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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11년 3월
평점 :
어젯 밤, '작가의 말'을 끝으로 책장을 덮고난 후부터 지금까지, '생강'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역사, 폭력, 고문, 피해자와 가해자, 가족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종국엔 다시 '인간'으로 귀속되는 '생강'
무언가 선굵은 리뷰라도 강요하듯 머릿속에 맴도는 '생강'의 향내는, 그러나 하나의 단선적인 미각으로 향유되길 거부한다.
내가 느끼는 생강에 대한 혼미함을 타인의 취향을 통해 추체험하려 온라인서점의 리뷰들-그나마 아직은 얼마되지도 않는-과 언론기사를 샅샅이 훑어도 보지만 도통 그들의 취향에 공감은 커녕 무언가 거스르고 싶은 충동마저 인다. 문제는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나조차 모르겠다는 점이다.
『소송』, 『실재의 윤리』, 『쿤데라의 커튼』, 『레고로 만든 집』, 『저녁의 구애』 그리고 『생강』까지.
가장 후발주자로 뛰어들었음에도 나머지를 제치고 '생강'이 결승선을 제일 먼저 끊을 수 있었던 건 첫 장에 묘사된, 예술의 경지로까지 승화된 고문에 대한 묘사 - 마치 셰익스피어의 희극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문장들 - 때문이었다. 천운영 작가의 이전 작품들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표현들 또는 '고문'이라는 단어의 어둡고 음습한 아우라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문장들, 은 예술의 고통 또는 고통의 예술이라는 비틀어진 상징을 경유해 이미 과거의 화석으로 유폐되어 버린 '고문'을 책을 읽는 독자의 눈 앞으로 소환시켜버리는 강렬함을 내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중반으로 치달을수록 계속해서 드는 생각은 '도대체 왜'였다. '고문'이라는, '이근안'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그것이 단지 소설적 모티브나 소재로서의 차원을 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작가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 작가의 가상적 세계에 그대로 착종되어 둘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듯했다. '폭력에 대한 성찰'이라면 천운영 작가의 주특기임에도 그것이 사실로서의 역사적 사건과 매개되는 순간 『바늘』이나 『명랑』에서 보여주었던 작가만의 세계는 좀더 깊고 무거운 세계로의 확장성을 은연중에 강요받을 수 있다. 그리고 『생강』을 끝까지 읽고나서도 목구멍 안으로 완전히 삼켜지지 않고 사래가 들린듯 한동안 켁켁거리게 되었던 이유도, 바로 그런 기대들이 충족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첨언하자면, 포스팅을 끝내고나서 펴든 『커튼』에서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란 장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쿤데라는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인간의 양」(1958)에서 일본인 버스승객과 대립하는 외국병사에서, 누구나 '외국'병사가 '미국'병사라 생각할 수 있음에도 그것이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은 것에 주목한다. 외국병사 대신 '미국'이라는 특정 기표는 소설의 내용을 결국 "정치적인 텍스트로, 점령자에 대한 고발로 귀결"되었겠지만 「인간의 양」에선 그걸 포기함으로써 "소설가가 관심을 가진 주요한 문제인 실존의 수수께끼에 조명이 집중되기에 충분해진다."라고 말하고 있다. 쿤데라는 "사회 운동, 전쟁, 혁명과 반혁명, 국가의 굴욕 등 역사 그 자체는 소설가에게 그려야 할 대상, 고발하고 해석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관심거리가 아니"며 "소설가는 역사가의 하인이 아니다"라며 재차 사실로서의 역사와 소설(가)이 지향해야 할 역사를 구별한다. 『생강』이 소설로서의 역사가 아닌 사실로서의 '역사'로 계속해서 회귀되었던 것은(나에게만 그렇게 읽혔는지 모르겠지만) 특정 '인물'과 '상황'들이 날 것 그대로 재형상화되는 것에 비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우기 그런 인상들이 이틀간이나 머릿속에서 정제되지 못했던 건 천운영작가에 대한 애착 내지 신뢰 때문이기도 하다. 단편에서 풍기는 작가의 날카로움과 강렬함 그리고 작가 자신의 열정 등이 장편으로 넘어오게 되면서부터 다소 무뎌지는 경향이 있다. 이미 대부분의 내용이 휘발되어버렸지만 『잘가라 서커스』 때도, 이번 『생강』의 경우도 동일한 작가의 작품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는 그런 거북스러움이 있었다. 기대와 반작용, 다른 작가였다면 쉽게 거절해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천운영'이라는 작가에 대해서만큼은 여전히 지지를 보내는 이런 입장이 『생강』에 대한 혼란함을 유발한 두 번째 이유다.
