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러냈다.

며칠 간 '알라딘' 메인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음에도 요상한(!) 표지 때문에(한창 유행하고 있는 일본류의 장르소설쯤으로 여기고)라도 그 커다란 표지이미지를 클릭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필연이 될 수밖에 없는 우연이었지만 그럼에도 결국 클릭을 하게 되었고 '최제훈'이란 익숙하면서도, '텀이 좀 짧은데, 설마 그사이 벌써 장편을~~'란 생각에 긴가민가한 이름을 만나게 되었다. 전날 알라딘에서 배송된 책이 있었음에도 바로 구매버튼을 눌러 결제를 하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이미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던 책들은 그 번호가 무색하게 어디서 굴러먹던 '낙하산'인지도 몰랐을 '최제훈'에게 순서를 양보해야만 했다.

책에 대한 설명은, 이미 저자가 책 속에다 자세히 설명을 해놓았기에 그래도 옮겨보면,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은 말이죠, 내용이 끊임없이 변하는 책이에요. 누군가 책 속에 자신을 유폐시켜놓고 계속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가고 있는 거죠. 마치 유령이 연주하는 변주곡처럼. 백과사전에서 찾아본 원주율에 대한 설명이 이러한 추론에 단서를 제공해주었죠. '초월수π는 소수점 아래 어느 자리에서도 끝나지 않고 무한히 계속되며 반복되지 않는다.' 무한대로 뻗어나가지만 결코 반복되지 않는 이야기 사슬"

세헤라자데가 들려주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도 결국 천일이라는 한정된 시간을 벗어나진 못했다. 하지만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은 무한대로 뻗어나갈 것만 같다. 마치 책이 하나의 생명체가 된 것처럼, 죽음을 초월한. 이는 바르트가 이야기한 '저자의 죽음'과 맥을 같이하는듯도 하다. 독자에 따라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은 또다른 이야기로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태생적으로 갖고 있었기에.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일곱 개의 고양이 눈』는 '최제훈'이라는 특정한 개인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오히려 '코난 도일'의 죽음을 파해치는 소설 속 인물인 '셜록 홈즈'의 이야기를 통해 '저자의 죽음'을 예고하는 듯한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도 있었지만, 또한  『일곱 개의 고양이 눈』에서 마치 스스로 살아있는 개체들처럼 자생하는 듯한 등장 인물들의 반복되지 않는 서사는 '저자'라는 외재적 한계를 이미 넘어버린 듯하지만, 오히려 난 그 너머에서 팔짱을 끼고 헤헤거리고 있는 전지전증한 신 '최제훈'을, '니들은 다 나를 벗어나선 단 1초도 살아남을 수 없어'라고 혼잣말하는 최제훈을 지워버릴 수 없다.

'누가 그런 신적인 존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P.S.

'문학평론가'란 타이틀을 걸어두고 시작했기 때문일까, 평소 정여울씨 답지않은 해설이다.
없으니만 못한 해설. 타자화된, 사물화된 죽음, 이라니. 도대체 이 책을 읽고 죽음의 심연을 들여다 볼 또는 보아야 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너무 멀리 나가고 말았다. 결국은 길까지 잃어버린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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