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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예찬 ㅣ 프런티어21 14
알랭 바디우 지음, 조재룡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12월
평점 :
20대, 사랑은 구체적이고 실증적이었다. 비록 정의내려지거나 사랑의 주체가 되어보진 못했음에도 사랑은 보편적이었고 열린 가능성의 세계에 있었다. 몇 번이고 '러브레터'를 보아도 싫증나지 않았고 '상실의 시대'는 상실로 인한 고통은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실존을 경험하기 위한 통과제의와도 같았다. 늘 겨울처럼 춥고 암담했던 시절이었지만 봄은 언제고 도래할 것처럼 보였다.
30대, '비록 정의내려지거나 사랑의 주체가 되어보진 못했음에도' 더이상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을 기대하거나 시작한 사람들보단 '사랑'의 자연스런 종착역으로 생각되어지는 '결혼'이란 제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제 갓 결혼생활을 시작한 신혼부부에서 자식의 결혼을 바라보는 중년들까지. 하지만 그들의 표정과 언어 속에 사랑의 격정과 열정은 이미 퇴색되어 빛이 바랬다. 분리된 각자의 세계에 살던 둘이 만나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였지만 그 '세계'의 깊이와 넓이는 오히려 좁아져 "사회적으로 부여된 관성에 따라 아이를 키우고, 아이의 안락과 미래를 위해 '둘'은 희생된다. 새로움은 사라(p.160)'져버린지 오래다. 그들에겐 단지 일상을 군소리 없이 버틸 수 있는 사회적 시선과 의무로서의 '가정'이 있을 뿐이다.
40대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두 연인이 며칠 전 '결혼'을 했고, 40대를 갓 넘어선 한 여인이 '결혼'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삶의 의지를 꺾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며칠 후, 바디우의 『사랑예찬』을 읽는다.
사랑에 대한 낭만적 서술이 아닌 이성적, 철학적 접근임에도 분명 바디우의 『사랑예찬』은 그 어떤 문학적, 영화적 서술보다 뜨겁고 열정적이다. 그렇기에 한편으론 급진적이고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사랑은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을 만들어내는 지점들, 예컨대 차이의 관점을 시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유의 안으로 우리를 데려(p.27)" 가기 때문이다. 하나가 둘이 되는 순간이며 이 둘은 분명 더 확장된 모두의 세계로 들어가는 가장 시원적 심급이다. 즉 각자의 동일성을 넘어 차이의 세계를 경험하는 최초의 지점이 바로 '사랑'의 순간이다. 반복하자면 "사랑에는 우연의 순전한 특이성에서 보편적 가치를 지니는 한 요소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경험이 존재(p.27)한다.
사랑은 '우연'을 전제로 한다. "사랑은 우연의 산물이다. 아니, 우연의 산물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통념·이데올로기·판단·조작·통제·타협·공모 등을 사랑에서 제거해낼 가능성은 우연에서 말고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p130) 하지만 그 전제로 인해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30대(그 연령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후반의 성인들에게 '사랑'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대상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우연'을 통한 만남은 '욕망'으로 귀결되거된다. 또는 결혼을 전제로 한 타자와의 만남은 서로의 직업과 가정환경, 능력과 외모까지 고려된 '우연'일 뿐이기 때문이다.
더우기 바디우의 '사랑'은 우연을 통한 만남으로 시작되지만 그 우연은 지속되어야한다. 그것도 충실하게.
앙드레 고르의 『D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결혼을 준비하고 있던 친구에게 선물로 준적이 있다. '아~사랑이란 이런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고 그들의 삶을 닮아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보는 수많은 커플들을 지켜보면, 그 충실한 지속성이란 것이 얼마나 어렵고 지난한, 거의 완전한 불가능에 닿아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1년, 2년, 3년 그리고 3년 이후의 부부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도대체 '결혼이란 무엇인지'란 회의먼저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대부분의 그들은 '그럼에도'라는 자기 위안을 내뱉으며 말끝을 흐르지만 그들의 언어는 그들의 표정을 배신하고 있음을 금새 알아볼 수 있다.
내가, 우리가 해내지 못한다고 바디우의 '사랑'을 부정하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다. 신이 물리적으로 현존하지 않는다 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못하는 종교인들과 같이. 나조차 '사랑'이 나와 다른 타자를 통해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그리고 더낳은 세계로 인도해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안내자가 되어줄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기에.
어쩌면, 진정한 사랑은 한 점에 고정되지 않고 방랑하는 유목민들에게 가장 가까이 있지 않을까란 생각도 든다. 배낭여행을 통해서 만났던 사람들. 짧은 만남이 강한 울림으로 남는 건 그 만남에 순수한 '우연'이 전제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직장이나 가정, 지식과 능력이 배제된, 한 사람의 배경이 사라지고 무장해제 된 '인간'으로서의 만남. 소유물이 늘어가고 통장의 잔고가 늘어나면서 점점 더 현실에 고정되어가는 내가 보인다. 사랑은 그만큼 반비례해 서서히 나의 무대에서 멀어져가고 있는지도...