사족 1
『생강』의 중심엔 '폭력'이 가로지른다. 그것도 사실적, 역사적 폭력이면서 동시에 '평범한 이(?)'에 의해 자행된 폭력이다.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되는 게 자연스러울만큼.
고문기술자 '안'이 또는 이근안이라는 실제의 인물이 처음부터 악마이거나, 아니 끝까지 악마가 되지도 못했을 뿐더러, 우리와 다른 '특이성'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게다. 더우기 그런 전문가가 된 이후에조차 가정에서의 생활이나 고문실 밖에서의 모습 속에서 폭력성 특이성이 일상적 '오점'으로까지 각인된 인물들은 아니었을 것같다. 그렇다면 굳이 '안'의 마조히즘적 성적쾌락이 필요했던 것일까 의아스러웠다. 고문을 행하는 자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외설적인? 변태적인? 적어도 고문이 갖는 폭력성이나 惡은 특정한 개인의 개별적 특이성이 아닌 시스템에 결부되어 있는 구조적인 것이 아니었을까. 아버지에겐 '안'이 아니어도 그를 추종하는 수많은 아들들을 거느릴 수 있는 권력과 힘이 있었으니. 그리고 '안'이 그렇듯 모든 아들들이 태생적으로 '악의 화신'들은 아닐테니.
사족 2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축이기도 한 딸, 선
'안'이 惡을, '선'이 善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결과적으로 선은 안과 대결함으로써 안의 자수를 이끈다. 그런 이분법이 너무 도식적이고 진부했던 건 아닐까.
더우기 초반에 등장하는 선, 80년대 학번의 (물론 이건 나의 편견이겠지만) 대학생이 된 선, 반드시 그런 시대적 분위기가 아니었어도 조금은 붕떠있는 듯한, 가볍기조차 한 선의 캐릭터가 이물스러웠다. 물론 신에서 악마의 자리로 '변신'하는, 아버지의 실체이자 이면을 알게되면서 의식화 또는 성숙화 되어가는 흐름을 위한 필요성은 있겠지만, 후반에서 보여주는, 초등학교 때의 그 트라우마와 초반의 발랄함에선 쉽게 하나의 인물이라는 동일성을 상상하기 힘들게 한다.
사족3
"사람들은 그를 악마라 부른다. 그가 내 다락방에 숨어들었다"
단지 가벼운 상상일뿐이지만, 그것이 책의 전체 내용을 어떻게 이끌어갈지도 모르겠지만,
진짝 '악마'를 표현했더라면 어땠을까란 생각도 든다.
'악마를 보았다'의 최민식과 이병헌, 그 둘 중 누가 진정 악마일까란 구분이 의미 없을만큼 둘은 결국 끝~까지 간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결코 후회를 하거나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 정의의 편에서 악을 제거한다 생각했던 '안'은 왜 도피를 선택해야만 했을까. 그리고 10년이 넘어, 불현듯 자신의 행위에 대한 '용서'를 구해야만 했을까. - 그 용서조차 불편하거나 또는 지루한, 일상이 되어버린 다락방 생활에 대한 단순한 일탈의 차원일뿐이었을 지라도.
고문마저 단지 '밥벌이'의 수단이었을까, 무소불위의 조직을 해바라기하며 그 세계의 '한식구'가 되길 바랬으나 결국 '불가사리'의 발처럼 효용가치가 제거되어야만 했던, 단순한 수단으로서의 인간,이 아닌 진정 자신의 행위를 끝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 진짜 '괴물'같은 '안'을 끝까지 밀고가보는 건 어땠을지를 상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